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세드릭이 그런 나를 심상치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태껏 많은 무도회에서 나를 지켜 봐 온 그는 이제 눈치챈 모양이었 다. 내가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가기 전 항상 부채를 펼친다는 걸.
‘이걸 들면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차오른단 말이지.’
나는 부채를 팔랑거리며 영애들에 게 밑밥을 던졌다.
“그나저나, 요즘은 유독 뭘 해도 피곤하고 몸이 늘어지지 않나요?”
“어머, 정말 그래요.”
“저도요. 슬슬 날이 더워져서 그런 가?”
영애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긍 했다.
나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걱정이 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맞아요. 저희 하녀 아이도 요즘 항상 피로하고 눈 밑이 퀭해 보이더 라고요.”
또 팔아서 미안, 리나.
나는 속으로 오늘 아침에도 활기차 게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한 리나에 게 사과했다.
“저런. 더위를 타는 걸까요?”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에요. 그래 서 요즘은 그 애를 위한 특제 향수 를 제작하고 있답니다.”
“어머나! 아리엘 님께서 직접요?”
“세상에, 너무 다정하신데요?”
영애들이 좋은 고용주라며 선망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두엇 정도는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 였다.
“저도 요즘 피로감이 심한데…… 혹시 완성되면 한 병 구입할 수 있 을까요?”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고개 를 끄덕였다.
“될 것 같아요. 까다로운 재료들이
들어가는 편은 아니거든요.”
“어머나, 정말요? 세상에! 아리엘 영애의 신상을 써볼 수 있다니 벌써 너무 신나요!”
“하하, 너무 기대하진 말아 주세요. 그래 봤자 향수라, 마법 같은 효과 를 보긴 힘들 거예요.”
“〈자양강장제〉를 만드신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네요. 저 요즘도 아침마다 그 향을 맡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고요. 에너지가 팍 솟아나 거든요!”
리나 못지않은〈자양강장제〉신봉 자가 여기에도 계셨군……오
나는 민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향수가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 이네요. 하지만 벌써부터 기대가 크 시면 부담스러운데…… 아, 그렇지. 혹시 괜찮으시다면 지금 미리 맡아 보시겠어요?”
나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한 목 소리로 말했다.
영애들이 약속한 것처럼 눈을 둥그 렇게 뜨며 외쳤다.
“정말요? 지금 시향해볼 수 있나 요?”
“많이 가져온 건 아니지만, 여기 계신 분들 정돈 시향해보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꺄악! 좋아요!”
영애들이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나는 파우치에서 시향용으로 가져 온 자그마한 용기를 꺼냈다. 영애들 의 기대 어린 시선이 내 손에 꽂혔 다.
“제 하녀인 리나 말고 다른 분이 시향하시는 건 처음이라 쑥스러운 데……/,
나는 부끄러운 듯 웃음을 지어 보 였다.
옆에서는 세드릭이 또 관람 모드로 들어가서 나의 영업을 지켜보고 있 었다.
옆얼굴이 좀 뜨거웠으나 나는 이 순간만큼은 세드릭을 철저히 무시하 기로 했다.
“그럼 지금 뿌려 드릴게요.”
“네에에!”
영애들이 기대에 찬 얼굴로 두 손 을 모았다.
그 경건한 자세에 나는 웃음을 참 으며 향을 분사했다.
영애들의 표정이 한순간에 몽롱해 졌다.
“아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라벤더 향과 화이트 머스크의 은은한 잔향.
이 향수는 예전 사샤에게 만들어 주었던 수면향을 한층 업그레이드한 것이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이에요.”
“이건 무슨 향기인가요, 영애? 라 벤더인가요?”
“어머, 정확히 맞추셨네요. 메인은 라벤더예요. 그리고……,”
나는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는 영애 들에게 향수의 성분을 간단히 알려 주었다. 영애들이 나를 둘러싸곤 한 번 더 뿌려달라며 졸랐다.
그 소란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자연스레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영애들에게 대답하는 척 슬쩍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회색 머리에 청안을 가진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좋았어.’
