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102화 (102/153)

〈103화〉

“ 네?”

세드릭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름으로요? 항상 레이디란 호칭 을 썼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여태까지는 분명 그러긴 했다.

‘뭐지. 잘못 들었나?’

아직 의식을 잃었던 후유증이 남아 있는지, 정신이 완전히 또렷하지는 않았다.

‘으음. 중요하지 않은 문제는 일단 넘어가자.’

나는 아까부터 가장 궁금했던 걸 묻기로 했다.

“전하께선 제가 쓰러진 뒤로, 괜찮 으셨어요?”

그러자 세드릭이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전 괜찮습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레이디의 건강만 생각하 세요.”

그렇게 말하는 세드릭의 눈빛은 염 려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음, 시계를 보니까 그리 오래 누 워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드릭 에반 스에게 이렇게까지 걱정받으려니 조금 민망하긴 했다.

아무튼 세드릭은 내가 건강한지 외 에 더 궁금한 것은 없는 듯했다.

‘다행이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잠깐 냄새를 맡은 걸로 마 계향이란 걸 알아챘는지 캐묻는 것 은 아닐까 긴장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마계향을 뿌린 놈들은

혹시 잡았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나는 살며시 세드릭의 눈치를 봤 다. 거기까지 물어봐도 되는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내가 이상하리만치 많은 정보를 알 고 있다고 세드릭이 의심하게 되는 건 아닐까.

다행히 내 궁금증을 읽은 듯 세 드릭이 먼저 말했다.

“그자들은.”

세드릭이 씹어뱉듯 말했다.

“레이디를 해치려 했던 자들은, 추 적대가 쫓고 있습니다.”

칸이 이렇게까지 대놓고 움직였다 는 건 나 역시 슬슬 손을 써야 한 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세드릭을 가만히 올려다보았 다.

“ 전하.”

“ 예.”

세드릭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볍게 한 번 숨을 고르곤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황후 폐하를 알현할 수 있게 해주 세요.”

갑작스러운 요청에 세드릭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담담히 그런 그를 마주 보았 다.

소설 속으로 빙의했다는 걸 알게

된 뒤, 내겐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

했다.

첫째. 멀리 도망가 원작의 흐름에 서 아예 벗어난다.

둘째. 어떻게든 원작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피해 보려 노력한다.

‘막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땐, 분 명 첫 번째 선택지가 정답이라고 생 각했었지.’

제일 먼저 세드릭에게 이별을 선고 했고, 원작과 달리 그에게 집착하지 도 않았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나는 아직

도 이렇게 그의 앞에 서 있다.

이 몇 달간 쌓은 유대는 이미 내 게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칸이 원작보다 빠르게 움직이기 시 작했다는 건, 세드릭은 물론 어쩌면 나까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이야 기였다.

하지만……오

‘세드릭을 버리고 혼자 도망치기 엔, 이미 늦었는걸.’

나는 괜스레 세드릭을 노려보았다.

‘괜히 친해졌어.’

아무튼, 이렇게 일이 되어버린 이 상 어쩔 수 없다.

내가 갖고 있는 원작의 지식으로, 회피할 수 있는 비극은 최대한 피해 보는 수밖에.

그러기 위해선 일단 황후를 알현해 야 했다.

“황후 폐하를, 말입니까?”

세드릭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황후 폐하께 드리고 싶 은 청이 있어요. 아마 무리한 청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만날 수만 있다면, 아마 황후는 내 청을 흔쾌히 들어줄 확률이 컸다.

‘만날 수만 있다면, 말이지.’

황족은 결코 만나기 쉬운 존재가

아니 었다.

허구한 날 내 가게를 닳도록 드나 들었던 아제키안은 예외적인 존재였 다.

‘그러고 보니, 그 인간은 요새 소 식이 뚝 끊겼네.’

성가신 인간이 사라졌다는 건 분명 즐거울 일인데, 어쩐지 어딘가 기분 이 조금 찜찜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곤 일단 하던 생 각에 집중했다.

황족은 만나기 까다로운 존재들이

다. 하물며 그 정점에 서 있는 황후 는 더했다.

‘나같이 아직 작위도 안 받은 애송 이 영애가 알현을 신청했다간……/

최소 두 달은 걸릴 거다.

내겐 그만큼이나 허송세월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다르겠지.’

황후의 동생인 세드릭에겐 황후를 알현하는 일이 나처럼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안 되나요?”

나는 다시금 물으며 세드릭을 빤 히 올려다보았다.

‘인맥 중의 인맥은 혈연이라던데, 이번 기회에 덕 좀 보죠. 다 당신을 위한 거예요.’

그런 의미를 담은 눈빛을 보내며.

곧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리가요. 당장 자리를 주선 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폐하를 알 현하려는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 까‘?”

“그럼요.”

나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분의 정원에서만 자라는 꽃이 필요해요.”

황후는 황궁의 모든 정원을 주관한 다.

그중 그녀가 가장 공들여 관리하는 것은 황후궁에 위치한 공중 정원이 었다.

‘온갖 귀하디귀한 꽃과 허브가 즐 비하다는, 그 정원 말이지.’

그 귀한 식물들 중에는, 내가 원 하는 꽃도 존재했다.

“꽃? 아. 하긴. 황후궁의 정원이 희귀 식물의 보고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곧 자리를 마련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레이

디.”

