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97화 (97/153)

〈98 화〉

이론상으론 모든 게 완벽했다.

저번에 만들었던 레엘리우스 향과 거의 똑같은 레시피를 사용했다. 거 기에 레엘리우스와 잘 어울리는 일 랑일랑과 백합을 추가했으니 상식적 으로 더욱 풍부한 향이 나야만 했 다.

하지만……,

유이게 아냐.”

막 조합한 향기를 들이마신 나는 미간을 꾹꾹 문질렀다.

뭔가가 모자랐다. 아주 결정적인 무언가가.

나는 다시 한번 레시피 수첩을 펼 쳐 보았다.

내 손가락이 레엘리우스 향수가 적 힌 페이지를 샅샅이 훑었다. 화이트 머스크, 장미, 모두 빠짐없이 들어갔 는데0

‘ 아.’

손가락이 문득 한 곳에 멎었다.

거기엔 작은 글씨가 꼬불꼬불 적혀 있었다. 레시피를 적을 때 별로 중 요치 않은 부분이라 생각했는지, 날 려 쓴 티가 역력했다.

“호감의 묘약.”

나는 그 글씨를 작게 되뇌어 보았다.

그건 이 향수를 만들 당시 마탑에 서 구매했던 시약이었다.

대단한 효과가 있는 약은 아니었 다. 그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 는 상대를 만났을 때, 그 호감을 더

증폭시키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거의 플라시보 효과 수 준이라고, 마탑에선 말했었지.’

예전 레시피에서 빠진 재료는 이 약뿐이 었다.

‘이 묘약에서 무슨 냄새가 났더라?’

어쩌면 그게 이 허전함의 열쇠일지 도 몰랐다.

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기자, 휴일에 출근해 있던 몇몇

직원들이 다가와 물었다.

“외출하십니까, 사장님?”

“네. 잠깐 마탑에 다녀올 테니 신 경 쓰지 말아요.”

“마탑이요?”

직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답해 줄 정신도 없었다. 나는 후 드 달린 로브를 뒤집어쓰곤 작업실 문을 나섰다.

마차는 금방 나를 마탑 안에 내려 주었다. 나를 발견한 데스크 직원이 친절히 물었다.

“무엇을 찾으시나요?”

“호감의 묘약, 한 병 부탁해요.”

“호감의 묘약……?”

데스크 직원이 미묘하게 미간을 좁 히더니, 날 알아본 듯 곧 손뼉을 쳤 다.

“몇 달 전에 구매해가신 분, 맞으 시죠?”

“네, 그랬는데요.”

그러자 직원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쯧쯧 혀를 찼다.

그녀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더니 속 삭였다.

“고객님,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던 거 같은데, 솔직히 호감의 묘약 같 은 건 상술이에요. 아무리 마법이라 도 어떻게 사람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종하겠어요? 고작해야 아주 미약 한 효과밖에 없어요, 고객님.”

“괜찮아요. 한 병 주세요.”

얼른 그 약의 냄새를 다시 맡아보

고 싶었다. 내가 재차 꿋꿋이 말하 자, 직원이 더는 잔소리하지 않고 묘약을 내주었다.

“힘내세요, 고객님! 화이팅!”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바로 약병 을 돌려 열었다.

냄새를 맡은 순간. 머릿속에서 ‘유 레카’라는 글자가 피어올랐다.

‘이거네. 이거였어!’

묘약에선 아주 미약한 향기가 났

다.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만 겨우 느낄 수 있는 한 줄기의 단 향.

이게 바로 허전함의 이유였던 거다.

나는 쏜살같이 마탑을 빠져나갔다. 작업실로 돌아온 나는, 신중히 약물 을 계량한 뒤 마도기계에 탈탈 털어 넣었다.

‘과연, 어떨까.’

예상대로라면 이번에는 ‘사랑’이라 는 단어가 절로 떠오를 만큼 황홀한 향기가 나야만 했다.

나는 두 손을 꼭 모은 채 우우웅 돌아가기 시작하는 마도기계를 바라 보았다.

“저, 사장님.”

그때 아이샤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 다.

“네? 궁금한 거라도 있나요?”

“앗, 아뇨. 그게 아니라요. 조금 전 부터 일 층에서 ‘그분’이 사장님을 기다리고 계셔서요.”

“ 그분?”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샤가 조심스러우면서도 은밀한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에반스 공작 전하요.”

“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아닉시아 향을 전달하기 위 해 세드릭을 만나는 날이었다.

‘보통은 저녁에 만나는데, 오늘은

일찍 들렀네.’

상관은 없었다. 아닉시아 향은 약 속 일자에 맞춰 넉넉히 준비해 두었 으니까.

내려가기 전 나는 거울을 한 번 돌아보았다.

‘……음. 개판이군.’

후드를 뒤집어쓰고 마탑까지 뛰어 갔다가 오느라 산발이 된 머리.

대충 아무거나 집어서 뒤집어쓴 블 라우스. 얼룩덜룩 꽃물이 든 작업용

치마.

말 그대로 개판. 내 지금 상태를 설명하기 딱 적절한 단어였다.

나는 대충 손빗으로 머리를 빗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일층에서 세드릭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세드릭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오늘의 세드릭은 평소와 달리 정장 차림이 아니었다. 가벼운 자켓 하나 만 걸친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였

다.

자유분방한 차림에 나는 고개를 갸 웃했다.

“안녕하세요, 전하. 오늘은 휴일이 신가요?”

“네, 저는 그렇습니다만. 레이디께 선 아닌가 보군요.”

