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호 후보
휴일을 가진 뒤의 가게는 평소보다 활력이 넘쳤다.
열심히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는데, 직원 소렐이 말을 걸었다.
“사장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나는 소렐이 건넨 편지를 받았다.
다른 사람이 보낸 것이라면 휴식 시간에 확인했겠지만, 놀랍게도 발 신인은 세드릭 에반스였다.
‘어제 헤어진 사람한테서 편지가 오다니.’
중요한 일인 것이 틀림없었다. 나 는 얼른 편지 봉투를 뜯었다.
안에 적힌 말은 간단했다.
‘내게 붙인 호위 기사들의 훈련을 돕고 싶으니, 밤에 잠시 들러도 되
겠냐고?’
잠깐이면 될 거라는 말도 함께였 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세드릭 에반스가 휘하 기사들의 훈 련을 손수 도울 정도로 자상하고 한 가한 주인이었던가?
의아했으나 내게 해가 될 일은 없 었다. 나는 흔쾌히 밤에 뵙자는 답 신을 써 보냈다.
한바탕 향수를 팔고 나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나는 직원 로샤가 건넨 오늘치 장
부를 들여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걸 쳤다.
‘오늘도 괜찮았군.’
아직도 봄의 제전이 남긴 여파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영원히 가진 않을 거다. 다음 마케팅은 무슨 컨셉으로 갈까, 가볍게 고민하던 때였다.
“사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소렐이 전했다.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세드릭이 오겠다고 예고했던 시간이 되어 있 었다.
“내가 마중 나갈게요.”
문을 열기 전, 나는 가볍게 심호흡 을 했다.
‘설마 그 지긋지긋한 향수의 잔향 이 아직까지 남아 있진 않겠지.’
오늘은 괜찮을 거다.
세드릭도 그동안 최소 한 번은 더 씻었을 테니까.
그러고도 여태 잔향이 남아 있다면 그게 더 놀라운 이야기였다.
심호흡을 마친 나는 문고리를 돌렸 다.
“안녕하세요, 전하!”
긴장한 걸 들키지 않게 목소리도 밝게 꾸몄다.
“하루 만에 또 뵙네요. 좋은 저녁 입니다!”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레이디.”
세드릭이 싱긋 웃었다.
눈이 마주친 나는 순간 헉, 숨을 들이 쉬었다.
“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세 요!”
쾅!
나는 세드릭의 면전에서 문을 닫았 다.
몹시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 직원 소렐 과 로샤를 바라보았다.
“오늘 많이 고생하셨죠? 이만 퇴근 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사장님. 아직 뒷정리가 끝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마저 할게요! 오늘은 다들 이만 들어가 보세요!”
나는 반강제로 소렐과 로샤를 떠밀 었다.
‘망할 놈의 향기가 아직도 남아 있 어!’
세드릭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착각할 틈도 없었다. 돌이라도 던 진 듯 가슴이 쿵 내려앉았으니까.
어제 뿌린 향수의 잔향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니.
이건 기네스북에 올려야 할 수준이 었다.
‘이 세계엔 기네스북이 없는 게 아 쉽네. 내가 한자리 꿰찰 수 있었는
데!’
나는 자조하듯 한탄했다.
‘자. 일단 침착해. 침착하자.’
또 한 번 심호흡을 한 나는 다시 문을 열었다.
세드릭이 당황한 표정으로 거기 서 있었다.
“레이디. 아무 일 없으신 겁니까?”
걱정스럽다는 듯 그의 눈썹 끝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인다니, 이건 중증이 었다.
‘돌았군. 아리엘 윈스턴.’
나는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활짝 웃었다.
“그럼요. 잠깐 직원들을 퇴근시켰 을 뿐이에요. 어서 들어오세요, 전 하.”
나는 그렇게 말하며 세드릭이 들어 오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늘은 볼일만 수행하 고 금방 돌아가야 해서요. 기사들 훈련을 돕고, 울타리 보수만 지시한 뒤 돌아가겠습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세드릭이 말했다.
