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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11화 (111/153)

〈112화〉

나는 발목을 이리저리 굴려 보았 다. 시큰거리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리엘 영애.”

델레이나가 엄한 목소리로 내 이름 을 불렀다.

“내가 부탁하겠소. 치료를 받으시오.”

“아, 알겠습니다, 황녀 전하.”

황녀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날 걱정하는 델레이나를 보 니, 아까 주었던 선물 덕에 나에 대 한 호감도가 오른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했다.

나는 항복하곤 세드릭을 돌아보았 다.

“그럼 확인 정돈 해 볼게요.”

제 주치의를 부르겠습니다. 옆 방

으로 가시죠.”

그렇게 말한 세드릭이 내게 한 발 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레이디.”

“네? 네, 그러세…… 으엇!”

깜짝 놀란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꺾였다. 세드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안아들었다. 내 몸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붕 떴다.

나는 빠르게 더듬거렸다.

“괜, 괜찮, 괜찮은데요! 걸을 수 있 어요!”

“구두 신고 걸으시다가 또 삐끗하 실지 모릅니다.”

“아닌데요! 조심해서 잘 걸을게 요!”

“아리엘 영애, 숙부님의 말을 듣는 게 좋겠소. 발목은 다치면 꽤 오래 간다오.”

델레이나가 또 세드릭을 거들었다. 그와 동시에 세드릭이 발을 내디뎠 다.

“ 으아

세드릭의 팔이 나를 단단히 감싸 안고 있었지만, 몸이 흔들리자 덜컥 겁이 난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떠, 떨어뜨리시면 안 돼요.”

“행여나.”

세드릭이 희미하게 웃었다.

저 미소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다 고 하면, 중증인 거겠지?

세드릭과 그에게 안겨 가는 내게

수많은 시선이 꽂혔다. 사람들이 흥 분한 얼굴로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오늘 여러모로 볼거리가 많군요.”

“정말요. 아, 그나저나 유리아 영 애, 제가 이겼어요. 둘이 다시 만나 는 거 맞다고 했죠?”

“칫. 여기 오백 비스요. 정말 헤어 진 줄 알았는데!”

“하아, 유리아 영애는 그렇게 눈치 가 없으셔서 큰일이에요.”

제발 남의 일에 신경들 좀 끄세요, 이 사람들아!

나는 속으로만 불만을 터뜨리며, 얌전히 세드릭에게 안긴 채 옆 방으 로 실려갔다.

연회장과 이어진 복도에는 수많은 방이 있었다.

세드릭은 그중 한 방의 문을 열어 젖혔다. 휴게실 용도로 만들어진 듯 한 방은, 따뜻하고 안락해 보였다.

세드릭이 기다란 소파 위로 나를 앉혔다.

“곧 주치의가 올 겁니다.”

나를 내려놓으며 세드릭이 말했다.

나는 조심조심, 세드릭의 목을 감 고 있던 팔을 거뒀다.

“……감사해요.”

“구두, 벗고 계시겠습니까?”

세드릭의 물음에 나는 화들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세드릭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 발 목 부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염려가 되긴 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진짜로.’

나는 민망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정말 안 다쳤어요. 그렇게 안 믿기시면 직접 보실래요?”

나는 스스로의 발목을 쓸어내렸다. 붓기는커녕 조금의 열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레이디. 만지지 마십시오.”

세드릭이 혀를 차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벗고 계시는 게 역시 편하지 않으 시겠습니까?”

그의 손이 내 구두를 감쌌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레이스 양말 을 감싸고 있는 모양새가, 왠지 이 상하리만치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그럼 제가 벗을게요.”

고작 구두를 만지고 있을 뿐인데,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나는 세드릭이 정말 내 구두를 벗 겨낼까 봐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세드릭이 고개를 들었다.

‘ 아.’

우리는 동시에 숨을 멈췄다. 시선 과 시선이 지척에서 마주쳤다.

나는 지나치게 가까운 세드릭의 적

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쁜 눈.’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가 구제 불능 같았다.

심장이 더 거세게 방망이질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 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 요망한 향수의 효과가, 아직까 지도 남아 있는 걸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향수의 효과라고 볼 수 없었다.

정말 그 향수가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의 마음을 갖고 놀 수 있는 효 능을 지녔다면, 그런 걸 만들어낸 나는 전설의 연금술사로 떠받들려야 했다.

아니면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거나.

그러니 이 두근거림은 이제 향수와 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게 맞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어째서 저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는 걸까.

어째서 추운 것처럼 손끝이 떨리 고, 더운 것처럼 열이 오르는 걸까.

어째서, 지금 내 심장은 이렇게까 지……스

‘정신 차려. 아리엘 윈스턴.’

그때 어떤 속삭임이 귓가에 들려왔 다.

‘너 지금 얼굴에 흘린 거야.’

잘생기고 예쁜 인간들이 얼마나 위 험한지 몰라? 지금 넌 현혹당한 거 라고. 알겠으면 얼른 눈 감아!

머릿속에서 누군가 경고를 외쳤지 만, 나는 세드릭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만화경처럼 예쁜 루비빛 눈동자가 온전히 나를 담고 있었다.

영원처럼 느껴지던 침묵 속에서 세 드릭이 입술을 뗐다.

“레이디, 제가……-”

그때 누군가 벌컥 문을 열었다.

“에반스 전하, 다치셨다니 대체 무 슨- 허억!”

은테 안경을 낀, 유약하게 생긴 청 년이 우리를 발견하곤 숨을 들이켰 다.

“죄, 죄송합니다! 타이밍이 나빴습 니다! 물러나겠습니다!”

“아니에요!”

나는 황급히 청년을 붙잡았다. 더 는 이 공간에서 세드릭과 단둘이 있

을 자신이 없었다.

