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06화 (106/153)

〈107화〉

감사해요, 전하.”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세드릭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머물 러 있었다.

눈 맞춤이 너무 길어지자,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 다.

‘그, 그래도 일단은…… 기뻐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청록색이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말 녹색 계열을 좋아하는구나.’

기왕 하는 선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는 속으로 황후에게 가볍게 감사 인사를 했다.

드디어 내게서 시선을 뗀 세드릭이 손수건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니셜이, 있군요.”

“아, 네.”

선물용 손수건에 선물하는 사람의 이니셜을 새기는 건 일종의 전통이 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얼굴이 간지러워 머쓱했다.

이니셜이 있는 부분을 빤히 쳐다보 던 세드릭은, 곧 손수건을 반듯이 접었다. 그리고는 연미복의 왼쪽 가 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헉;

그런 그의 행동에 나는 숨을 집어 삼켰다.

남성이 가슴 주머니에 손수건을 꽂 고 다니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 만, 오늘같이 특별한 날에는 보통 의미 있는 손수건을 사용하기 마련 이었다.

‘가령, 연인이 선물한 손수건이라 거나……;

윽, 과대해석하지 말자.

청록색 손수건이 군청색 연미복과 잘 어울려서 그런 거겠지.

나는 세드릭 앞에서 고개를 붕붕

저으며 애써 열 오르는 뺨을 진정시

켰다.

# # 쏘

“아리엘 님-!”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안녕, 루나, 에일린, 릴리. 그리고

사샤.”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주자, 소녀들 이 방긋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뵙고 싶었어요!”

“나도 그래. 요즘 너무 바빠서 한 동안 티타임을 가지지 못했잖아.”

“정말요? 정말 아리엘 님도 저희가 보고 싶으셨나요?”

“으응, 그럼. 물론이지.”

“루나도 아리엘 님과의 티타임이 너무 그리웠…… 헉!”

루나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내 뒤에서 세드릭이 슬쩍 상체를 기울인 것이다.

“또 보는군. 루나 헤일린이라고 했 던가?”

“에, 에반스 공작 전하. 맞습니다! 루나 헤일린, 전하께 인사 올립니 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루나가 세드릭

에게 인사했다. 역시 아직 세드릭이 불편한 듯했다.

평소라면 편하게 이야기 나누라며 자리를 비켜 주었을 세드릭이, 어쩐 지 오늘따라 잠자코 서서 말을 이어 갔다.

“자네들은 늘 함께 다니는 것 같 군. 우애가 좋아 보여.”

“가, 감사합니다……!”

루나는 감사 인사를 하면서도 오늘 따라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세드 릭이 낯선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

다.

“흠.”

이윽고 평소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온 세드릭은 무언가 마음에 들 지 않는다는 듯 턱을 괬다.

그리고 얼마 후, 소녀들이 다시 내 게 말을 걸려고 할 때였다.

세드릭이 갑자기 가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펼치더니 다시 접었다.

?’

나는 의아한 눈으로 세드릭을 바라 보았다.

‘뭐 하세요?’

왜 뜬금없이 멀쩡한 손수건을 꺼내 서 다시 접어?

이상한 행동에 소녀들의 시선도 손 수건에 가 닿았다.

곧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에일린이 눈을 크게 떴다.

“엇, 혹시 저건 아리엘 님의 이니 3……9”

세드릭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 곤 힐긋 에일린을 쳐다보았다.

“아, 보였나?”

“아! 역시 아리엘 님의 이니셜이 맞군요! 아리엘 님, 전하께 손수건 을 선물하신 건가요?”

에일린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 었다.

나는 살짝 민망해져서 떨떠름히 대 답했다.

“으응, 그랬지. 조금 전에.”

“색깔이 너무 예뻐요, 아리엘 님. 어디서 많이 본 색 같기도 하고……/

옆에서 릴리도 거들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사샤가 입을 열었다.