그 말에 어쩐지, 아쉽다는 감정이 찰나 심장을 스쳐지나갔다.
‘말도 안 돼.’
이게 왜 아쉬워할 일이지?
세드릭은 바쁜 사람이다. 빠르게 볼일만 보고 퇴장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스스로의 쓸데없는 감정을 질 책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기사분들은 아까부터 전하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기사들에게로 안내할 필요도 없었 다.
그들은 이미 세드릭의 뒤에 완벽히 각 잡힌 채로 도열하고 있었으니까.
기사들의 선두에 선 세드릭이 내게 빙긋 웃어 보였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레이디께 선 할 일을 하고 계시지요. 구경하 시기엔 지루한 과정일 겁니다.”
“아, 그럴까요. 그럼.”
내가 기사들이 훈련하는 곁에 있어 봤자 도움 될 게 없긴 했다.
납득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 드릭이 다시 웃어 보이곤 기사들에 게로 등을 돌렸다.
문을 닫자, 문 너머로 세드릭이 기
사들에게 무어라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에 살며시 몸을 기대 보았 다.
세드릭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문 너머로 전해져왔다.
‘잘생긴 사람들은 꼭 성대까지 잘 났단 말야.’
나는 가볍게 투덜댔다.
계속 이 목소리를 듣고 싶은 기분 이 드는 것에 별 이유는 없을 거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좋
아한다.
아름다운 미술품이 있으면 계속 감 상하고 싶듯이,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리면 계속 듣고 싶어 하는 건 당 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내가 정말 필요 없나 보네.’
문 너머론 세드릭이 지시하는 목소 리와, 기사들이 힘차게 대답하는 소 리가 들렸다.
다들 아주 바빠 보였다. 내가 끼어 들 여지는 없는 듯했다.
뭐.
별로 아쉽지 않다.
직원들을 일찍 퇴근시킨 바람에 리 나와 둘이 뒷정리할 일이 산더미니 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문에서 떨어 져 뒷정리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모두 목
숨처럼 새겨듣도록.”
세드릭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울렸 다.
기사들이 각 잡힌 목소리로 외쳤 다.
“예, 전하!”
“모두 알고 있겠지만, 어제 레이디 께서 큰 변고를 당하실 뻔했다.”
기사들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어제 동행했던 휴고는 얼굴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의 주인도, 주인께서 지키라고 명령 했던 분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이 어제부터 그를 짓눌렀다.
“죄송합니다, 전하. 저희가 철저히 먼저 근방을 수색했어야 했습니다.”
“됐다. 움직일 때마다 모조리 앞길 을 닦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휴고의 사죄를 짧게 자른 세드릭 이, 기사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말 했다.
“하지만 미리 대비해놓을 수 있는 곳은 완벽히 안전하게 만들어야겠 지. 레이디 아리엘의 가게처럼.”
기사들이 동의하는 듯 진지한 눈빛 을 했다.
세드릭이 고갯짓하자, 어둠 속에서 일곱 명의 인영이 걸어 나왔다.
모두 마탑의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 이었다.
“시작하도록.”
일곱 명의 마법사들이 곧장 울타리 로 다가갔다.
마법사들이 주문을 왼 순간.
아리엘의 가게를 감싸고 있던 거대 한 반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빛의 아름다운 반구가 찰나간 어두운 밤거리를 비췄다.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마탑 소속 마법사들의 마력이 가득 주입 된 결계였다.
마법사들이 결계 마법을 보수하는 동안 세드릭은 기사들을 돌아보았 다.
“사각지대는 파악해 놓았나?”
“예, 전하. 지붕 중앙, 울타리의 동 서쪽 모서리, 그리고 입구가 결계의
사각지대인데
부대장 에라스가 보고를 시작했다.
기사들과 마법사들, 그리고 세드릭 이 모두 ‘아리엘 윈스턴 경호 프로 젝트’로 분주했다.
모두 아리엘이 리나가 타준 핫 코 코아를 홀짝이는 동안 일어난 일이 었다.
세드릭은 약속을 지켰다.
