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05화 (105/153)

〈106화〉

그러나 오페리오는 잔악한 식물이 아니었다. 오페리오 자체에 사람을 죽일 만큼 치사량의 독이 들어 있지 는 않았다.

‘그걸 사용한 놈들이 나쁜 놈들인 거지.’

무슨 재료든 사용하기 나름이다.

날카로운 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내 사람을 지킬 수도 있듯이.

나는 미리 베껴 온 고서적의 페이 지들을 펼쳐 놓고 배합을 시작했다.

‘조향사에서 화학자로 2차 전직을 한 기분인데……/

어디 사는 어떤 공작님 때문에 내 가 이런 수고를 다 하네.

투덜대던 나는 곧 다시 작업에 몰 두했다.

오 호 포

“졸리다.”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마침내 델레이나의 생일날 아침이 밝았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온 것이다.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나는 직원들 에게 휴가를 주었고, 가게 문에도 휴일 명패를 내걸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밤늦게까지 조향실에서 중화제를 테스트하고 또 테스트한 탓이었다.

여러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날에 졸면 안 되는데.’

정신 차리자, 아리엘.

스스로의 뺨을 착착 치는데 리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피곤하세요, 아가씨? 〈자양강장 제〉를 드릴까요?”

“리나, 너는 그 향수를 너무 신뢰

한다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리나가 건 넨 향수의 향을 들이마셨다.

‘하아.’

시원한 시트러스 향기가 정신을 순 식간에 일깨웠다.

“좀 개운해졌다.”

“헤헤, 다행이에요! 드레스로 갈아 입으시기 전에, 일단 제가 진하게 커피 한 잔 끓여 드릴게요!”

“고마워, 리나.”

커피를 기다리며 나는 로잘린의 의 상실에서 보내온 상자를 열었다.

어제 로잘린은 새로운 연회용 드레 스와 함께 손수건이 든 상자를 함께 보내 주었었다.

앙증맞은 리본으로 장식된 뚜껑을 들어 올리자, 안에서 색색의 손수건 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잘린 양도 참…… 하나만 부탁 한다고 했는데.”

로잘린은 총 네 장의 손수건을 보 냈다.

손수건들은 부탁한 대로 모두 녹색 계열이었으나, 똑같은 색상은 아니 었다.

쨍한 원색 그대로의 녹색과, 깊은 숲처럼 어두운 녹색. 그리고 연두색 과 청록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색깔은 어쩐지 좀 익숙한걸.’

나는 청록색 손수건을 만지작거리 며 생각했다.

“어머, 그 손수건은 아가씨의 눈동 자 색과 똑같네요?”

커피를 가지고 오던 리나가 반갑다 는 듯 말했다.

“그런가?”

“네. 아가씨께서 지니고 다니시면 너무 어울릴 것 같아요!”

듣고 보니 정말 내 눈동자 색 같 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이 중에서 오늘 세드 릭에게 건넬 손수건을 한 장 골라야

했다.

‘녹색을 좋아하는 이유가 어릴 적 숲으로 땡땡이치길 좋아했기 때문이 라니까, 역시 이 어두운 녹색이 좋 겠지.’

빠르게 결정을 내린 나는 암녹색 손수건을 상자 밖으로 빼놓고, 리나 가 가져다준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가볍게 요기하실 케이크도 준비했 어요.”

“정말 고마워, 리나.”

나는 촉촉한 스펀지케이크를 행복 하게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아침엔 역시 당분이지.’

그나저나, 계획대로 일이 잘 끝나 야 할 텐데.

머릿속으로 다시금 오늘의 계획을 되새기고 있을 때였다.

딸그락!

실수로 건드린 커피잔이 식탁 위로 엎어졌다.

“어머나! 아가씨!”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리나와 에른이 동시에 내게 달려들 었다. 나는 얼른 그들을 안심시켰다.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 그런 데, 손수건이……/

나는 탄식하며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암녹색 손수건이 커피에 젖어 처참 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안 돼.”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끄응 신음했 다.

“기껏 준비한 선물인데……!”

“아, 아가씨. 진정하세요. 손수건은 세 장이나 더 있잖아요?”

아, 그렇지.

나는 심호흡을 했다. 로잘린의 친 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다시 한번 상자를 연 나는 잠시 고민했다.

‘연두색과 이 초록색은 세드릭이 지니고 다니기엔 너무 밝은 것 같 고……/

결국 나는 청록색 손수건을 집어들 었다.

‘……이것도 녹색은 녹색이니까.’

나는 슬픈 눈으로 더러워진 암녹색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저게 딱이었는데.

6아깝다, 아까워.’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커피를 도로 담을 순 없었다.

보 소 쏘

그로부터 몇 시간 뒤.

“77 0 으〉I ”

나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드디어 치장이 끝난 것이다.

“정말이지 아름다우세요.”

“미의 여신이 현신한 것 같다고나 할까요.”

치장을 돕기 위해 고용한 일일 사 용인들이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립 서비스를 퍼부었다.

리나 역시 그들 사이에서 손뼉을 쳤다.

“아가씨께서 연한 색 드레스 입으 신 건 오랜만에 보는데, 너무 상큼 하고 잘 어울리세요. 최고예요!”

나는 슬쩍 내 드레스 자락을 매만 졌다.

이번에 로잘린이 만들어준 드레스 는, 흰색에 가까울 정도로 밝은 연 분홍빛 드레스였다.

“역시 내가 입기엔 너무 아기자기 한 색깔 같은데.”

이런 색은 나보단 사샤처럼 작고

귀여운 소녀들에게 더 어울릴 것 같 았다.