나는 짙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게 기웃거리던 사람들이 이리로 다가오는 크뤼거 후작을 발견하곤 옆으로 비켜섰다. 후작은 손쉽게 내 곁까지 다가왔다.
“레이디 아리엘이 아니십니까! 이 거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크뤼거가 신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방긋 웃으며 그 손 을 맞잡았다
“하이넨.”
그때까지 와인이나 홀짝이며 날 구 경하던 세드릭이 나섰다.
크뤼거가 얼른 내 손을 놓곤 무해 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자네. 오랜만에 만난 친우를 뭘 그리 노려보고 그러나? 하여튼 표현이 서투른 친구라니까.”
“레이디께 용건이라도 있나?”
“당연히 있지.”
크뤼거가 나를 내려다보더니 싱긋 웃었다.
“실은 굉장히 많다네. 당연히 그렇 지 않겠나? 소문이 자자한 그 레이 디 아리엘을 드디어 영접했는데.”
세드릭은 못마땅한 얼굴로 크뤼거 를 노려보았다.
“레이디, 조심하십시오. 크뤼거 후 작은 말만 저리 번지르르한 자입니 다.”
세드릭이 그렇게 말하며 내 앞을 반쯤 가로막았다.
이건 무슨 전개지. 세드릭이 의외 의 복병이 될 줄은 몰랐는데.
‘저리 가 봐요, 좀. 당신 친구한테 작업하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나는 속으로 투덜대면서, 다른 사 람들에게 보이지 않게끔 세드릭의 허리를 살짝 밀었다.
허리에 손이 닿는 순간 세드릭이 크게 움찔거렸다.
“호호, 전하께서도 참.”
나는 그렇게 말하며 세드릭의 허리 를 꾹꾹 밀었다.
세드릭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밀려 났다.
“자네, 몸이 어디 안 좋은가? 갑자 기 왜 휘청거리나?”
“아, 아니. 아무것도.”
심지어 말까지 살짝 더듬는다.
나는 오늘 내내 기행을 보이는 세 드릭에게서 관심을 끄고 다시 크뤼 거에게 집중했다.
“어라, 크뤼거 후작님.”
“네, 레이디?”
나는 잔뜩 미간을 좁히곤 크뤼거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잠시 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 을 열었다.
“요즘, 밤에 많이 피로하신가 봐 요?”
크뤼거의 눈이 커졌다.
“헉, 어떻게 아셨습니까?”
“잠이 많이 부족하시고요.”
“그건 또 어떻게……!”
크뤼거가 정곡을 찔린 듯 입을 쩍 벌렸다.
나는 그 순진한 반응에 속으로 짙 은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알았기는.’
크뤼거 후작은 원작에서 정보통으 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여기저기서 알짜 정보들을 물어와 남자 주인공 을 보조하는, 감초 같은 인물.
그런 역할을 수행하려면 잠도 못 잘 정도로 바쁜 게 당연했다.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후작님. 피로가 많이 쌓 이신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오지랖 을 부렸네요.”
“그러고 보니 저희도 마침 더위 때 문인지 피로하다는 이야길 하고 있 었어요. 아, 그렇지!”
때마침 롤머리 영애가 지원사격을 했다.
“후작님께서도 아리엘 영애의 향수 를 시향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맡 자마자 온몸의 피로가 녹을 만큼 포
근한 향기더라고요!”
나이스, 롤머리 레이디. 나는 잠시 롤머리 영애를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크뤼거가 눈을 반짝이며 흥미를 보 였다.
“오오, 정말입니까, 레이디? 저도 한 번 맡아볼 수 있겠습니까?”
“아, 그럼요. 물론이죠.”
여기까진 계획대로 순조로웠다.
나는 파우치를 열어 조그만 향수병
을 꺼냈다.
겉보기엔 아까 영애들에게 뿌려 주 었던 향수와 똑같지만, 사실은 다른 향수 였다.
‘오페리오가 들어갔다는 것만이 유 일한 차이점이긴 하지만.’
