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04화 (104/153)

〈105 화〉

“확실히 오페리오엔 그런 효능이 있지. 나야 관상용으로 기르는 거지 만.”

황후가 턱을 쓰다듬었다.

“영애는 마음씨가 좋군. 하녀 아이 하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힘을 쓰다 니. 황후를 알현하는 일까지 무릅쓸 정도로 말이오.”

혹시, 주제넘다고 생각한 걸까?

나는 긴장을 숨기고 황후를 올려다 보았다.

황후의 얼굴엔 늘 잔잔한 미소가 어려있어 표정을 파악하기 힘들었 다.

침묵 속에서 몇 초가 지나간 뒤.

그녀의 입꼬리가 큰 호선을 그었 다.

“좋소, 영애. 오페리오는 의사나 식 물학자들에게도 종종 채취해 가기를 허락하고 있으니, 영애에게도 내주

지 못할 것은 없지.”

휴.

온몸에 긴장이 눈 녹듯 사라졌다.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가득 걸쳤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크나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리나라고 했던가? 하녀 아이의 건 강이 하루빨리 쾌차하길 바라지.”

“감사합니다, 폐하!”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훔쳤다.

리나를 팔아먹었던 게 잘못된 선택 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오페리오가 필요한 진짜 이유 를 밝혔다면, 나는 이렇게 거짓말하 고 마음 졸일 일도 없이 금세 허락 을 얻어냈을 거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이건 세드릭조차 꿈에도 모를, 원 작을 읽은 나만이 알고 있는 고급 정보였으니까.

“오페리오는 시종을 통해 전달해주 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하면서 나는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소문이 자자한 황후의 정원을 구경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그건 기약 없는 내일로 미뤄야 할 듯했다.

“영애의 용건은 끝이 난 것이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물어도 되겠 소?”

“물론입니다, 폐하.”

황후가 내게 물을 것이 있다고?

풀어졌던 긴장이 다시 몸을 감쌌 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녀를 팔아 거짓말하면 내가 속 을 줄 알았소? …같은 질문은 아니 겠지.’

가슴이 콩닥거렸다.

이래서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이 라 해도 하는 게 아니라는 거구나, 하고 생각하던 때였다.

“곧 있을 델레이나의 생일 연회에

는 에반스 공작과 함께 참석하시 오?”

나는 순간 예법도 잊고 눈을 깜빡 거렸다.

‘어떻게 아셨지?’

어젯밤, 기사들의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 세드릭은 내게 지나가 듯 제안을 건넸다.

델레이나의 생일 기념 무도회에 자 신이 에스코트하러 오겠다는 제안이 었다.

나는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욘 없다 고 답하려 했다. 정말 그럴 생각이 었다.

하지만, 그 망할 놈의 향기가.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 지독히도 매 혹적인 그 향기가.

쉽사리 거절의 말을 뱉지 못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왜 아직도 잔향이 사라지 지 않는 거냔 말이야.’

잔뜩 투덜대면서도 나는 결국 고개 를 끄덕였었다.

물론 세드릭은 내게 별 의미를 담 고 건넨 제안은 아니었을 거다.

그런데도 거절해서 그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정말 거절한다 해도 세드릭은 실망 하긴커녕, ‘그렇습니까? 알겠습니 다.’ 하고 다른 영애를 에스코트할 게 뻔한데도.

아무튼, 내 파트너는 그렇게 세드 릭으로 정해졌다.

바로 어젯밤 있었던 일을 들킨 나 는 더듬대며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폐하. 에반스 전

하와 함께 참석합니다.”

“그렇군, 그래.”

황후가 흡족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영애에게 귀띔을 하나 해주어야겠군. 에반스 공작은 짙은 녹색을 좋아한다오.”

예?

나는 또 눈을 끔뻑였다.

이게 무슨 이야기지?

“그 아이가 어렸을 때, 수련하다가 지치면 숲으로 한동안 사라지곤 했 다오. 그 영향일지도 모르겠군.”

