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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98화 (98/153)

〈99 화〉

“기계는 일단 멈췄습니다. 문제는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인데……/’

세드릭이 난감한 얼굴로 뚜껑이 날 아간 마도기계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까? 중요한 재료가 들어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랬지.

저 안에는 아주 소중한 재료들이 들어있었다.

레엘리우스. 그리고 마탑에서 갓 구매해 왔던 호감의 묘약.

“레이디?”

내가 말없이 가만히 있자, 세드릭 이 미간을 좁혔다.

“……재료가 날아간 게 충격적이신 가 보군요. 제가 어떻게든 조달해 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디?”

세드릭이 내게 살짝 다가왔다. 짙 디짙은 향수 내음이 훅 끼쳤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레시피 수첩에 적혀 있었던 어떤 향수의 이름이 떠올랐기 때문이었 다.

‘사랑에 빠지는 향.’

이번 ‘유페리아’ 향수와 재료가 비

슷한 그 향수는 클레어의 의뢰로 만 든 것이었다.

똑같이 ‘호감의 묘약’이 들어가긴 하지만 그 묘약은 상대의 호감을 살 짝 증폭시키는 정도일 뿐, 사랑에 빠지거나, 관계에 변화를 줄 만큼의 효과는 없었다.

‘마탑 직원도 그랬잖아? 플라시보 효과와 다를 바 없다고.’

그 정도로 효과가 미약하다는 뜻이 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세드릭을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오

나는 후, 심호흡을 하고 다시 세드 릭을 바라봤다.

살짝 젖은 앞머리를 쓸어올리다 말 고 세드릭이 나를 돌아보았다.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내 머리에서 다시 경보음이 울렸다.

‘뭔가가 이상해. 마치 저번처 럼……/

그러고 보니 세드릭은 호감의 묘약 이 들어간 ‘사랑에 빠지는 향’을 맡 고 갑자기 나를 성 엘레이스의 축일 에 열리는 황궁 무도회에 초대한 전 적이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말을 바꿀 줄 알았 더니, 예상과 달리 효과가 오래 지 속되서 당황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멀쩡한 것 같은 데…… 아, 혹시?’

나는 화다닥 세드릭에게서 멀어졌 다. 머릿속에서 삐용삐용 경보음이

끊임없이 울렸다.

나는 황급히 외쳤다.

“저, 전하!”

“네?”

“일단 샤워부터 하시죠!”

“예‘?”

세드릭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그를 마주 보는 대신 살짝 고개를 빗겨 돌리곤 말했다.

“향수에 홀딱 젖으셨잖아요. 보송 보송한 수건을 준비해 놓을 테니, 일단 샤워부터 하시죠!”

“이 건물에 욕실도 있습니까?”

“그럼요! 물론이죠!”

얼마 전까지 귀족 부인의 사택이었 던 곳이다. 당연히 욕실도 있었다.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드릭을 안내했다. 일단은 세드릭의 몸에서 묘약을 씻어내는 게 급선무였다.

“어서 가시죠!”

“아, 예…… 그런데 레이디께선 괜

찮으신 것 맞습니까? 아까부터 좀……

“전 완전히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 요! 전하께서 홀딱 젖으신 게 가장 걱정이죠!”

나는 세드릭을 자욱한 연기 밖으로 끌고 나왔다.

계단 근처에서 직원들이 아직 남아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안 돼.’

이전에 호감의 묘약을 다룬 적이

있는 나조차도 지금 세드릭을 보면 기분이 이상했다. 묘약에 노출되어 본 적 없는 직원들에겐 더 큰 효력 을 발휘할지도 몰랐다.

“다들 내려가세요! 내려가!”

나는 재차 외치며 손을 휘휘 저었 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공작님께서 도 괜찮으신 거 맞고요?”

아이샤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다시 한번 다급히 외쳤다.

“괜찮으니까 어서 내려가요!”

“네, 네에……,”

직원들이 떠밀리듯 계단을 내려가 자,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곤 세드릭 을 이끌었다.

