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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99화 (99/153)

〈100화〉

“청소를 왜 직접 하십니까? 직원들 과 기사들은요.”

세드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레를 밀며 말했다.

“소, 소일거리예요.”

“아무리 그래도…… 하아, 그냥 내

버려 두시죠.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거의 다 치웠는걸요.”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아까부터 같은 곳만 닦고 계시는데.”

아.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밀고 있던 타일은 깨끗하다 못해 반짝반짝 광이 나고 있었다.

“역시 평소와 다르신 것 같은 데……,”

세드릭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목욕을 했는데도 가시지 않은 일랑 일랑과 레엘리우스의 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레이디.”

“네?”

“왜 바닥만 보고 계십니까?”

“처, 청소 중이니까요.”

“흐음.”

잠시 침묵하던 세드릭이, 불쑥 내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붉은 눈과 정면으로 마주하자, 하 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허브를 잃은 상심이 그리 크십니 까?”

세드릭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나는 향을 맡지 않기 위해 급히 숨 을 멈췄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 에 있었다.

가까이서 보이는 세드릭의 앞머리 에는 미처 말리지 못한 물기가 남아 있었고, 붉은 눈동자도 평소와 달랐다.

루비를 반으로 자른 듯 날카롭던 그의 눈동자가 지금은 부드럽게 일 렁거 렸다.

가장 큰 문제는 그의 옷차림이었 다.

‘대체 수행원은 뭘 사 온 거야……/

세드릭은 가벼운 흰색 셔츠만 한 장 걸치고 있었다.

목욕을 하고 바로 나와서인지 단추 조차도 끝까지 잠그지 않은 채였다.

‘이렇게 무방비한 옷을 사오면 어

떡해!’

나는 애꿎은 수행원을 탓했다.

“레이디?”

내가 한참이나 말이 없자, 세드릭 이 다시금 되물었다.

나는 화드득 정신을 차리곤 말했다.

“아, 방금 뭐라고 하셨죠?”

“……재료를 잃어서 상심이 크신 건 아닌지 여쭸습니다만.”

“아, 상심이라뇨. 전혀 그렇지 않아 요. 재료야 다시 구하면 되는걸요.”

물론 레엘리우스는 구하기 힘들겠 지만.

이 와중에도 레엘리우스 생각을 하 자 가슴이 아팠다.

리키우스도 하나만 남았다고 했었 는데, 이제 그걸 어디서 구한담?

“아닌 것 같은데요. 지금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십니다.”

윽, 눈썰미 날카롭긴.

나는 얼른 표정을 바로잡았다. 지 금은 레엘리우스 보다 향수를 뒤집 어쓴 세드릭 문제를 수습하는 게 먼 저였다.

나는 일단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 다.

‘호감의 묘약 같은 건 없다. 그런 건 허상이다. 이건 단지 플라시보 효과일 뿐이다.’

나는 속으로 세뇌하듯 중얼거린 뒤, 잠시 후 눈을 떴다.

세드릭이 신기한 것을 보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전하.”

나는 세드릭을 향해 똑바로 몸을 돌린 뒤,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평소와 달리 분위기를 잡자, 세드릭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예?”

“목욕을 하고 오셨지만 아직 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러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가 중화할 만한 향기를 만들어 볼

게요.”

일전에 제이나의 체향을 없애기 위 해 향수를 만든 적이 있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이번에도 세 드릭의 몸에 밴 향기를 제거할 방법 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세드릭이 조향 기구밖에 없는 2층 을 잠시 둘러보더니 대답했다.

“여기서 요?”

“네, 제가 방법을 찾을 때까지 이 2층에서 절대 움직이시면 안 돼요.”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겁니까?

갇힌 것처럼요?”

“그런 셈이죠.”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필요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이유라도 들을 수 없겠습니까? 아까 부터 절 2층에 격리하시려는 것 같 은데.”

그의 짐작은 정확했다. 나는 어떻 게든 세드릭을 격리시키기 위해 애 쓰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전하께서 아까 뒤집어쓰셨던 그 향수에…… 좀 특수한 효과가 있어 요.”

“어떤?”

“음, 그게, 그러니까.”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호감의 묘약이 들어간 향수라는 걸 이실직고하자니, 지금 내가 그를 제 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이유를 밝히 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너무 창피했다.

“그냥…… 어떤 효과예요. 크게 심 각한 건 아니고요.”

“그럼 절 격리시키지 않으셔도 되 는 거 아닙니까?”

세드릭이 그렇게 말하며 계단을 향 해 발걸음을 옮기는 시늉을 했다.

나는 황급히 외쳤다.

“안 돼요. 여기 계셔야 해요!”

아래층엔 직원들이 있다. 특히나 아이샤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앳 된 아가씨였다.

만에 하나 그녀에게 향이 영향을 미친다면 큰일이었다.

“반드시 여기 계셔야 해요. 반드 시!”

“알겠습니다. 어디 안 갈 테니 진 정하세요.”

세드릭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나 를 진정시켰다.

수행원을 돌아본 세드릭이 말했다.

“그렇게 되었다는군. 다음 일정은 미뤄.”

“예, 전하.”

나는 죄책감 어린 눈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전하. 저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되셨네요.”