세드릭도 어렸을 땐 땡땡이를 쳤구 나.

새롭게 알아낸 사실이 재밌긴 했지 만, 황후가 이 이야기를 해주는 이 유는 모르겠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황후가 빙긋이 웃었다.

“좋아하는 색의 손수건을 받으면 더 기뻐할지도 모르지.”

아.

나는 짧게 탄식했다. 그제야 이 이 야기의 맥락이 이해되었다.

사교계에는 다양한 예법이 있다.

그중 하나가 에스코트하러 온 신사 에게 레이디가 답례로 손수건을 건 네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많이 사장된 예법이 긴 했다. 그래도 황족, 혹은 전통을 중시하는 가문의 자제들은 여전히 손수건을 주고받는다고 알고 있었 다.

‘세드릭에게 손수건을 준다,

라……/

그러고 보니 세드릭은 벌써 여러 번 나를 에스코트하러 와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답례를 건넨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황후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좋은 조언을 얻 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나로서도 기쁘 군.”

황후가 후후 웃었다.

우아하게 웃는데도 황후의 얼굴에 서린 그늘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게 신경 쓰였으나, 여기서 묻는 것은 주제넘은 일처럼 느껴졌다.

“델레이나의 생일 연회에서 다시 보겠군, 영애.”

“예, 폐하.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 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후후, 고맙소.”

결국 나는 그늘의 까닭을 묻지 않 은 채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손수건이라.’

나는 마차 문을 열어주는 에른에게 말했다.

“에른 경, 가게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들를 곳이 있어요.”

나는 며칠 전 받은 카드에 적혀 있던 주소를 떠올렸다.

내 전속 디자이너, 로잘린 양이 새 로 얻었다는 의상실의 주소였다.

‘마첼란 지구라. 좋은 곳이지.’

마첼란 지구는 유동인구가 많지만, 황궁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인지 땅값은 그렇게까지 비싸지 않은 곳 이었다.

한마디로 초보 상인이 첫발을 내딛 기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도착한 로잘린의 의상실은, 크기는 소담했지만 젊은 귀족 영애들의 취 향에 맞게 반짝반짝 화려했다.

‘의상실 없는 신인 디자이너였던

시절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나는 로잘린의 출세에 흐뭇한 미소 를 걸쳤다.

의상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로잘 린이 환호성을 질렀다.

“어머나! 아리엘 님!”

깜짝이 야.

나는 웃으며 로잘린과 인사를 나눴 다.

“반가워요, 로잘린 양. 이건 개업 선물이에요.”

오면서 사 온 개업 선물을 건네자 로잘린이 두 뺨을 감쌌다.

“어머나, 이런 걸 다 사오셨어요!

빈손으로 오셔도 되는데!”

그러면서도 로잘린은 선물로 받은 와인과 고급 치즈를 소중히 끌어안 았다.

다행히 선물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 다.

“그간 잘 지냈어요?”

“그럼요, 그럼요. 아리엘 님의 드레 스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진 건지, 찾아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열심히 일하며 지내고 있어요.”

“잘됐네요.”

“그래도 아리엘 님을 위한 작업이 언제나 최우선이랍니다. 이번 연회 때 입으실 드레스도 거의 다 완성되 었어요. 지금 바로 입어보실 수도 있으세요, 아리엘 님.”

로잘린은 내게 새 드레스를 입혀보

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허허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오늘은 옷과 장신구를 입어보며 씨 름할 시간은 없었다.

“어련히 아름답겠죠, 로잘린 양의 작품인데. 그나저나 오늘 온 건 개 업을 축하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사 고 싶은 게 있어서예요.”

“어머나! 무엇인가요? 모자? 장갑? 아리엘 님껜 무상으로도 드릴 수 있 어요!”

“아뇨, 대금은 당연히 치러야죠. 로 잘린 양껜 이미 공짜로 받은 게 너 무 많은걸요. 필요한 건 손수건이에

요. 진녹색 손수건 한 장.”