“네. 감사해요.”

“그보다 일단은 요양을 하셔야 합 니다.”

세드릭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더 니 수행원을 불렀다.

“레이디께서 깨어나셨으니 어서 유 동식을 가져오도록.”

수행원에게 명령한 세드릭이 의사 와 신관들에게 흘긋 시선을 던졌다.

“다들 나가보아도 좋다.”

“예, 전하...!”

의사와 신관들이 황급히 방을 빠져 나갔다.

누가 뒷덜미를 잡아채기라도 할 것 처 럼 다급한 움직 임 이 었다.

나는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 을 매의 눈초리로 관찰했다.

아직 세드릭에게선 매혹적인 향이 은은히 맴돌고 있었다.

혹시나 이 향의 마법적인 효능에 홀린 사람은 없나, 싶은 불안이 들 었다.

“물러나겠습니다, 전하!”

그러나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 들은 누구도 세드릭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눈길을 주기는커녕, 혹여나 그와 눈이 마주칠세라 두렵다는 듯 고개 를 푹 숙이고 뒷걸음질 쳤다.

눈을 씻고 봐도 세드릭에게 반한 기색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음, 그새 향이 희미해졌나?’

나는 몰래 숨을 들이마셔 보았다.

순간 내 표정이 나도 모르게 사르 르 풀어졌다.

향은 여전했다.

화려한 일랑일랑과, 은은히 코끝을 휘감는 레엘리우스의 냄새.

여즉 남아 있는 아름다운 향기의 향연에 또 한 번 가슴이 두근거렸 다.

‘아니, 잔향이 너무 오래가는 거 아니야?’

나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속으

로 투덜거렸다.

‘용연향 때문인가,’

용연향을 얻은 이후 나는 거의 모 든 고급 향수에는 그것을 첨가했다. 향기가 오래가게 만들기 위해서였 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작작 쓸걸….’ 하는 후회가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의사와 신 관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우리 둘밖에 남지 않았다.

세드릭이 내 베개의 각을 잡아 주

었다.

“어서 다시 누우십시오. 아직 몸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으셨을 겁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잠깐 낮잠이 라도 잤다가 일어난 느낌인걸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 왜 잘 달리다가 쓰러진 건지 짚이는 바가 없진 않았다.

마계향은 일반인들에겐 불쾌한 기 분을 줄 뿐 큰 악영향을 미치진 않 았다.

그건 보통 사람들에겐 성흔이 존재

하기 때문일 터였다.

‘내겐 성흔이 주는 기본적인 신성 력도 없으니까… 그만큼 마계의 물 질에 더 치명적으로 노출된 거겠 지.’

신이 좀 치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기왕 다른 세계로 보내줄 거면, 그 성흔인지 뭔지 하는 것도 모른 척 하나 그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불경한 생각을 하는 내게 세드릭이 말했다.

“레이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어서 누우시죠.”

“저는 정말 괜찮은데요, 이제.”

“어서요.”

나는 결국 도로 베개 위에 머리를 눕혔다.

세드릭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이불 을 내 턱 끝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 네.’

침대는 푹신했고, 나를 향해 떨어 지는 세드릭의 눈빛은 다정하다 못 해 자상했다.

불편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기 분이 말랑거렸다.

따스한 이불 속에 파묻혀 있으려니 나른함이 몸을 휘감았다.

나는 반쯤 멍해진 눈으로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잘생겼다.’

졸려서 그런지 원초적인 감상도 튀 어나왔다.

‘누가 소설 주인공 아니랄까 봐.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네.’

나를 걱정하느라 끝이 조금 아래로 떨어진 눈썹까지도 각도가 완벽했 다.

눈 돌아가게 잘생긴 남자의 수발을 받는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아니. 솔직히 좀 좋은 것 같아.’

내가 너무 정신없이 세드릭의 얼굴 을 감상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졸음에 잠긴 이성은 그 이 상의 일을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빤히 바라보십니까, 레 이 디.”

세드릭이 조용히 속삭였다.

‘그냥 당신 얼굴 구경 중인데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난 그냥 입 을 다문 채 눈만 굴렸다.

“아까 레이디가 제 코에 파묻었던 레몬의 잔해라도 남아 있습니까?”

나는 깜짝 놀라 다시 세드릭을 올 려다보았다.

그의 눈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감사했습니다. 좀 코가 아프긴 했 지만.”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죄송해요, 전하. 다음엔 경고 드 린 다음에 던질게요.”

“괜찮습니다.”

세드릭이 픽 웃었다.

그 모습에 심장이 느리고 깊게 박 동했다.

‘역시... 망할 향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거야.’

세드릭의 손가락이 느릿느릿 내 앞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따스한 체온에 다시 눈이 감겼다.

아직 안정이 필요하다는 세드릭의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금세 졸음 이 몰려왔다.

잠에 반쯤 잠긴 머릿속으로 목소리 가 들렸다.

“푹 주무십시오. 아리엘.”

‘이것 봐……/

잠에 취한 채로 나는 멍하니 생각 했다.

‘또 이름으로 부르잖아.’

자꾸 마음대로 말 놓으면, 나도 세 드릭이라고 불러버릴 거야.

그 말을 속으로만 생각했는지, 잠 꼬대로도 뱉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곧 의식이 따스한 수마 속으로 잠 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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