황후와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부
탁한 지 고작 이틀 만에, 나는 황후 궁에 출입할 수 있었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차분 한 색감의 남보랏빛 드레스.
‘이 정도면 그럭저럭 성숙해 보이 지?’
황후에게 최대한 믿음직스러운 인 상을 주어야 했다.
머릿속으로 황후에게 전할 대사를 정리하고 있는데, 시종장이 나를 불 렀다.
“윈스턴 영애. 황후 폐하께서 도착 하셨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나는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알현실 로 입장했다.
조금 떨리긴 했다.
무도회장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과, 정식으로 알현을 요청해 만나는 것 은 천지 차이였다.
알현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제일 끝에서 왕좌에 앉은 황후가 나를 기 다리고 있었다.
먼 거리에서도 황후에게서 배어 나 오는 기품과 위엄이 똑똑히 느껴졌 다.
나는 긴장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황 후 앞까지 걸어갔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아리엘 영애.”
정중히 인사한 나는 고개 들어 황 후를 바라보았다.
황후가 빙그레 미소를 띤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나와 다름없이 기품 어린 미소
였지만, 어쩐지 그 미소에 그늘이 져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게는 무슨 용건이오? 어 서 말해 보시오.”
다행히도 황후는 바로 본론에 들어 갔다.
“곧 있을 우리 델레이나의 생일 연 회 때도 만나게 되었을 텐데, 기다 리지 못할 만큼 급한 용건인 모양이 지.”
“급히 알현을 청해 송구스럽습니
다, 폐하. 꼭 드리고 싶은 청이 있 어 실례를 무릅썼습니다.”
나는 황후를 바라보며 준비해온 대 사를 읊었다.
“폐하께서 즐겨 가꾸신다는 꽃, 오 페리오의 뿌리를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페리오의 뿌리?”
황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아픈 곳이 있소, 영애?”
오페리오의 뿌리는 약재, 특히 수 면제의 재료로 유명했다.
그러나 오페리오가 유명한 것은 대 륙의 서쪽 끝에 한해서였다.
이곳 제국에서 오페리오는 잘 자라 지도 않았고, 수요가 없어 상인들이 들여오지도 않았다. 비슷한 수면 유 도 효능을 내는 약초가 이곳에도 여 럿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효능은 오페리 오만이 낼 수 있었다.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얼굴 위에 걸쳤다.
“실은, 폐하. 제 하녀 리나가 요즈 음 극심한 불면증을 앓고 있답니 다.”
미안, 리나.
나는 오늘 아침에도 푹 자서 땡땡 부은 얼굴로 출근한 리나에게 속으 로 사과했다.
“저런. 불면증이라니. 몹시 괴로울 텐데.”
황후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좋아.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은 나는 겉으론 더욱 슬픈 표정을 걸쳤다.
“리나는 가게를 열겠다고 아버님의 만류도 무시하고 집을 나온 저를 유 일하게 따라 나온 하녀랍니다. 늘 저를 위해 고생해주는 아이인데, 매 일 밤잠도 못 자고 힘들어하는 모습 을 보니 마음이 몹시 아파서……,”
나는 살짝 눈가를 훔치고 다시 말 했다.
“어떻게든 불면증을 낫게 해주겠다 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시중의 약 은 리나의 체질 때문인지, 거의 효 과가 없더군요. 리나를 위해 의학 서적을 뒤진 결과, 오페리오의 뿌리 에 강력한 수면 효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페리오엔 실제로 긴장한 심신을 진정시켜주는 효능이 있었다.
다만 내가 오페리오를 원하는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 꽃은 세드릭을 지키는 열쇠가 될 것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사람 형상 하나를 떠올렸다.
몹시 우락부락하고 험악한 인상을 가진 인간. 내 상상 속 칸의 길드장 모습은 그런 생김새였다.
‘네 뜻대론 안 될 거야.’
간교한 꾀로 남의 계획을 망치는 건 악역만의 주특기가 아니었다.
선량하고 올바른 엑스트라, 나 아 리엘 윈스턴도 얼마든지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