다행히 욕실은 이 층에 있었다. 나 는 얼른 세드릭을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욕실 문을 닫으려는데 세드릭이 말 했다.

“아, 그런데.”

세드릭의 손이 욕실 문을 잡았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여벌 옷이 없어서…… 죄송하지만 아래층에 있을 제 수행원한테 좀 가 져다 달라고 전해주시겠습니까?”

“네, 넵!”

나는 더듬거리며 고개를 세차게 끄 덕였다.

허겁지겁 욕탕 문을 닫은 나는, 벽 에 등을 기대고 심호흡을 했다.

‘ 망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마탑 직원에게 삿 대질했다.

‘상술일 뿐이라면서요!’

하긴, 저번에 세드릭이 좀 이상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었고…… 클레어 도 클레임을 걸지 않았던 걸 보면 마냥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 다.

‘어쩌면 향수의 다른 재료들과 섞

이면서 그 효과가 증폭되었을지도……/

나는 내 두 손을 망연자실하게 내 려다보았다.

‘나 정말로 사람의 호감을 증폭시킬 수 있는 향수를 만들어버린 거야?’

세상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런 마 법 같은 일이 정말로 가능하다고? 아니, 이곳이 마법이 가능한 세계인 건 맞지만……오

나는 곧 고개를 탈탈 털어냈다.

‘진정하자. 이건 그냥 플라시보 효 과일 뿐이야. 그렇게 믿고 있어서 이상하게 느껴지는 거라고.’

아니면 향기 때문이거나.

나는 이 향수에 매혹적인 향기를 잔뜩 들이부었었다. 대표적으로 사 랑의 전령이라 불리는 일랑일랑.

항상 알싸한 침엽수 같은 향만 풍 기던 사람에게서 갑자기 짙고 매혹 적인 향기가 나니, 달리 보이는 것 도 당연했다.

‘역시 향기의 힘은 위대해.’

그렇게 납득하려던 순간, 안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세드릭이 목욕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으 ,

나는 서둘러 욕탕에서 멀어졌다.

‘남이 목욕하는 소리를 듣고 얼굴 이나 붉히다니, 완전 변태 같잖아?!’

정신 차리자. 나는 스스로의 뺨을

착착 두들겼다.

일층으로 내려가자 직원들이 걱정 스러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사장님, 괜찮으신 거죠?”

나는 애써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걸 쳤다.

“그럼요. 전하께서도 향수에 젖으 셨을 뿐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호, 혹시…… 공작님께서 화가 많 이 나셨나요?”

플렉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글쎄, 그러신 기색은 아니었어요.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를 좀 들어 볼까요?”

나는 짧게 한숨을 쉬곤 직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마도기계가 갑자기 왜 오작동을 일으킨 건지, 아는 분 계신가요?”

“그, 그, 그, 그게……,”

플렉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나는 플렉을 가리켰다.

“좋아요, 플렉 씨. 말해 보세요.”

“제, 제가 조금 전 사장님께서 외 줄하셨을 때 기계를 청소해놓긴 했 는데……,”

나는 이마를 탁 짚었다.

“플렉 씨. 마도기계는 섬세한 물건 이라, 청소든 관리든 당분간은 저만

도맡아 하겠다고 말했잖아요.”

“저, 정말 죄송합니다. 간단한 청소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 데…… 죄송합니다!”

플렉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도기계가 고장 난 원인이 정확 히 청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앞 으로 제가 말씀드린 주의사항은 꼭 지켜주셔야 해요.”

“네, 네!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고작 스물한 살 된 청년이 울상이 되어 연신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화보다는 한숨만 나왔다.

“처음 있는 일이고, 누가 다친 것도 아니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게요.”

물론 레엘리우스라는 귀한 허브를 잃긴 했지만……오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플렉은 이제 막 스물한 살 이 된, 홀어머니를 혼자 부양하고 있는 청년이었다.

그런 그에게 레엘리우스 값을 받아 내고 싶진 않았다.

대신 확실히 주의를 줘야지. 나는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아시겠죠? 주의사항을 안 지 키면 어떻게 되는지.”

