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나는 슬쩍 테이블 중 하나를 돌아 보았다.
유난히 복작대는 테이블이다 싶었 는데, 참가자 중엔 무려 황녀도 있 었다.
‘황녀와 게임 할 기회라, 놓치기 싫은 기회긴 한데.’
“전하, 저희도 게임 한 판 할까 요?”
세드릭이 깜짝 놀라더니 나를 바라 보았다.
‘왜 저렇게 놀라지?’
지금 시각은 저녁 여덟 시 삼십 분 경.
세드릭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꾸 만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가령, 자꾸 굳은 얼굴로 멍하니 허 공을 바라본다든지, 내가 시계를 확
인할 때마다 긴장한 눈으로 쳐다본 다든지. 지금처럼 무슨 말만 하면 놀란다든지.
‘혹시 몸이 안 좋나?’
그런 거라면 나도 세드릭을 오래 붙잡고 싶진 않았다.
내게 할 말이라는 게 뭔지 궁금하 긴 하지만, 다음에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으니까.
혹시 피곤하신 거면 이만 돌아갈까 요?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였다.
“이베르 게임도 하십니까, 레이디?”
‘이베르’라는 건 게임의 이름이었 다.
귀족들이 종종 즐기는 벨레르 제국 의 전통 게임인데, 준비 비용이 워 낙 비싸서 자주 즐길 수 있는 게임 은 아니었다. 나 역시 여태까지 구 경만 해본 게 전부였다.
“사실 해본 적은 없긴 한데요.”
준비 비용이 비싼 이유는 간단했 다. 마법사들이 창조해낸 사역마가
대량으로 투입되기 때문이다.
‘마침 저기 보이네.’
나는 살짝 까치발을 들었다.
커다란 게임 테이블 위에서 병아리 처럼 생긴, 하얗고 털이 난 생명체 가 스틱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사 역마였다.
사역마는 스틱을 든 채 상대편의 골대를 향해 맹렬히 질주하고 있었 다.
사람 주먹 크기밖에 안 되는 조그 만 녀석의 질주에 모두가 숨을 죽이
고 집중했다.
골대 앞까지 모든 사역마를 제치고 달려간 그 녀석은, 마침내 골대 안 으로 공을 밀어넣었다.
“와아!”
“최고다! 굉장해!”
환호와 찬사가 쏟아졌다.
승리의 주역인 사역마가 털을 한껏 부풀리며 환호성을 만끽했다.
나는 사람들을 따라 짝짝 손뼉을 쳤다. 세드릭이 내게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한 게임 할까요, 저희도.”
나는 눈을 반짝이며 세드릭을 돌아 보았다.
“그럴까요?”
그때 테이블에 앉아 있던 황녀가 우릴 발견하곤 제 시종에게 무어라 말을 건넸다.
곧 시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황녀 전하께서 두 분이 게임에 참 석하시길 원하십니다. 응하신다면 바로 새로운 테이블을 준비하겠습니 다.”
고개를 돌리자 황녀가 은근히 기대 에 찬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게 보였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 다.
“참가할게요!”
그러자 즉각 새로운 게임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시종들이 미니 죽구장처럼 생긴 커 다란 테이블을 가지고 왔다.
황실 마법사가 주문을 외자, 허공 에서 사역마들이 뿅뿅 튀어나왔다. 스틱과 보호구를 착용한 사역마들이 었다.
사역마들은 엄지만 한 스틱을 휘두 르고 발을 구르며 전의를 다졌다.
“혹시 룰 설명이 필요하십니까, 레 이 디?”
세드릭이 친절히 물었다. 나는 고 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이베르는 룰이고 뭐고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간단한 게임이었다.
첫 번째 룰. 상대편 골대에 공을 더 많이 집어넣은 팀이 승리한다.
두 번째 룰. 참가자들은 게임 테이 블 주위로 빙 둘러선 채, 공이 자기 쪽으로 굴러온다면 토스를 해줄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세 번째 룰. 사역마 들과 달리 서 있는 참가자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다. 딱 하나
있는 특별 규칙을 충족시키지 않는 한.