로잘린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아리엘 님! 제가 설마 아리엘 님 게 손수건 값을 받겠어요?”

로잘린이 도리도리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예쁘게 디자인해서 보내 드릴게 요. 각인 문구는 어떻게 해 드릴까 요‘?”

로잘린이 생긋 웃으며 물었다.

“음, 각인 문구는……/

나는 뺨을 긁적였다.

이 제국의 사교계에는 손수건을 선 물할 때, 선물하는 사람의 이니셜을 새기는 전통이 있었다.

제도의 모든 영애와 영식들이 그렇 게 했다.

그러니까 나도 그저 전통을 지키는 것일 뿐이다.

“제 이니셜을 적어 주세요.”

“네, 물론이죠. 그 외에 원하시는 문구는 없으시고요?”

“괘, 괜찮아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손수건이 편지지도 아니고, 덕지덕 지 문구를 붙일 생각은 없었다.

‘세드릭이 내 이름 적힌 손수건을 들고 다닌단 생각만 해도 충분히 민 망한걸.’

로잘린은 연회 전날까지 내 가게로 손수건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로잘 린의 의상실을 나섰다.

가게로 돌아온 나는 또 조향실에 틀어박혔다.

직원을 고용하고 얻은 최고의 이점 은 바로 이거였다.

가게를 오픈해야 하는 날에도 필요 하면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것.

오늘 만들어야 할 향수는 두 가지 였다.

6하나는, 델레이나에게 선물할 세 번째 향수를 다시 만드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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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만들었던 유페리아 컨셉 향수 는 세드릭이 뒤집어썼다.

다시 그 레시피대로 만들 수도 없 었다.

레 시피가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 운 효과를 담고 있는지 이젠 알게 되었 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갖고 주무 르는, 그런 향수를 델레이나에게 선 물할 순 없었다.

나는 결국 피눈물을 머금고 레시피 에서 레엘리우스와 호감의 묘약을 삭제한 뒤, 과일향으로 대체했다.

‘솔직히 매력적인 것 자체로만 따 지면, 저번 향수가 뛰어나긴 한 데……/

하아.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 지.

타협하는 기분은 끔찍하도록 서글

펐지만, 하는 수 없었다.

나는 대신 향수병에 힘을 주기로 했다.

‘내일 오전 안으로 크리스털 장인 에게 의뢰할 것.’

그렇게 메모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첫 번째 과제는 클리어했 고.’

세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기지

개를 켰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황후궁에서 아가씨께 물 건을 보내셨어요!”

리나의 목소리에 나는 얼른 조향실 밖으로 나갔다.

리나가 건넨 상자 안에는 가냘픈 꽃 열 송이가 들어 있었다.

순백색을 띤 꽃은 뿌리가 무척 길 었다. 실보다 가느다란 뿌리는 당장 이라도 끊어질 듯 연약해 보였다.

‘이게 그 귀한 약재라는 오페리오.’

클레어에게 의뢰받아 사랑에 빠지 는 향을 연구할 때, 나는 도서관에 서 수많은 고서적을 뒤졌었다.

‘그때 흥미로운 레시피를 꽤 많이 발견했었지.’

마법이 가능한 세계인만큼, 이 세 계에서 향기는 아름다운 후각의 예 술 이외의 기능도 수행할 수 있었 다.

호감을 증폭시켜주는 효과는 물론,

신성력을 담아 사람을 치유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

이른바 독향.

정보 길드 칸의 길드장처럼 잔인한 놈들이나 쓸 법한 사악한 술수였다.

‘그놈들이 사용할 독향에도 이 오 페리오가 들어가지.’

나는 원작을 읽었던 기억을 더듬었 다.

하도 같은 부분을 더듬었더니, 이 제 그 구절은 눈을 감아도 선명히

떠올랐다.

[정보 길드 칸이 화려한 복귀 무대 로 삼은 ‘크뤼거 후작가 몰살 사건’ 이후로, 황후의 정원을 포함한 온 제국에서 오페리오는 잔악한 식물로 간주되어 뿌리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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