“넵, 사장님……!”

플렉이 울먹이는 눈으로 대답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다행히도 나도, 세드릭도 무사했지 만, 만에 하나라도 세드릭이 다쳤다 면 플렉은 귀족, 그것도 공작에게 해를 끼친 죄로 감옥에 가야 했을 것이다.

이 정도로 끝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 참.’

나는 뒤늦게 세드릭의 부탁을 떠올 리고는 수행원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세드릭의 새 옷이 필요하다 고 말하자, 수행원은 바로 공작저로 떠났다.

나는 세드릭의 목욕이 끝나기를 기 다리는 동안 아이샤를 불렀다.

“아이샤 씨.”

“네‘?”

“혹시 아까 기계가 폭발한 뒤에 공 작님의 모습을 보신 적 있나요?”

“네? 어, 연기에 가려져서 잘 보이 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요? 확실한가요?”

“네, 네에. 잘 안 보였어요.”

“그럼 향기는요? 전하께 묻은 향수 의 향을 맡은 적은 있나요?”

“네? 그야 엄청 짙은 향이 한꺼번에 흘러나와서 맡기는 했는데……,”

나는 이마를 짚었다.

“좋아요, 아이샤 씨. 내 말 잘 들 어요.”

나는 아이샤의 어깨를 붙잡고 진중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폭발했던 그 향수…… 제가 어쩌면 엄청난 물건을 만들어낸 걸지 도 몰라요.”

“네? 엄청난 물건이라니요?”

아이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 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하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호감 의 묘약’이 들어있어서 조심해야 한 다고 하면 안 믿을 테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도 없고.

설명하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작 향기 한 번 맡았다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향수라니.

도대체 난 뭘 만들어낸 거야!

스스로의 재능에 두려움을 느끼며 나는 아이샤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세한 설명은 일단 생략할게요. 중요한 건, 아이샤 씨가 세드릭 전하 를 볼 때 평소와 다른 감정이 든다고 해도, 그건 진짜가 아니라는 점이에 요.”

“평소와 다른 감정이요?”

아이샤가 순진한 눈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음…… 평소보다 전하 가 더 잘생겨 보인다든지? 괜히 심 장박동이 빨라지는 것 같다든지?”

“……그건 좋아하는 감정 아닌가 요? 제가 공작님을 좋아하게 될 수 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좋아하는 감정이라니.

내가 횡설수설 늘어놓은 설명을 아 이샤가 단 두 단어로 일축했다. 나 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거죠?”

“맙소사, 사장님.”

아이샤가 억울한 눈으로 말했다.

“저 아이샤, 의리를 아는 여자예요. 제가 어떻게 사장님의 ‘그분’께 언감 생심 그런 마음을 품겠어요? 그런 건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 그런가요?”

“물론이죠!”

아이샤가 제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확언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제가 사장님의 남자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

누구의 남자……?

나는 세드릭을 가리키는 대명사에 잠깐 현기증을 느꼈다. 세드릭이 듣 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한숨을 한 번 내쉰 나는 대걸레를 챙겨 계단을 올라갔다.

“사장님, 저희가 치우겠습니다!”

직원들이 말렸으나 나는 고개를 저

었다.

“제가 해야 해요.”

위층엔 방금 만들어낸 향수의 잔해 가 참혹히 널려 있을 것이다.

그 향수는 위험했다. 이미 노출된 내가 치워야만 했다.

나는 결연한 다짐을 다지며 이층으 로 올라갔다.

마도기계가 폭주했던 장소로 다가 가자, 강렬한 꽃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열심히 대걸레질을 하고 있는데 아 래층에서 누군가가 올라왔다. 세드

릭의 수행원이었다.

“옷을 가져왔습니다, 아리엘 님. 공 작님께서는 어디에……/

“저쪽으로 가시면 돼요.”

욕실 위치를 안내해준 뒤 나는 계 속 대걸레질을 했다. 필요 이상으로 벅벅. 번뇌를 지우기 위한 움직임이 었다.

한창 대걸레질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

등 뒤에서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들 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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