‘직접 참여하는 건 처음이라 떨리 네.’
나는 학창시절 구기 종목 스포츠를 꽤 잘하는 편이었다.
특히 피구 같이 뭔가를 던져서 맞 추는 것엔 자신 있었다.
‘아직도 실력이 그대로이려나?’
모르겠다. 병상에 누운 뒤로 지금
까지 공은 손에 잡아본 적도 없으니 까.
나는 약간의 설렘을 안고 테이블 옆에 섰다. 세드릭도 내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다.
“전하,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이라 도 움직이시면 바로 패배예요. 아시 죠?”
나는 세드릭에게 단단히 주의를 시 켰다.
오랜만에 하는 게임이니만큼 꼭 이 기고 싶었다.
세드릭이 설핏 웃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꼭 이겨요, 우리. 파이팅!”
내 왼편에 선 황녀가 미소를 지었 다.
“영애는 승부욕이 있는 편이로군.”
“그럼요, 황녀님. 지는 것보단 이기 는 게 좋잖아요.”
나는 손목 스트레칭을 하며 사역마
들에게도 파이팅을 외쳤다.
“얘들아, 잘해보자!”
옹기종기 모여 전략을 모의하듯 부 리를 움직이던 사역마들이 나를 돌 아보고 스틱을 흔들었다.
파이팅 넘치는 모습에 절로 흐뭇함 이 들었다.
“맞는 말이군. 자, 슬슬 시작하지.”
델레이나의 말에 시종들이 참가자 들에게 짤막한 유리 막대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사역마들에게 공을 토 스하기 위한 막대였다.
‘음, 그립감 괜찮고.’
유리 막대를 쥐었다 폈다 하며 나 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략을 다 짰는지 사역마들이 포메 이션대로 자리를 잡았다.
나는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역 마를 바라보았다. 털이 유독 복슬복 슬 뭉친 녀석은 발을 구르며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럼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시종이 말했다.
참가자와 사역마들이 숨을 죽이고 시종의 손을 주시했다.
짝!
시종이 손뼉을 침과 동시에, 사역 마들이 와르르 전장을 내달렸다.
“오, 잘한다, 잘한다!”
복슬이가 가장 먼저 경기장 정가운 데에 있던 공을 쟁취했다.
하얀 옷을 입은 우리 팀 사역마들 은 신나서 스틱 쥔 날개를 흔들었 고, 파란 옷 사역마들은 복슬이에게 달려들었다.
“도망쳐!”
내 간절한 외침이 닿았는지, 복슬 이가 공을 스틱으로 굴리며 적들에 게서 빠져나왔다.
그대로 골대를 향해 맹렬히 질주하 던 복슬이는, 곧 철퍼덕 바닥에 뻗 고 말았다.
바짝 붙어 있던 파란 옷 사역마가
털을 휘날리며 공을 가져갔다.
“전하! 방금 그거 반칙 아니었어 요?”
나는 흥분해서 외쳤다.
잘 달리던 애가 왜 넘어져! 저 녀 석이 발 건 거 아냐?
“제 각도에선 똑바로 보였는데, 안 타갑게도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 넘 어지더군요.”
세드릭이 나를 진정시켰다.
나는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 다. 지금 전장은 상대편 쪽 골대 부 근이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내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공과 가까이 서 있는 참가자들이 열심히 스틱으로 가까이 굴러온 공 을 토스했다.
상대편 남자가 토스한 공이 파란 옷 사역마 앞으로 정확히 굴러갔다.
덕분에 공을 차지한 파란 옷 사역 마가 콧김을 내뿜으며 우리 쪽 골대 로 공을 굴렸다.
“켄시 백작은 이 게임엔 아주 도가
텄지.”
델레이나가 쯧 혀를 찼다. 방금 정 확히 공을 토스했던 켄시 백작에게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후작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 토스 한 번 한 걸 가지고.’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저 정 도는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 기회가 오지 않았다. 공 이 내 쪽으로 굴러오질 않는 것이 다.