나는 영애들에게 했던 것처럼, 크 뤼거 가까이에 향수를 분사해 주었 다.
고요히 향을 음미하던 크뤼거가 갑 자기 눈을 번쩍 떴다.
“레이디, 이거 물건인데요!”
“마음에 드시나요?”
“예! 이런 게 바로 아로마 테라피 군요? 저 멀리 남쪽 섬에서 유행한 다는 말만 들었는데, 직접 겪어 보 니 정말 굉장합니다!”
“그쵸, 후작님? 향이 너무 좋죠!”
“저희도 한눈에 반했다니까요!”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라벤더가 가져다주는 진정 작용은 꽤 즉각적이었다. 라벤더를 메인으 로 잡은 게 주효했던 것 같았다.
“좋아해주시니 기쁘네요. 여기 계 신 분들껜 특별히 조금씩 나눠드리 고 싶은데, 받아 주시겠어요?”
“어머나! 물론이죠!”
“와아, 감사합니다, 영애!”
향수를 공짜로 나눠주겠다고 선언 하자, 주변 사람들이 신이 나선 눈 을 빛냈다.
나는 소문이 돌아 사람이 몰려들기 전에 얼른 조그만 향수병들을 몇 개 꺼내 주변 영애들과 크뤼거에게 나 눠주었다.
물론 크뤼거에게는 영애들과 달리
특별한 향수병을 건넸다.
“부디 유용하게 쓰셨으면 좋겠네 요.”
나는 크뤼거에게 향수병을 건네며 빙긋 웃었다. 크뤼거는 잘생긴 미소 를 내게 돌려주었다.
“레이디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당 연히 유용하게 써야죠.”
“후작님께선 피로가 쌓이신 것 같 으니, 몸에다 말고 방에다 방향제처 럼 뿌리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아끼
지 마시고요. 향수는 얼마든지 더 있으니까요.”
“헉, 제가 그런 호의를 받아도 될 까요?”
음. 너무 대놓고 잘해주면 의심을 사려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세드릭을 힐 끔 쳐다보곤 다시 크뤼거에게 웃어 보였다.
“당연하죠. 후작님께선 에반스 전 하의 친한 친우분이시잖아요?”
그러자 크뤼거가 나와 세드릭을 아 주 의미심장한 눈으로 번갈아 쳐다 보았다.
“아하, 그렇죠. 물론입니다, 레이 디. 제가 바로 세드릭의 제일가는 친구죠. 그러니 앞으로 자주 보게 되겠지요, 저희 둘?”
“하이넨…… 레이디는 바쁜 분이니 쓸데없는 소리로 귀찮게 굴지 마.”
세드릭이 내게로 가까이 다가온 크 뤼거를 저 멀리 밀어냈다.
밀려나며 크뤼거가 내게 외쳤다.
“선물 감사합니다, 레이디. 매일 밤 빼먹지 않고 사용하겠습니다!”
“부디 그래 주세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 철저히 지켜주셔야 한답 니다, 후작님.
살고 싶으시면요.
크뤼거가 저 말을 지키는 지 알아 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제대로 향수를 뿌리고 잠들었다면, 분명 그는 다음 날 나를 찾아올 테 니까.
두 가지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했 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자꾸만 와인이 쭉쭉 들어갔다.
“레이디,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 니까?”
세드릭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음료죠, 음료.”
나는 술이 센 편이었다. 게다가 이
와인은 도수가 그다지 높지도 않았 고.
나는 당도 없는 포도 주스를 마시 는 기분으로 와인을 홀짝이며 연회 장을 누볐다.
세드릭은 그런 내 뒤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졸졸 따라다녔다.
문제는 그게 귀여워 보인다는 거였 다.
‘혹시 내가 진짜 취했나?’
나는 빠르게 스스로의 정신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아직 멀쩡한 건 확
실했다.
‘귀여워할 게 따로 있지…… 정신 좀 차리자, 아리엘 윈스턴.’
밤이 무르익어가면서, 연회장 한편 에서는 게임 테이블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