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몇 초 뒤, 참지 못한 측근 하나가 델레이나에게 말을 걸었다.
“황녀님, 황녀님. 시향도 지금 해보 시는 건 어떠세요?”
측근은 저번 봄의 제전 때 델레이 나의 대리인으로 투표에 나섰던 영 애였다.
베르데타라는 이름이었지, 아마.
그때 황녀와 마찬가지로 나를 탐탁 잖은 눈빛으로 쳐다보았던 것 같은 데, 그래도 향수의 향이 궁금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황녀님? 제가 대신 뿌려드릴까요?”
베르데타가 재차 델레이나를 불렀다.
나는 계속해서 한결같은 미소를 지 으며 둘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델레이나가 어서 향을 시 향해주길 바랐다.
‘레엘리우스와 호감의 묘약을 넣진 못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 까.’
그런데 델레이나의 입에선 예상치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싫다.”
“네?”
베르데타가 눈을 끔뻑였다.
델레이나가 고집스레 말했다.
“안 뿌릴 것이다.”
“네에에?”
“시향해보지 않으실 거라고요?”
“그래.”
“어, 어째서인가요?”
측근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델레이나가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아껴 뿌릴 거야.”
‘어머나.’
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나는 속으로 풋 웃음 지었다.
흠, 흠. 살짝 헛기침을 한 나는 잊 고 있었다는 듯 크게 말했다.
“아, 참. 황녀님께는 언제든지 리필 해드릴게요.”
“정말이오?”
델레이나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황녀님의 생신을 기념하
여 드리는 선물인데, 얼마 안 가서
닳아 없어지면 안 되지요.”
방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델레 이나가 푹 고개를 숙였다.
“……영애는 사려 깊으시군.”
“네?”
“내가 사랑하는 여행지들을 모티프 로 한 향수라. 오래도록 잊지 못할 선물이 될 것 같소.”
델레이나가 고백하듯 속닥거렸다.
쑥스러운 건지, 작게 속삭이는 모 습이 왠지 귀여워서 나는 미소를 지 었다.
“잘 간직하겠소, 아리엘 영애. 고맙 소.”
델레이나가 그렇게 말하며 상자를 닫으려 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아우 성이 터져나왔다.
“황녀 전하……!”
“시향……! 시향은 안 해보시나 요‘?”
“아. 그렇지.”
델레이나가 잊고 있었다는 듯 다시 상자를 열었다.
향수병의 아름다움에 신경이 쏠려, 정작 그 안의 내용물이 ‘진짜 선물’ 이라는 것을 잊은 모양이었다.
델레이나가 어색한 자세로 향수병 을 잡았다.
“뿌, 뿌려 보겠소.”
평소에 향수를 잘 뿌리지 않는지 델레이나의 포즈는 몹시 엉거주춤했다.
하긴, 황녀쯤 되는 위치면 향수도 남이 뿌려주려나.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시향을 도와드릴까요, 황녀님?”
“아…… 그래 주면 고맙겠소.”
델레이나가 긴장한 얼굴로 내게 향 수병을 넘겼다.
나는 파우치 속에 들어 있는 시향 지를 꺼낼까 하다가, 그냥 허공에 대고 분사했다.
향기를 담은 촉촉한 수분 입자가 허공에 흩날렸다.
화려한 일랑일랑과 상쾌한 레몬과 자몽 향이 섞인 향기는, 들이마시는 순간 온몸이 청량해지는 기분이 들 었다.
마치 신기한 마법이라도 본 것처럼 사람들은 허공에서 눈을 떼지 못했 다.
“좋은 냄새
여기저기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흘 러 나왔다.
델레이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둥그렇게 눈을 홉떴다.
“ 아.”
멍하니 눈을 깜빡거린 델레이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향기군. 내 어 휘력이 모자란 것이 안타까울 정도 로……/,
정말 아쉽다는 듯 입술을 깨문 델 레이나가 내게서 다시 향수병을 받 아가더니, 꼭 품에 끌어안았다.
“황후 폐하께서 그대를 왜 좋게 보 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어리석었던 거였어.”