6움직이면 안 된다는 룰이 생각보 다 엄청 불편하네.’
“제발, 제발…… 이쪽으로 와라. 제 발 ”
그렇게 속으로 간절히 중얼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세드릭과 델레이나 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영애를 위해서라도 이 게임은 져 선 안 되겠군요, 숙부.”
“심판을 매수할까.”
“그런 짓을 하시면 게임 정신을 망 쳤다고 되레 원망받을걸요.”
“그건 그렇겠군.”
대화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순간, 적 팀 사역마가 롱패스를 성 공한 것이다.
“아아!”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공이 우리 팀 골대 쪽으로 데구루루 굴러왔다.
파란 팀 사역마들이 눈을 빛내며
공을 향해 질주했다.
길게 뻗은 공의 궤적이 내 쪽을 향했다.
이건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였다.
나는 온 신경을 날아오는 공에 집 중했다.
공은 거의 쌀알만 했지만, 오색찬 란하게 자체발광하고 있는 덕분에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사역마들이 내쪽을 향해 헐레벌떡 달려오는 게 보였다.
특히 복슬이는 상대편 골대에서부 터 달려오느라 혀까지 빼물며 전력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복슬이보다 파란 옷 사역마 가 조금 더 빨랐다.
날렵한 놈의 날개가 공을 향해 스 틱을 던졌다.
‘저거 반칙 아냐?!’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스틱이 공을 덮기 직전, 드디어 공 이 내 유리 막대의 사정거리에 닿았 다.
흐
나는 짧게 심호흡한 뒤, 미리 계산 하고 있던 각도대로 손목에 스냅을 주었다.
깡!
유리 막대가 공을 후려치며 경쾌한 소리가 났다.
“어머나.”
“세상에.”
내가 친 공이 허공 높이 떠올랐다.
나와 사람들, 심판, 사역마, 모두의
고개가 공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특히 사역마들은 허리까지 벌러덩 젖혀가며 날아가는 공을 구경했다.
‘제발.’
공이 허공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일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는 숨까지 참으며 공의 궤적을 바라보았다.
멀리멀리, 휘황찬란한 잔상을 남기 며 날아간 공은…
곧 상대편 골대를 힘차게 뚫었다.
“우와아!”
“꺄아아악!”
함성이 장내를 울렸다.
“말도 안 돼!”
상대편 참가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고, 상대편 사역마들은 철퍽 바닥에 주저앉았다.
반면 우리 편 참가자들은 유리 막 대를 마구 흔들며 내게 찬사를 보냈 다.
“아리엘 영애! 최고예요!”
“해냈군, 영애!”
황녀도 신나는지 기쁨을 감추지 못 했다.
복슬이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 는 게 보였다. 다른 우리 팀 사역마 들은 스틱을 허공에 던지며 세리머 니를 했다.
‘공을 넣은 건 난데, 왜 너희가 세 리머니를……?’
뭐, 귀여우니까 상관없지만.
나는 뿌듯한 미소와 함께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세드릭은 진지한 얼굴로 손뼉을 치 고 있었다.
“최고였습니다, 레이디. 레이디께선 못하시는 게 대체 뭡니까?”
“헤헤.”
“방금 그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 영 원히 남겼어야 했는데.”
세드릭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또 좋다고 실없이
웃었다.
‘후, 이제 정신 차리자.’
나는 들뜬 마음을 얼른 진정시켰 다.
내가 잘한 건 맞지만, 아직 게임을 이긴 건 아니었다. 이제 고작 1:0일 뿐이니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아리엘 윈스턴 님께서는 이제부터 특별 규칙의 적용을 받게 되십니 다.”
심판을 맡은 시종이 내게 말했다.
특별 규칙. 하프 라인 너머에서 한 번에 골인을 성공한 참가자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였다.
“지금부터 아리엘 님께서는 유일하 게 경기장 외곽에서 움직이실 수 있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