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모든 참가자와 구경꾼들이 나를 바 라보았다.
나는 위풍당당하게 경기장 외곽을 거 닐 었다.
‘이제 여기저기서 간섭할 수 있겠어.’
이건 게임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 을 정도로 엄청난 특혜였다.
골을 넣은 후 나는 경기를 종횡무 진 이끌었다.
“아리엘 영애! 이쪽! 이쪽으로 와 주세요!”
참가자 하나가 우는 소리를 하며 나를 불렀다.
공이 그 참가자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그 뒤는 사역마 떼가 맹렬히 쫓는 중이었다.
나는 번개같이 그쪽으로 달려가 유 리 막대를 휘둘렀다.
캉!
또 한 번 막대가 공을 저 멀리 상 대편 골대 쪽으로 쳐 냈다.
눈앞에서 공을 놓친 파란 옷 사역 마들이 분한 듯 발을 쾅쾅 굴렀다.
“미안, 얘들아.”
나는 사역마들을 향해 속삭였다. 오랜만에 하는 스포츠라 그런가, 꼭 이기고 싶거든.
전반전이 끝나고 짧은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현재 스코어는 3:1,물론 우리가
이기고 있는 중이었다.
휴식을 알리는 손뼉 소리가 들리자 마자 나는 세드릭의 곁으로 돌아갔 다.
세드릭이 기다렸다는 듯 내게 얼음 물을 건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레이디.”
“아, 감사해요.”
나는 품위도 잊고 얼음물을 꿀꺽꿀 꺽 들이마셨다.
“저를 버리고 여기저기 바삐 다니
시더군요.”
“어머. 죄송해요. 외로우셨나 봐요, 전하.”
“그랬긴 하지만 제 외로움 따위로 레이디의 발목을 잡을 순 없지요.”
세드릭과 농담을 나누는데 주변 사 람들이 귀를 쫑긋 세우는 게 느껴졌 다. 로맨틱한 가십을 원하는 눈빛들 이었다.
‘그냥 농담 따먹기 중이니까 진정 들 하세요.’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세드릭을
바라봤다
세드릭 에반스 같은 유명인의 삶에 는 확실히 고달픈 면이 있긴 했다. 지인과 시시덕거리기만 해도 시선들 이 쏟아지니까.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는데, 시종이 휴식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 음을 알렸다.
“전하, 기대하세요.”
다시 자리로 돌아가며 나는 세드릭 을 향해 믿음직스레 엄지를 치켜올 렸다.
“전하께 곧 승리를 안겨드리죠.”
“한 치 의심 없이 기다리고 있겠습 니다.”
세드릭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미소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 다. 나는 언제부턴가 시도 때도 없 이 뛰어대는 심장을 타일렀다. 이건 거의 협심증 수준이었다.
하여튼 저 얼굴이 문제라니까.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마음을 다 잡았다.
6진정 좀 하자. 신성한 스포츠 중 에 남자한테 한눈팔면 안 되지.’
경건히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다시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하얀 옷을 입은 우리 팀 사역마들 이 나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나는 사역마들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사역마 들이 날개로 내 동작을 따라했다.
“좋아, 얘들아. 가자!”
가벼운 기합과 함께 시합이 재개되 었다.
짝!
심판의 손뼉 소리와 함께, 파란 옷 사역마가 맹렬히 공을 쳐냈다. 어찌 나 힘이 세게 들어갔는지 그 사역마 는 공을 치면서 동시에 철벅 엎어졌 다.
자세는 우스꽝스러웠으나 그만큼 위력은 대단했다.
“아앗!”
나는 깜짝 놀라 공의 궤적을 확인
했다.
공이 휘황찬란한 잔상을 남기며 이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 이쪽이잖아!’
뛸 필요도 없으니 마침 잘 됐다.
나는 유리 막대를 단단히 고쳐 잡 으며 공을 끝까지 쳐다보았다.