델레이나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올 려다보았다.
“그대는 뛰어난 예술가로군. 내 생 각에 그대의 이름이 머지않아 벨레 르 예술의 전당에 조각될 것 같아.”
아아아으
황녀가 진지한 얼굴로 엄청난 소리
를 하는 바람에 나는 흐린 얼굴을 하고 웃었다.
예술의 전당. 영광스러운 곳이지.
얼마나 영광스럽냐면, 제국이 건국 된 이래로 거기 오른 예술가가 단 열 명 밖에 안 되는 걸로 알고 있 다.
물론 난 내 실력을 맹신하는 편이 긴 하지만, 누군가 제국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한 예술가냐고 묻는다면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 다.
‘아무튼, 마음에 드신 것 같아서 다행이네.’
이로써 오늘의 첫 번째 과제를 성 공적으로 클리어한 것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져 안도의 한숨 을 내쉴 때였다.
“도대체 무슨 향기인데 그래?”
“나도 좀 맡아볼 수 없나? 백작님, 죄송한데 잠시만 비켜 주실래요?”
멀찍이 서 있던 사람들이 답답하다 는 듯 인파를 비집고 들어왔다.
주위에서 가벼운 소란이 일자, 델 레이나가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교양을 지키시오, 모두들.”
“황녀 전하! 한 번만 더 뿌려주시 면 안 되겠습니까?”
델레이나가 도도히 고개를 저었다.
“나를 위한 선물인데 왜 그대들을 위해 뿌린단 말이오? 싫소. 아껴 쓸 것이오.”
“황녀니임, 윈스턴 영애께서 계속 채워주신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싫소.”
나는 완강한 델레이나를 쳐다보며 몰래 웃음을 삼켰다.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뺏기기 싫 어하는 어린애 같다고 하면 안 되겠지.’
인파가 점점 몰려들어 델레이나의 주변이 복닥거렸다.
나와 세드릭은 델레이나에게 가볍 게 인사를 건네곤, 한산한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슬쩍 세드릭을 올려다보며 속 삭였다.
“선물해 주신 아르키오스의 수정, 감사히 썼어요.”
그러자 세드릭이 씩 웃었다.
“다음엔 아르키오스를 통째로 잡아 올까요?”
“하하. 몸집이 엄청난 녀석이던데, 밥은 어떻게 먹이라고요?”
“그야 기사들이 매일 닭이라도 잡 아 올 겁니다.”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농담도 심하시네요, 정말. 기사분 들을 좀 더 소중히 대해 주세요.”
세드릭은 나를 따라 웃지 않았다.
보통 내가 웃음을 터뜨리면 세드릭 도 함께 픽 웃고는 했는데. 지금 세 드릭의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 모습에 나 역시 서서히 웃음을 거뒀다. 갑자기 나타난 묘한 긴장감 이 피부를 간질거렸다.
세드릭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오늘은 돌아가지 마십시오, 레이디.”
“ 음?”
나는 동그래진 눈으로 세드릭을 올 려다보았다.
“뭐라고 하셨죠?”
“오늘은, 돌아가지 않으셨으면 좋 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밤새도록 여기 있자고요?”
물론 무도회에서 밤을 새우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새벽이 넘는 시간까지 남아 있다 보면 취한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고,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게임도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세드릭의 뉘앙스는, 카드 게임이나 하자는 것처럼 느껴 지진 않았다.
나는 어쩐지 긴장한 목소리로 되물 었다.
“어, 어째서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세드릭의 눈동자는
여전히 웃음기 없이 진지했다.
문득 잠깐 잊고 있던, 일랑일랑과 레엘리우스의 향기가 떠올랐다.
단 하루 맡았을 뿐인데, 그 향기는 이제 주박처럼 세드릭을 볼 때마다 내 심장을 옭아매었다.
‘……나도 참 단단히 망했다니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세드릭에게 되물었다.
“하실 말씀이라니요? 중요한 이야 기인가요?”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제게는.”
적어도
내 착각일까.
