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장례식장처럼 고요한 방 안.
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침대가 놓 여 있었다. 그 위로 놓인 베개에 벌 꿀을 녹인 듯한 금발이 어지러이 펼 쳐졌다.
그리고 그 주변을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외알 안경을 쓴 의사가 떨리는 목 소리로 말했다.
“환자분의 병은 외상이 아닌 내상 입니다. 외람되오나 내상은 제 전문 분야가 아닌 관계로…… 신성력의 도움을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신성력의 도움’이라는 말에, 외알 안경 의사 옆에 서 있던 신관이 어 깨를 움찔 굳혔다.
세드릭의 눈동자가 찌르듯 신관을 향했다.
히익, 숨을 집어삼킨 신관이 떨리 는 입을 열었다.
“소, 송구하오나, 전하. 신성력을 사용해서 치유하려면 기, 기본적으 로 신의 자비가 닿을 수 있도록 환 자분의 몸에 일종의 통로가 필요합 니다. 그것을 통칭 성흔이라고 부르 는데, 환자분께는 그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서……『
“그래서.”
“시, 신성력을 사용하는 신관이 아
닌 의사가 치유를 담당해야 할 것 같……-”
쿵.
세드릭이 협탁을 내리쳤다.
누워 있는 환자가 놀라지 않도록 일부러 약하게 내리쳤지만, 그 작은 소리에도 의사와 신관들은 흠칫거리 며 어깨를 굳혔다.
세드릭이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서로 떠넘기기만 하면 환자는 누 가 치료하지? 자연 치유라도 되길 빌어야 한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전하.”
“죄송합니다, 전하.”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신관과 의사들이 입 모아 말했다.
세드릭은 거칠게 이마를 쓸어올렸 다.
아리엘이 쓰러져 있는데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앞의 멍청한 신관과 의사들을 으르는 것밖에 없 었다. 세드릭은 이 현실이 너무도 기막혔다.
‘하필이면 주치의가 자리를 비운
이날에.’
“무슨 수단이든 써서 치료해내. 멀 쩡히 나가고 싶으면.”
“예, 옙!”
의사와 신관들은 힘차게 대답하면 서도 서로의 눈치를 봤다.
외알 안경 의사가 다시 용기를 냈 다.
“그, 그러면 제가 말씀드리는 약초 들을 구해와 주십시오. 최대한 노력 해 보겠습니다……!”
외알 안경 의사는 눈을 질끈 감고 온갖 희귀하고 효험이 좋기로 유명 한 약초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그러나 저 무서운 공작이 정말 그 귀한 약초들을 전부 구해온다 해도, 그는 환자를 치료해낼 자신이 없었 다.
그래도 일단은 약초가 조달되는 동 안 어떻게든 대책을 궁리해볼 생각 이었다.
“좋아. 더 필요한 것이 생기면 바 로 말하도록 해라.”
“예, 전하……!”
외알 안경 의사가 얼른 고개를 끄 덕였다.
수행원들이 세드릭의 지시를 받자 마자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그러 나 세드릭은 여전히 병상 옆에 서 있었다.
외알 안경 의사가 환자 곁에 우뚝 서 있는 세드릭을 힐끔거렸다. 다른 의사와 신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작님이 나가시면 우리끼리 대책 을 토의할 생각이었는데……/
공작이 저렇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서야 차분히 대책을 의논해볼 수가 없었다.
외알 안경 의사는 십 년분의 용기 를 끌어모아 입을 열었다.
“저, 전하. 외람되오나 환자분께는 절대안정이 필요해서…… 잠시 방 밖에서 기다리시는 것은 어떠십니 까?”
“나가라는 건가?”
세드릭이 외알 안경 의사에게 시선
을 던졌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의사는 히익, 숨을 삼키곤 조금 전 자신의 만용을 후회했다.
‘그냥 참을 걸 괜히 나서서…… 이 러다 어디 잘못되는 거 아냐?’
의사가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떨 고 있는데, 예상과 달리 세드릭은 그저 혀를 짧게 차고 다시 환자에게 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웃기는 소리. 환자에게는 내가 필 요해.”
“예? 전하가…… 필요하다고요?”
외알 안경 의사는 당황한 나머지 두려움도 잊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가, 이내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환 자분께서 깨어나시면 곧바로 말씀드 리겠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말 그대로 환자 곁엔 내가 있어야만 한다.”
세드릭이 천천히 침대가에 가 앉았
다. 아주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외알 안경 의사는 그 광경을 눈을 끔뻑이며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세드릭의 말을 이해할 수 없 었다. 지금 저 환자에게 필요한 건 이십여 년 전에 받았어야 했을 성흔 이었다. 혹은 유명한 약초거나. 그런 데 자신이 필요하다니?
그러나 의사에게 그렇게 반박할 용 기는 없었다.
외알 안경 의사가 입을 다문 채 서 있는 동안, 세드릭은 천천히 손 을 환자의 이마 위에 얹었다.
그 모습이 마치 깃털을 다루듯 조 심스러워, 의사는 덩달아 숨을 참았
다.
차가워.”
세드릭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리엘의 얼굴에선 혈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한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려 보 았다.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 요?’
뜬금없었던 아리엘의 물음.
그리고 정확히 그 순간부터 시작된 이상한 현상들.
코끝을 간질이던 기묘한 냄새, 가 빠지던 맥박.
지독한 기시감에 머릿속에선 날카 로운 경보음이 울렸고……소
동시에 아리엘이 쓰러졌다.
세드릭은 그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광증으로 인한 고통도 잊힐 정도였다.
하지만 아리엘은 언제 휘청거렸냐 는 듯 곧장 일어서선 어디론가로 달 려 갔다.