‘조금 오른쪽!’
내게 날아오는 듯하던 공은 가까워
질수록 오른쪽으로 궤도를 틀었다.
나는 뚫어져라 공을 노려보며 몸을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였다.
기울어지던 몸이 뭔가에 턱 걸렸 다. 따뜻한 무언가가 내 몸을 단단 히 잡았다.
나는 그게 뭔지 생각할 겨를도 없 이 유리 막대를 다잡았다.
점점 더 공이 궤도를 틀었다.
‘조그만 녀석이 감히 변화구를 던 져!’
나는 황당함을 토하며 공의 궤적을
끝의 끝까지 좇았다. 몸이 점점 더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이렇게까지 기울이고 있는데 왜 안 넘어지는 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드디어 공이 막대의 사정거리 에 들어왔다.
나는 본능에 모든 것을 맡기고 손 을 휘둘렀다.
깡!
시원스러운 소리와 함께 공이 하프 라인을 넘어갔다.
“우와아……『
“헉……!”
그런데 어쩐지 이번엔 환호성이 아 까와 좀 달랐다.
환호를 지르고는 싶은데, 그래도 될지 모르겠다는 듯 소심한 목소리 들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공이 아니라 내게 닿아 있었다.
그제야 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내 몸이 이런 각도로 기울어져 있지?
왜 이렇게나 중력을 거슬렀는데 넘
어지지 않은 거지?
고개를 든 순간 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바로 위에 세드릭의 얼굴이 보였 다.
“으엇.”
내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 다.
그제야 내 몸을 받치고 있는 존재 감이 느껴졌다.
내 어깨를 단단히 안고 있는 두 팔. 등에 맞닿은 남의 가슴에서는
체온과 심장박동이 전해져 왔다.
시선이 마주치자, 나와 세드릭은 동시에 입을 더듬었다.
“저, 전하.”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나는 화드득 세드릭의 품에서 벗어 나려다가, 오히려 발을 삐끗하고 말 았다.
“으앗!”
“레이디!”
세드릭의 팔이 얼른 나를 끌어안았 다.
아까보다 더욱 짙은 체온이 전해져 왔다.
‘가까워. 가까워……!’
내 머릿속을 점령한 건 오직 그 한 단어였다.
세드릭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 웠다. 그 생각만으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상했다. 세드릭 에반스와 여태
스킨십이 한 번도 없었던 것도 아닌데.
왜 이제야, 게다가 신성한 스포츠 한중간에서 이렇게 의식이 되어 버 리는 걸까?
세드릭이 패닉으로 굳어버린 내게 속삭였다.
“레이디, 일으켜 드리겠습니다. 힘 을 푸세요.”
방금 전 입술을 더듬거리던 모습과 달리, 그 목소리는 침착한 것처럼 들렸다.
나는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어 고
개를 쳐들었다.
왜 나만 창피해하는 건데?
‘잘난 공작님께선 이 정도 스킨십 가지곤 당황하지 않는다 이거야?’
그러나 고개를 들어 다시 세드릭을 마주 본 순간.
나는 내 생각이 헛되었음을 깨달았 다.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일 수도 있겠 지만, 세드릭과 꼭 맞닿아 있는 내 게는 잘 보였다.
그의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
는 게.
그 모습에 애꿎은 내 얼굴이 펑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제, 제가 일어날게요.”
일단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우 선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세드릭 에 반스의 품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나는 오직 그 목적만 갖고 억지로 몸에 힘을 주었다.
“으아앗!”
그러나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다시금 세드릭의 팔 안으로 무 너져내리고 말았다.
‘대체 이놈의 몸뚱이가 왜 이러 지?’
식은땀이 흘렀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내가 그냥 세드릭의 품속에서 바르작대고 있는 것으로만 보일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수군대 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두 분이……,”
“뜨겁네요, 뜨거워.”