어쩐지 눈앞의 세드릭이 긴장한 것 처럼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이 대륙 을 통틀어 세드릭 에반스처럼 매사 에 여유만만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인간은 찾아보기 힘들 테니까.
“자정까지는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 대답했다.
세드릭의 향기를 의식한 순간부터 괜스레 눈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감사합니다.”
세드릭이 환하게 웃었다.
지나치게 부드럽고 환한 미소라, 나는 차마 오래 지켜보지 못하고 아 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는 와인을 들이켜 쿵쿵거리는 심
장을 억지로 잠재웠다.
‘아직 두 번째 과제가 남았는데, 세드릭 때문에 정신이 흐트러져 서……/
세드릭이 내게 할 이야기라는 게 뭘까?
자꾸 그게 궁금해서 사람들과 이야 기를 나누다가도 멍한 표정이 튀어 나왔다.
나는 내게 이런 번뇌를 안겨 준 장본인을 살짝 흘겨보았다.
‘그나저나 그 사람은 언제 오는 거지.’
오늘의 두 번째 과제의 주인공. 하 이넨 크뤼거 후작.
오늘 파티에 참석한 것은 틀림없었 다. 하지만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 다.
‘지각했나?’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도 고개를 빼 후작의 모습을 찾았 다.
“전하. 혹시 크뤼거 후작님께선 아 직 안 오셨나요?”
세드릭에게 넌지시 물어보기도 했 으나, 무심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 다.
“모르겠습니다. 어디선가 술이나 마시고 있지 않을까요.”
‘친구 사이 맞아?’
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나저나 크뤼거 후작은 왜 궁금 해하시는 겁니까?”
세드릭의 눈빛이 나를 찔렀다.
나는 못 들은 척 다시 이야기 나 누던 영애들을 돌아보았다.
“와인의 풍미가 정말 좋네요. 황녀 전하께서 좋은 와인을 내리셨나 봐 요.”
“호호, 정말 그러네요. 황녀 전하께 선 어리셨을 때부터 미식가이셨…… 어라?”
갈색 롤머리 영애가 이야기를 하다 말고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내 조금 뒤편, 세드릭이 있는 방향 이었다.
‘ 응?’
덩달아 세드릭을 돌아본 나는 조그 맣게 입을 벌렸다.
‘또 왜 저래?’
어느 틈엔지 또 가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세드릭이 그것을 다 시 반듯이 접고 있었다.
나는 기막힌 얼굴로 세드릭을 쳐다 보았다.
오늘 내가 본 것만 벌써 다섯 번 째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갈색 롤 머리 영애가 눈을 빛냈다.
“어머나. 거기 적힌 이니셜은, 아리 엘 영애의 것 아닌가요?”
“아, 보셨습니까.”
세드릭이 자연스레 대꾸했다. 어처 구니가 없었다.
그렇게 대놓고 이니셜 있는 부분을 위로 놓고 접고 있으니, 눈이 달린 사람이면 당연히 보지!
나는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세드릭 을 노려보았다.
‘취한 거 아냐?’
와인을 몇 잔이나 마셨다고 벌써 취할 린 없고.
“이렇게 예쁜 색의 손수건을 선물
하시다니. 아리엘 영애, 정말 로맨틱 하세요.”
“하하, 예에. 감사합니다.”
나는 영혼 없는 얼굴로 롤머리 영 애의 칭찬을 받아넘겼다.
아까부터 이어지는 세드릭의 기행 동을 이해하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저렇게 동네방네 보여줄 줄 알았 으면 내 가게 주소도 같이 적어놓을 걸 그랬네.’
겸사겸사 홍보도 되게 말이야.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때, 훌쩍 키가 큰 회색 머리 남성이 눈에 띄었다.
‘엇, 저 사람은.’
내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회색 머리에 졸린 듯한 푸른색 눈 동자.
틀림없었다. 하이넨 크뤼거였다.
‘두 번째 목표물, 드디어 포착.’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롤머 리 영애와 함께 청록색 예찬을 늘어 놓고 있는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전하, 그 부채 이제 주시겠어요?”
나는 세드릭이 대신 들어주고 있던 부채를 받아들곤, 착 소리가 나게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