“중요한 약속은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드릭이 가벼운 투로 말하며 싱긋 웃었다. 입가가 부드럽게 호를 그렸 다.

그 모습에 시선을 뺏긴 나는 멍하 니 입을 열었다.

스물여섯 맞으세요?”

“네‘?”

“아, 아니. 죄송해요. 아무것도 아 니에요.”

나는 얼른 입을 가렸다. 지금 무슨 소릴 한 거야.

정장을 입었을 때와 달리 눈앞의 세드릭은 앞머리를 내리고 있었다.

거기에 얇은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으니 소년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 았다.

‘이미지가…… 평소랑 너무 다르잖 아.’

나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눈가를 쓸 었다.

이젠 이 당황스러움이 향수의 효과 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황급히 새로운 화제를 꺼냈 다.

“아, 그래. 그렇지. 아닉시아 향을 전달해드리기로 한 날이었죠. 지금 가져다드릴게요.”

선반에서 아닉시아 향수병을 꺼낸 나는 다시 세드릭의 앞으로 다가갔 다.

당황스러운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 도 짚을 건 짚어야 했다.

“요즘 몸은 어떠세요? 어지럽다거 나, 막 화를 주체할 수 없다거나.”

“글쎄요 그런 증상은 없습니다만.”…,”

내 질문이 이상했는지 세드릭이 웃 었다.

“아, 그렇죠. 물론 없으시겠죠. 그 러면 요즘 건강엔 이상이 없으신 거 죠?”

“저야 평소와 다름없이 멀쩡합니다 만.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제 쪽에서 묻고 싶군요.”

세드릭이 돌연 진지한 눈빛을 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잠은 잘 주무 시고 계십니까.”

또 그 눈빛이었다.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병을

바라보는 표정.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전하. 걱정해주셔서 정말 감사하 지만,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요즘 좀 바빠서 잠을 줄이긴 했지만, 휴 일엔 열 시간씩 자요.”

“그렇습니까.”

“제게 성흔이 없다는 것에……/,

‘성흔’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세드릭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저번에도 말씀드렸듯 그런 거 없이도 여태 건강하게 잘만 살아왔는걸요.”

신뢰를 주기 위해, 나는 방긋 씩씩 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런데 어쩐지 내 미소를 마주한 세드릭의 표정이 더욱 가라앉은 것 만 같았다.

“……그렇습니까.”

잠시 뒤에야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 였다.

어딘지 씁쓸한 미소를 띠고서.

세드릭이 목소리 톤을 밝게 바꾸더 니, 티가 나게 화제를 전환했다.

“참, 기사들은 어떻습니까? 레이디 를 잘 보필합니까? 실력은 확실하지 만 섬세한 친구들은 아니라서 답답 하시지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아, 잘 말씀하셨어요. 그분들이 가 게에 많은 도움을 주시고 계시긴 하 지만, 아무래도 부담스러워서……/

거기까지 말한 순간, 멀찍이 떨어 져 있던 수행원이 다급히 다가왔다.

“공작 전하.”

굳은 수행원의 목소리에 세드릭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수행원이 세드릭의 귓전에 무어라 속삭이자, 세드릭의 눈빛이 차게 가 라앉았다.

“지금?”

“ 예.”

“도움이 안 되는군.”

세드릭이 낮게 혀를 차곤 나를 바 라보았다.

“레이디. 죄송하지만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나는 황망한 눈으로 세드릭을 바라 보았다.

아직도 세드릭에게선 희미한 레엘 리우스 향이 일렁거렸다.

“지금 바로 가셔야 하는 건가요?”

“네. 왜 그러십니까?”

“어, 어디로 가시는데요?”

세드릭이 대답 대신 수행원에게 시 선을 던졌다. 수행원이 대신 내게 대답했다.

“살롱 크리울라입니다, 아리엘 님. 세네타 광장에 있는.”

“안 돼요!”

나는 나도 모르게 외쳤다.

세네타 광장이라면 이 거대한 제도

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광장이다.

평일에도 수많은 인파로 바글거리 는 곳이었다.

지금 그런 곳에 가겠다고?

몸에선 달착지근한 바닐라와 레엘 리우스 향을 풀풀 흘리면서? 셔츠 한 장만 달랑 걸친 채로?

‘절대 안 돼!’

“ 예?”

세드릭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소년 같은 표정에 심장이 다시 한번 내려앉았다.

역시 아직 향의 효과가 가시지 않 은 거야.

이런 상태의 세드릭을 인파 속에 내던질 순 없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위 험하단 말이에요!”

“위험하다고요? ……제가요?”

“네!”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흉흉한 일들이 얼마나 많 이 일어나는데요!”

세드릭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절 이런 식으로 걱정하는 건 레이디뿐입니다.”

세드릭은 내가 과한 염려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안 되겠어.’

지금 세드릭이 밖으로 나가는 건, 생선을 들고 굶주린 고양이들 사이 를 누비는 격이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그걸 모른다. 나 역시 자초지종을 세세히 설명할 용 기가 나지 않았고.

그러니 하는 수 없었다.

옆에 달라붙은 채로 그의 일거수일 투족을 단속하는 수밖에.

“그럼 저도 데려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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