세드릭이 그렇게 말하며 내 꽃물 든 치마를 바라보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저도 원래는 쉬는 날이었는데, 어

쩌다 보니 또 이렇게 됐네요. 아닉 시아 향은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응 접실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면……/,

거기까지 말한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위층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어, 왜, 왜 이러지?”

“갑자기 막 흔들리는데? 어어어, 플렉! 그쪽 잡아!”

직원들의 아우성도 들렸다.

불안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레이디의 직원들이 사고를 친 것 같습니다만.”

“저 잠깐 올라갔다 올게요!”

나는 그렇게 외치곤 다시 계단을 올랐다. 뒤에서 세드릭과 기사들이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층으로 올라온 나는 헉, 하고 입을 벌렸다.

마도기계의 거대한 몸체가 덜덜덜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고, 라비와 플 렉, 아이샤가 발을 동동거리며 기계 의 몸체를 껴안듯 붙잡고 있었다.

“사장님!”

나를 발견한 플렉이 울상을 지었 다. 나는 직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천천히 말했다.

“자아, 일단 침착하게 그 기계에서 떨어져요.”

우우웅!

마도기계가 또 용트림을 했다.

‘고장 났나?’

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고장이 나? 나는 가게에 단단히 따질 것을 결심하며 직원들을 을렀다.

“어서 떨어지세요. 위험할 수도 있 으니까요.”

“네, 네에……/’

직원들이 와들와들 떨면서도 시키 는 대로 뒷걸음질을 쳤다.

짓누르는 무게가 없어지자 마도기 계가 더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상 정지 버튼이 어디 있더라?’

“사장님! 가지 마세요!”

“아리엘 님, 위험합니다!”

직원들과 기사들이 나를 말렸다.

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 다. 누군가는 비상 정지 버튼을 눌 러서 기계를 멈춰야 했다. 버튼의 위치를 아는 건 나밖에 없었다.

“사장님!”

직원들의 가냘픈 비명이 들려온 순 간이 었다.

뒤이어 누군가 내 허리를 낚아챘 다.

“위험합니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내 몸이 훌쩍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뒤쪽으로 이동했다.

“ 전하?”

나는 고개 돌려 팔의 주인을 돌아 보았다.

세드릭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가 경계하는 눈으로 마도기계를 노려보았다.

“저건 대체 뭡니까?”

“기계, 인데요. 향을 조합하는……/

“그렇습니까? 제 눈에는 폭발하기 직전의 시한폭탄 같은데.”

세드릭이 혀를 차곤 나를 자신의 등 뒤로 보냈다.

“잠깐 나가 계시죠. 직원들도 데리 고.”

“네에? 어떡하시게요? 비상 정지 버튼, 어디 있는지 모르시잖아요!”

“음, 그냥 부수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요!”

나는 구슬피 외쳤다.

저 마도기계 안에는 방금 만들다 만 향수가 들어 있었다.

화이트 머스크와 일랑일랑 같은 재 료가 날아가는 건 상관없었다. 얼마 든지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었고,

레시피대로 조합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레엘리우스는 아니었다.

“엄청 귀한 허브가 들어 있단 말이 에요!”

“얼마나 귀한 허브든 다시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일단 내려가 계세요.”

“사장님! 도망치세요!”

“공작님 말씀이 맞아요!”

직원들이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마도기계는 더욱 크게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어떡하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나는 초조한 나머지 헛소리를 했다.

“전하가 절 저리로 던져 주시면 제 가 얼른 정지 버튼만 누르고……『

“레이디.”

“아, 알겠어요. 내려갈게요. 전하는 요?”

“원래 기계는 좀 두들겨 주면 낫습 니다. 제가 알아서 해볼 테니 걱정 하지 마시고 내려가 계세요.”

조금도 믿음직스럽지 않은 대답이 었지만, 담담한 표정 때문인지 믿음 직하게 들렸다.

“전하.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휴고의 외침에 세드릭이 고개를 저 었다.

“레이디를 모시고 일 층으로 내려가.”

휴고가 입술을 깨물곤 나를 계단으 로 안내했다. 나는 뒷걸음질 치면서 도 세드릭을 끝까지 쳐다보았다.

괜찮겠지? 지금이라도 세드릭을 끌 고 내려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이었다.

굉음이 고막을 울렸다.

“으아악!”

“꺄악!”

직원들의 비명소리도 들렸다.

마도기계에서 뭉게뭉게 연기가 피 어올랐다. 짙은 연기가 세드릭을 삼 켰다.

“전하?!”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세드릭 을 향해 달렸다.

“사장님!”

“아리엘 님!”

연기 속으로 들어가자 세드릭의 인 영이 보였다.

“전하! 괜찮으세요?”

나는 얼른 세드릭에게 다가가 어깨

를 붙잡았다.

그 순간 몹시 짙고 매혹적인 향기 가 코끝을 찔렀다. 지나치게 강렬한 향기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레이디!”

세드릭이 나를 부축했다. 나는 머 리를 탈탈 털곤 물었다.

“괜찮으세요? 폭발음이 들렸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세드릭이 그렇게 말하며 셔츠 소매 로 제 얼굴을 닦았다.

나는 그제야 세드릭의 얼굴이 무언 가로 축축이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 았다.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온몸이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젖어 있었다.

‘……아, 이런. 세상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마도기계가 뿜어낸 향수를 정통으 로 맞은 세드릭은 난감한 얼굴로 젖 은 셔츠 소매를 쥐어짰다.

그때마다 짙은 장미와 일랑일랑, 그리고 레엘리우스의 향기가 코끝을 마비 시켰다.

“들어있던 게 향수였습니까? 냄새 가 엄청나군요.”

세드릭이 투덜거리며 물방울 묻은 앞머리를 털었다.

그 순간, 내 머리에 강력한 경보음 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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