“아리엘 님의 눈 색과 똑같이 예쁜 청록색이에요……『

“앗! 정말 그렇다!”

루나가 눈을 반짝거렸다.

“아리엘 님, 정말 탁월한 선물이에요!”

“아리엘 님은 어쩜 선물 센스까지 도 완벽하세요?”

소녀들이 칭찬 세례를 퍼붓자, 더 욱 민망해진 나는 잔을 들어 와인을 홀짝였다.

“음, 그렇지. 보는 눈이 있는 영애 들이로군.”

세드릭까지 거드는 바람에 하마터 면 와인을 뿜을 뻔했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선물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나는 당황한 눈으로 세드릭을 바라 보았다.

세드릭은 흡족한 표정으로 접은 손 수건을 도로 가슴 주머니에 넣고 있 었다.

“레이디께선 여러모로 센스가 뛰어 나시지.”

“정말 그렇네요, 전하. 제가 이런 선물을 받았으면 너무 감동해서 몇

날 며칠 꼭 안고 잤을 것 같아요.”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세드릭을 어려워 하던 루나가, 어느새 그와 자연스레 수다를 떨고 있었다.

“청록색은 정말 예쁜 색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람.

나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세드릭 에반스가 루나와 색깔에 대 해 만담을 나누고 있다니, 꿈을 꾸 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 였다.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전하, 이제 황녀님을 뵈러 가야 하지 않을까요?”

“음, 그러시죠.”

내 물음에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아직 델레이나를 만나지 못 한 참이었다.

황녀를 만나기 전, 가볍게 와인 한 잔하면서 긴장을 풀자고 내가 먼저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황녀 전하를 뵙지 못하셨군요. 어서 다녀오세요, 아리엘 님, 에반스 전하!”

루나가 아쉽다는 얼굴을 하고서도 우리를 보내주었다.

나는 소녀들에게 인사를 하곤 연회 장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델레이나는 단상이 있는 연회장의 한쪽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축하를 받고 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델레이나가 눈을 살 짝 크게 떴다.

“에반스 공작! ……그리고 아리엘 영애.”

나는 활짝 웃으며 델레이나에게 축 하 인사를 건넸다.

“생신 경하드립니다, 황녀님. 황녀 님의 탄생이 제국의 큰 기쁨이 되었 습니다.”

“흐, 흠. 고맙소.”

델레이나가 조금 어색한 목소리로 답했다.

“와 주어서 기쁘오. 아리엘 영애께 서도 오늘 하루 즐거우시길 바라오.”

“감사합니다, 황녀님.”

“생일 축하한다, 델레이나.”

세드릭도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 의 곁에 서 있던 수행원이 델레이나 에게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숙부님. 이건 무엇인 가요?”

델레이나가 살짝 신난 표정으로 선 물을 받아들었다. 세드릭이 무심히 대답했다.

“금이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세드릭을 돌아 보았다.

아무리 현금이 최고의 선물이라곤 하지만……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

야?

“잘 사용할게요, 숙부님.”

그러나 델레이나는 다소 성의 부족해 보이는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나는 말 없이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걸 선물이라고…… 하아.’

진짜 생일 선물이 어떤 건지 보여 줄 테니까 잘 보라고.

흠, 흠.

가볍게 목소리를 가다듬은 나는 입 을 열었다.

“저도 준비해 온 선물이 있답니다, 황녀님.”

옆에서 선물 상자를 들고 있던 에 른이 정중히 델레이나에게 그것을 건넸다.

“ 아.”

델레이나가 연하늘빛으로 반짝이는 포장지에 시선을 주었다.

“고맙소, 영애. 어떤 선물인지 물어 도 되겠소?”

“그럼요, 황녀님. 제 선물은 향수랍 니다.”

내 대답에 주변이 가볍게 술렁거렸 다.

델레이나 곁을 지키고 서 있던 또 래의 측근들이 속닥거렸다.