“나 같은 솔로는 서러워서 못 살겠 네.”
다들 신경 끄고 게임이나 해요!
나는 분통을 터뜨리며 팔을 허우적 거렸다. 세드릭이 당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레이디. 제가 일으켜 드릴테니 침
착하세요.”
귓가로 내려앉는 목소리에 나는 눈 을 꾹 감았다.
목소리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았 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이 목소리에 서는 새콤하고 달큰한 자몽 향이 나 는 것 같았고.
“자, 이제 됐습니다. 괜찮으십니 까? 발목을 다치신 건 아니고요?”
나를 걱정하는 이 목소리에선 포근 한 화이트 머스크 향이.
“레이디? ……많이 다치셨습니까?”
덜컥 불안해하는 목소리에선 순한 비누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 이상해.’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어떤 천재는 만물에서 향기를 느낀 다고 하지만 난 그 정돈 아니었다.
그러니 코끝을 어지럽히는 이 모든 황홀한 향기들은 그저 환상에 불과 할 터였다.
그럴 텐데도……소
왜 휘몰아치는 향기에 숨조차 제대 로 쉴 수 없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괜, 괜찮아요.”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다잡고 말했 다.
세드릭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정말입니까? 넘어질 때 발목을 다 치신 것 같은데. 근처에 제 주치의 가 있습니다. 바로 부를 테니……『
“아뇨,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가만히 내버려 두면 세드릭은 나를 당장 소파로 데리고 가 직접 내 발 목을 들여다볼 기세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휘저어 그를 안 심시 켰다.
“그냥 잠깐 머리가 어지러웠어요. 막대를 너무 세게 휘둘렀나 봐요. 하하.”
그렇게 말하며 나는 다시 경기장을 돌아보았다.
경기장은 마치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물론 사역마들까지 눈을 빛내며 나와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녀석들이 하라는 게임은 안 하 고……!’
다들 내가 세드릭 품에서 허우적대 는 모습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던 모 양이었다.
구경 나왔어?!
발끈한 나는 상대편 골대를 가리키 며 외쳤다.
“어? 공 들어갔다!”
모든 사람과 사역마가 퍼드득 놀라 내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공은 골대 근 처를 굴러가고 있었다.
“쳐내, 얘들아! 골인시켜!”
일부러 크게 소리치자, 다시 머릿 속으로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순식간에 게이머 1로 돌아온 나는
우리 팀 사역마들을 응원했다. 사역 마들이 그제야 허겁지겁 달리며 공 을 추격했다.
머지않아 후반전도 끝이 나고, 게 임이 완전히 종료되었다.
최종 스코어는 5:1,승리는 우리 팀의 것이었다.
“이겼다!”
“하얀 팀의 영웅! 아리엘 윈스턴 만세!”
우리 팀 참가자들이 5점 중 무려 4점에 기여한 내 이름을 연호했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사역마들을 돌아보았다.
“수고했다, 얘들아!”
사역마들이 날개를 퍼덕대며 내게 화답했다.
귀여운 것들. 나는 킥킥 웃으며 황 녀를 돌아보았다.
“저희가 이겼어요, 황녀님!”
“후후. 모두 영애 덕이오.”
나와 델레이나는 거의 얼싸안으며 승리를 자축했다. 생일 선물의 영향 일까, 고작 게임 한 판만에 델레이 나와 많이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세드릭은……,
“레이디. 역시 발목을 봐야겠습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 쳤다.
“괜찮아요. 안 다쳤다니까요!”
발목 이야기를 하자 조금 전 있었
던 스킨십 사건이 고스란히 떠올랐 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 기억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러나 세드릭은 무척 완강했다.
“발목처럼 연약한 부위는 통증이 심하지 않더라도 바로 치료해야 합 니다. 방치했다가 심해지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그건 숙부님의 말이 맞소, 영애.”
델레이나마저 심각한 얼굴로 세드 릭의 말에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