청년이 움찔대며 나와 세드릭의 눈 치를 보았다.

세드릭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고개 를 끄덕였다.

“러스티. 어서 이리 와서 레이디의 발목을 봐 드려라.”

“예, 예!”

러스티라 불린 청년이 얼른 내게로 다가왔다. 청년의 손길이 아주 조심 스레 내 발목을 살폈다.

으음

발목을 진찰하며 러스티가 진중한 신음을 흘렸다. 누가 보면 귀 불치 병이라도 진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뒤 러스티가 결론을 내렸다.

“레이디의 발목에는 아무 이상도 없으십니다.”

“그것 봐요, 내가 그랬잖아요.”

나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니까요.”

“러스티, 확실한가?”

“물론입니다, 전하. 레이디께서는 당장 뜀박질을 하셔도 무리 없으실 정도로 건강하십니다.”

“좋아. 다행이군.”

세드릭이 그제야 안도한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괜한 기우였 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뭐, 그래도

절 걱정해주신 거니까요. 감사해요.”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꾸민 목 소리로 대답했다.

이상했다.

분명 의사는 내 발목에 아무런 문 제가 없다고 했는데.

왜 세드릭이 어루만졌던 부근이 아 직도 간질거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쏘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온 우리를 델 레이나가 반갑게 맞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피부를 따끔따끔

찔렀다. 아무래도 내가 세드릭에게 안겨서 실려 나갔던 게 짜하게 소문 이 퍼진 모양이었다.

나는 애써 담담한 척 어깨를 폈다.

‘이건 다 노이즈 마케팅이다, 노이 즈 마케팅.’

어떤 식으로든 나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자연스레 가게에 손님도 늘 어날 거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담대하게 시선들을 받아넘겼다.

“와인이나 한 잔 더 할래요.”

“레이디, 벌써 일곱 잔째입니다 만……:’

세드릭이 쩔쩔매며 내 뒤를 따라왔 다.

나는 개의치 않고 은쟁반에서 와인 잔을 집어들었다.

“어허. 이 정돈 그냥 음료라니까요. 음료.”

생각해보면 오늘은 여러모로 자축 할 일이 많은 날이었다.

델레이나에게 성공적으로 선물을 건네기도 했고, 크뤼거 후작도 계획 대로 향수를 받아서 갔고. 게임도 이겼고……오

음, 무엇보다 계속 신경 쓰이는 발 목의 간질거림을 잊기 위해서라도 알코올이 필요했다.

“에라, 오늘은 마시고 죽죠!”

“레이디……?”

나는 깜짝 놀라는 세드릭을 향해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원래 남의 생일 파티에서는 죽어 라 먹고 마시는 게 예의예요.”

“그런 예법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 다만……,”

“자, 어서요.”

결국, 세드릭은 마지못해 잔을 들 었다.

잔이 부딪치며 맑은소리가 울렸다.

‘마시자. 마시고 잊자.’

잊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

었다.

왜 세드릭을 보면 고장 난 것처럼 심장이 뛰어대는지, 의사가 만졌을 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세드릭이 만졌던 부분만 왜 아직도 화끈거리 는 건지.

그 모든 의문들을 머릿속에서 지워 야 했다.

오늘 밤 안에, 반드시.

‘답을 내 봤자 나만 다치지.’

나는 본능적으로 그걸 알 수 있었 다.

잊는 데엔 뭐니 뭐니 해도 술과 유흥이 최고다. 다만 이 와인은 너 무 순해서 아쉬운 감이 있었다.

“좀 더 도수 높은 술은 없나?”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챙그랑.

잔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주인공은 델레이나였다. 황 금빛 액체가 찰랑이는 잔을 든 델레 이나가 우리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오늘 이렇게 자리해주어 다시 한 번 고맙소. 늦은 시간까지 어울려준 그대들과 건배를 나누고 싶소.”

시종들이 은쟁반을 들고 사람들 사 이를 돌아다녔다.

쟁반 위에 놓인 잔 속에선 황금빛 액체가 눈부신 자태를 발하고 있었 다.

‘샴페인!’

내 눈‘이 반짝 빛났다.

나는 얼른 은쟁반에서 잔을 받아들

었다.

“레이디.”

세드릭이 또 나를 말렸다. 나는 손 사래를 쳤다.

“걱정하지 말아요, 전하. 제가 설마 정말 황녀님의 생신 연회에서 고주 망태가 되겠어요?”

한 잔, 딱 한 잔만 마실 거다.

황금빛 샴페인이 유혹적인 빛을 뿜 으며 찰랑거렸다.

나는 방긋 웃으며 세드릭에게도 잔 을 권했다.

“자, 전하께서도 조카님의 생일을 축하하셔야죠.”

“하아.”

낮게 한숨 쉰 세드릭이 결국 잔을 받아들었다.

황녀가 가볍게 건배사를 읊었고, 연회장 안의 모든 이들이 잔을 들어 올렸다.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샴페인 잔 속으로 녹아들었다.

샴페인 위로 피어오르는 황금빛 기 포가 샹들리에 빛과 맞물려 오로라 처럼 번졌다.

“흐응.”

나는 희미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렸 다.

샴페인의 기포와 함께 내 기분도 붕 하늘로 떠올랐다.

보 # 소

……어쩌면, 너무 높이까지 떠올랐 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 럴 때마다 시야가 유리병 속 세계처 럼 일렁거렸다.

‘음, 취했군.’

나는 간단히 내 상태를 진단했다.

와인을 몇 잔이나 들이부을 때까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마지막 샴페인 한 잔이 스트라이크를 쳐 버 린 듯했다.

'세드릭한텐 숨겨야겠어.’

나는 속으로 굳건히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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