“황녀님, 황녀님. 지금 열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아리엘 영애의 향수 선물이라니,

솔직히 궁금한걸요.”

“……그래, 알았다.”

측근들의 등쌀에 떠밀려 델레이나 가 시종에게 선물 상자를 건넸다. 시종은 간단한 손짓 끝에 포장을 풀 어 냈다.

포장지 안에는 벨벳 상자가 있었 다. 성인 여성의 품에 쏙 들어갈 만 한 크기의 상자.

시종이 델레이나가 열기 좋도록 상 자를 내밀었다. 델레이나의 손이 상 자로 향했다.

잠시 뒤, 드디어 상자가 입을 벌렸

다.

“……아.”

“어머나.”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나는 세드릭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델레이나를 바라봤다.

마치 못 박힌 듯 델레이나의 시선 이 상자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곧 그녀가 천천히 손가락을 뻗어 상자 속 내용물을 어루만졌다.

“이건…… 정말 아름다운 조각품이 군.”

델레이나가 지금 어루만지고 있는 것은 첫 번째 향수병이었다.

사막의 나라, 탄자리를 모티프로 한 향수병.

뾰족하고 길쭉한 사막 나무들이 향 수의 내용물을 감싸듯 길게 몸을 드 티웠다.

그 사이로는 새파란 액체가 아름다 움을 과시하듯 반짝거렸다.

“오아시스. 탄자리의 오아시스네

요!”

측근 하나가 감탄한 목소리로 외쳤 다.

“황녀님, 일 년 전에 저희와 함께 들르셨던 곳이잖아요!”

“……그랬지.”

델레이나가 멍하니 향수병을 어루 만졌다.

델레이나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다른 각도에서 조명을 받은 크리스 털이 눈부신 빛을 발했다.

아르키오스 비늘 특유의 영롱한 빛 깔이 었다.

델레이나는 뒤이어 두 번째, 세 번 째 향수병도 감상했다.

세나스를 모티프로 한 향수병은 소 라껍데기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었는 데, 크리스털 장인의 정교한 솜씨에 여기저기서 감탄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이건 세나스에서만 주울 수 있는 소라껍 데 기 잖아요 ! ”

“기억나시죠, 황녀님? 저번 여름에 세나스에서 누가 가장 많이 소라를

줍는지 내기 했었잖아요?”

마지막은 유페리아 섬을 모티프로 한 향수병이었다.

마지막 향수병에는 작은 아기 천사 들이 향수병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조각되어 있었는데, 크리스털 장인 이 한층 더 공을 들였는지 천사들이 들고 있는 하프와 트럼펫 모양까지 도 정교했다.

당장이라도 연주가 들려올 것만 같 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델레이나의 시선이 아기 천사들의 발아래에서 찰랑거리는 분홍빛 액체 에 못 박혔다.

그녀의 옅은 갈색 눈에 예쁜 황금 빛깔이 일렁거렸다.

“너무 아름다워요.”

“향수병이라기보단 아름다운 조각 품 같아요.”

“게다가 크리스털은 또 어찌나 영 롱한지……-”

연신 이어지는 감탄에 주변에서 사 람들이 몰려들었다.

아르키오스의 수정은 멀리서도 특 유의 영롱한 빛깔로 사람들의 시선 을 홀렸다.

곧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엄청나군.”

“향수병이 저렇게 아름다운데, 그 안의 향기는 얼마나 특별할까?”

사람들이 어서 향을 맡아보라는 듯 은근히 델레이나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그러나 델레이나는 그런 주변의 시 선에도 멍하니 향수병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리스털 향수병 속 세계를 유영하 듯 누비는 찬란한 황금빛이 황녀의

헤이즐넛 색 눈동자 안에서 파도를 쳤다.

델레이나는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계속해서 멍하니 그 안을 구경 했다.

꼭 처음으로 만화경 속을 들여다보 았다가, 그대로 시선을 뺏겨 버린 소녀 같은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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