세드릭은 줄곧 왼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바라보았다.
반쯤 뭉개진 레몬 반쪽.
세드릭은 뭉개진 레몬의 잔해를 소 중히 손에 쥐었다.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에 서도 아리엘은 자신을 먼저 걱정했 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타적인 마 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아리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레이디?!”
세드릭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 이며 다급히 외쳤다.
속눈썹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세드릭은 그 아래로 드러나는 청록 색 눈동자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리엘의 속눈썹이 몇 번 파르르 떨렸다.
잠시 뒤에야 그녀의 눈동자가 세드 릭에게로 초점을 맞췄다.
우
전하?”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세드릭은 현 실감을 되찾았다.
“아리엘.”
황급히 고개 숙인 세드릭이 물었다.
“괜찮…… 괜찮습니까? 기분은 좀 어떠시고요. 어지럽진 않습니까?”
“으음, 질문이 너무 많은데……,”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아리엘이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곧 그녀가 의아한 듯 미간을 좁혔 다.
“그런데, 제가 왜 침대에 누워 있 죠‘?”
“쓰러지셨습니다.”
“네? 정말요?”
아리엘이 눈을 크게 떴다.
세드릭의 손을 잡고 달린 게 그녀 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세네타 광장을 벗어나서도 한참을 더 달렸던 것 같다. 인적이 드문 곳 까지 가서야 아리엘은 겨우 멈춰서
격한 숨을 몰아쉬었었다.
지나치게 시야가 가물거렸던 기억이 난다. 달리긴 했지만 맥박도 이상하 리만치 빠르게 뛰었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렇게 생각한 뒤의 기억은 끊겨 있었다.
“세상에, 제가 길거리에서 기절한 건가요?”
기억을 더듬은 아리엘이 화들짝 늘
라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요즘 가게에 틀어박혀 있느라 산 책도 거의 못 하긴 했는데, 내 체력 이 그렇게 저질이 됐단 말이야!’
아리엘이 경악하는 동안 세드릭은 조심스레 손을 움직였다.
아리엘의 이마 위에 놓여 있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머리칼을 쓸 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아리엘이 동의하듯 한숨을 내쉬었 다.
“하, 저도 제 절망적인 체력이 걱 정스럽네요. 언제 이 지경이 됐지?”
“……체력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 까.”
세드릭이 괴로운 듯 입술을 씹었 다.
아리엘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 다보았다.
네?”
“그런 문제가 아니란 것……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애써 숨기지 않으셔 도 됩니다, 아리엘. ……저한테는 요.”
세드릭이 아주 조심스럽게, 하나하 나 말을 고르듯 천천히 말했다.
그는 아리엘이 쓰러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마계 향은 그저 불쾌 한 기분이 들게 할 뿐, 치명적인 영 향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리엘은 그 향기에 이상 반응을 보였다. 의식을 잃을 정도로. 그렇다면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
다.
실험체.
‘그동안 대체…… 얼마나 힘들었을 지.’
물론 아리엘은 아닉시아 향을 만들 줄 아니 그럭저럭 버틸만했을 것이 다.
그래도 세드릭은 그녀가 겪어야 했 을 고통을 되새길 때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모조리 죽여버릴 거다.’
세드릭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아리엘을 이렇게 만든 그놈들을 전 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단죄할 것 이다.
이 대륙에서 칸이라는 이름을 다시 는 찾아볼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이젠 확실히 알겠습니다.”
조금만 세게 쥐어도 부서질 것처럼,
세드릭이 아리엘의 앞머리를 손끝으
로 천천히 쓸어올렸다.
아리엘은 그런 세드릭을 멀뚱히 올
려다보았다.
“……무엇을요?”
“아리엘에게도 제가 필요하다는 것 을요. 제가 그러하듯이.”
44 99
# 호 노
나는 세드릭을 올려다보며 눈을 끔 뻑 거렸다.
머리로는 방금 들은 말을 해석하고 있었다.
‘나한테 세드릭이 필요하다고?’
뭐, 따지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향수 가게를 차릴 수 있게 도와주는 투자자였으니까.
게다가 세드릭은 이후에도 크고 작 은 도움을 여러 번 주었었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오
‘표정이 왜 이렇게까지 심각한 거 야?’
하긴, 잘 달리다 갑자기 픽 쓰러졌 으니 걱정이 될 만도 하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아기새 바 라보듯 조심스러운 눈빛은 좀……/
나는 왠지 아련한 세드릭의 눈빛에 괜히 머쓱해져서 몸을 비틀었다.
“불편하십니까?”
세드릭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아뇨, 괜찮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나 는, 세드릭 뒤에 서 있는 웬 인간 무리를 발견했다.
실례지만 다들 누구세요?”
안절부절못하며 이쪽을 바라보던 무리가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리엘 님의 치료를 맡은 의사 길버……,”
“아리엘을 치료하기 위해 부른 의 사와 신관들인데 쓸모는 없었습니 다. 약초를 가져오기도 전에 아리엘 혼자 훌훌 털고 일어났으니까요.”
번쩍 몸을 일으켰던 의사가 시무룩 하게 다시 고개 숙였다.
“이제부터는 제 주치의를 항상 대 동하겠습니다, 아리엘. 진작 그랬어 야 했는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 였다. 아까와 같은 사태가 또 일어
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주치의를 데리고 다니는 건 좋은 선 택이 었다.
그런데, 그건 그렇다 치고……오
나는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곤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전하.”
“예. 말씀하십시오.”
세드릭이 어서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긴가민가하며 말했다.
“아까부터 절 이름으로 부르고 계 시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