내 중얼거림에 리나가 기막힌 표정 을 지었다.

“아리엘 아가씨니까 소화할 수 있 는 색상인데, 무슨 말씀이세요?”

“하하……,”

나는 흐린 얼굴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슬슬 내려가 볼까.”

일 층으로 내려간 나는 잊지 않고

청록색 손수건을 챙겼다.

창밖으로 아름다운 정오의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직 세드릭이 도착할 시간은 아니 었다. 하지만 나는 가볍게 정원이나 산책할 겸 미리 나가 있기로 했다.

문을 열고 가게를 나서자, 마침 우 체부를 심문 중이던 두 기사가 나를 돌아보았다.

“아리엘 님, 드레스가 무척 잘 어 울리십니다.”

기사들 중 그나마 제일 말수가 많

은 멜른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멜른의 손은 우체부 청년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나는 이마를 짚곤 멜른과 우체부에 게로 다가갔다.

“고마워요. 멜른 경, 그런데 그분의 멱살은 왜 잡고 계신 건가요?”

“ 아.”

멜른이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 켰다는 듯 얼른 우체부 청년의 멱살 을 놓았다. 청년이 켈록켈록 기침을 했다.

“별 것 아닙니다, 아리엘 님. 매일 아리엘 님의 우편을 관리하는 자이 니 얼굴을 익혀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통성명을 권했는데, 자꾸 더듬 거리기만 해서 말입니다.”

‘그건 당신들이 너무 무서워서가 아닐까요.’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 둘이 갑자기 둘러싸는데, 무섭지 않을 리가. 내가 저 청년이었어도 벌벌 떨었을 것 같 다.

“리키 씨라면 편지 배달을 하루도 쉬지 않는 성실한 분이세요. 그만 놓아주세요.”

“그렇습니까. 죄송하게 되었습니 다.”

멜른이 꾸벅 리키에게 사과했다.

리키는 멜른의 사과를 듣는 둥 마 는 둥 혼비백산 달아났다.

나는 가엾은 우체부 청년의 뒷모습 을 바라보며 폭 한숨을 내쉬었다.

이 기사님들은 다 좋은데, 의욕이 너무 투철한 게 문제였다.

‘대체 세드릭이 어떻게 교육을 했 길래……/

저번 세드릭이 훈련을 위해 다녀간 뒤로 기사들의 의욕은 더더욱 과해 진 듯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저 멀리서 마 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머지않아 에반스 가문의 마차가 내 앞에 도착했다.

나는 마차 문이 열리는 모습을 긴 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레이 디.”

세드릭이 마차에서 내려서며 나를 불렀다.

‘아. 이런.’

나는 다가오는 세드릭을 바라보며 몸을 굳혔다.

‘연회복 차림은 역시 반칙이야.’

군청색 연회복을 빈틈없이 차려입

은 그는 한숨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 다.

‘셔츠 한 장만 걸친 건 그것대로, 이렇게 차려입은 건 이것대로 잘나 보인다니 정말 반칙인데.’

그 지긋지긋하기 그지없는 향수의 효과가 없더라도, 제도의 레이디라 면 누구나 지금의 세드릭을 보는 순 간 반해버리고 말 것이다.

“좋은 오후입니다, 레이디. 어째서 나와 계십니까?”

다행히 내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듯, 세드릭이 걱정스레 물었다.

“잠깐 햇볕을 쬐고 있었어요. 오늘 도 데리러 와 주셔서 감사해요.”

“당연한 말씀을. 어서 타시죠.”

“아. 잠시만요.”

나는 잠깐 멈춰 서선, 파우치를 열 고 그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게, 음

기세 좋게 손수건을 꺼내기는 했는 데, 막상 말을 꺼내려니 긴장이 되 어 자꾸만 입술을 달싹였다.

아까의 가엾은 우체부 청년 리키처럼.

세드릭이 둥그렇게 뜬 눈으로 나와 손수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곤 말했다.

“흐, 흠. 약소하지만, 여러 번 에스 코트해주신 것에 대한 답례예요.”

55

“모쪼록 잘 사용하셨으면 좋겠

59

“……아, 아니면 그냥 서랍 아무 데나 넣어 두셔도 되고요.”

나는 내가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것 을 깨닫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세드릭은 내가 건넨 손수건을 뚫어 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색이 마음에 안 드나.’

세드릭이 좋아한다는 녹색은 정말

순수한 원색의 초록색이었던 게 아 닐까?

지금이라도 가게로 돌아가서 초록 색 손수건으로 바꿔 와야 하나?

그런 고민이 격렬해질 무렵, 세드 릭이 드디어 손을 뻗었다.

세드릭이 손바닥 위로 손수건을 올 렸다.

그는 마치 미술품이라도 마주한 듯 손수건을 뚫어져라 감상했다.

“예쁜, 색이군요.”

마침내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

휴, 다행이다.

나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색이 마음에 안 든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직접…… 고르신 겁니까?”

세드릭이 물었다.

그 목소리 끝이 어쩐지 떨리고 있 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멀뚱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골랐던 게 커피 세례를 당하긴

했지만. 이것도 내가 고른 거긴 하 지.’

“네. 제가 고른 거예요.”

그런데, 왜 하필 녹색이냐고 물으 면 어떻게 하지?

황후가 힌트를 줬다고 사실대로 말 해야 하나?

그건 어쩐지 좀, 부끄러운데……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손수건을 소중히 손바닥 위에 올려 놓은 세드릭이, 고개 들어 나를 가 만히 마주보았다.

“예쁜 색입니다. 정말로.”

나는 멍하니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시 선이 너무 강렬해서, 나는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