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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96화 (96/153)

〈97 화〉

“네, 맞아요. 엄청 중요한 분이에요.”

상대는 다름 아닌 황녀 전하니까.

어디에나 널린 흔한 물건을 선물할 수는 없었다.

아이샤가 후후 웃었다.

“사장님. 저 연애편지 엄청 잘 써 요.”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아이샤를 올 려다보았다.

갑자기 웬 연애편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소중한 분께 선물하시려는 거죠? 그런 선물에 편지가 빠질 수 없잖아 요.”

“제 친구들은 연애편지 전부 다 저 한테 대필 맡겨요. 애인들이 다 감 동해서 운다니까요? 완전 백발백중.”

“아니, 아이샤 씨. 착각하신 것 같

은데요. 애인한테 줄 선물 아니에요. 전 애인도 없고요.”

나는 그제야 아이샤의 오해를 깨닫 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아이샤는 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에에이, 사장님. 정말이에요. 공작 니…… 앗, 흠흠, 아니. 사장님의 ‘그분’께 드릴 편지니까 저도 간만 에 글솜씨를 발휘해 볼게요.”

아이샤는 포기하지 않고 이상한 소

리를 했다.

대체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야, 이 아가씨. 눈치 빠르다는 말 취소.

나는 폭 한숨을 내쉬며 다시 레시 피 생각에 몰두했다.

‘유페리아 향수의 레시피를 정한 건 좋아, 문제는 레엘리우스를 어디 서 구하냐는 건데……/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 소리가 울렸다.

성 카트린의 축일 기념 무도회에 서, 내게 레엘리우스를 구해다 주겠

다며 허언하던 세드릭 에반스의 목 소리가.

‘저 산 잘 탑니다.’

……하여간 은근히 실없는 농담을 잘한다니까.

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등산복을 입 고 레엘리우스를 캐는 세드릭을 떠 올렸다가, 곧 고개를 홰홰 저었다.

‘아무튼, 어떻게든 레엘리우스를 구해봐야겠어.’

사실 굳이 레엘리우스를 첨가할 필 요는 없었다.

다른 허브로도 충분히 ‘사랑’을 표 현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기왕 만드는 거, 최선을 다하고 싶은걸.’

단순히 델레이나 황녀에게 희귀한 향수를 선물하고 싶다는 이유 때문 만은 아니었다.

‘일종의 자존심이랄까.’

이건 완벽한 레시피가 떠올랐는데 다른 재료로 타협하고 싶지 않은 욕 심이었다.

“으음, 레엘리우스는 또 제이나 님 께 부탁해봐야 하나.”

“레엘리우스요, 사장님?”

깜짝이야, 아직 옆에 있었구나.

나는 고개를 돌려 아이샤를 바라보 았다.

“네, 맞아요.”

“저도 한 번 알아볼까요? 제 오빠 가 약초상인데, 희귀한 것들을 제법 취급하거든요. 어젠 오랜만에 돌아 와선 귀한 약초를 많이 구했다고 싱 글벙 글이 더 라고요.”

“정말요?”

아이샤의 오빠라……,

나는 아이샤의 풀네임을 머릿속으 로 떠올려 보았다.

아이샤 플리에.

익숙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유명한 약초 상인 중 한 명이 ‘폴리에’라는 성을 쓰고 있

었던 것 같은데.

“아이샤 씨. 혹시 오빠 분의 성함 이……/

“리키우스 플리에예요. 앗, 혹시 아 시나요, 사장님?”

‘……오.’

나는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리키우스 플리에는 아주 잘나가는 약초상이 었다.

얼마나 잘나가냐면, 어지간한 귀족 이 아니면 상대도 해 주지 않을 정

도였다. 나도 아직 리키우스와는 거 래해본 적이 없었다.

‘취급하는 분야가 향초보다는 약초 라, 나와 관심 분야가 약간 다르기 도 했고.’

“그럼, 혹시 리키우스 씨가 레엘리 우스도 취급하는지 알아봐 줄 수 있 어요?”

“넵, 사장님. 당장 물어보고 올까 요?”

“그래 주면 저야 고맙죠.”

“예!”

아이샤가 진지한 얼굴로 경례하곤 쏜살같이 가게를 뛰쳐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나도 모르 게 픽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이샤는 그로부터 딱 삼십 분 뒤 에 돌아왔다.

뛰어다닌 건지,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며 아이샤가 외쳤다.

“사장님! 있대요, 레엘리우스. 딱 하나 남았대요!”

“어머나. 정말인가요?”

나는 꽃을 그리며 낙서하던 종이를 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아이샤가 할딱거리며 상기된 얼굴 로 끄덕였다.

“네, 네! 그리고 오라버니가 지금 바로 시간이 된다고 하는데, 괜찮으 시면 가보시겠어요?”

“좋아요. 물론이죠!”

나는 기꺼이 조향실 문을 나섰다.

리키우스의 약초 가게는 상점가가 아닌 고급 저택 지구에 있었다.

귀족들의 저택이 드문드문 늘어선

한가한 거리 한가운데. 약초 가게라 기보단 부유한 귀족의 별장 같은 건 물이 우리를 맞이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마르고 신경질적 으로 생긴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아리엘 윈스턴 님이십니까. 리키 우스 플리에라고 합니다. 저희 아이 샤가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리키우스 씨. 전혀 그 렇지 않아요. 아이샤 씨 덕을 많이 보고 있는걸요.”

리키우스와 인사말을 나누면서도

내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 냄새……/

건물 전체에 은은하게 배인 약초 냄새-

코를 킁킁거리자 리키우스가 눈치 챈 듯 빙그레 웃었다.

“바로 레엘리우스를 가져다드리려 고 했습니다만, 약초에 관심이 많으 신 것 같군요. 괜찮으시다면 함께 창고로 가보시겠습니까?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고개 를 끄덕였다.

“네!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이리로 따라오시죠.”

우리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 았다.

곧 커다랗고 둥근 문이 나타났다. 리키우스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 너머로 나타난 세계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와아.”

사방에 허브들이 가득했다.

벽에는 꽃다발처럼 허브 다발들이 걸려 있었고, 여기저기에 허브가 잔 뜩 담긴 포대가 널려 있었다.

나는 번쩍거리는 눈으로 창고를 휘 둘러보았다. 시간만 된다면 이 안에 존재하는 모든 허브들의 향을 하나 하나씩 정성 들여 맡아보고 싶었다.

“레엘리우스는 특별한 곳에 따로 보관해 두어서요. 가져올 동안 잠시 창고를 둘러보시겠습니까?”

“정말요? 감사합니다! 조심히 둘러

볼게요!”

리키우스가 창고 안쪽으로 사라지 자, 나는 재빠르게 창고 한가운데로 걸어가 주변을 세세히 살피기 시작 했다.

멀리서 볼 때는 아무렇게나 채워 넣은 것처럼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허브들은 용도별로 완벽히 분류가 되어 있었다.

“아이샤 씨, 오라버니께서 수집욕 이 많으신가 봐요.”

“수집욕은 무슨요. 물욕이에요, 물

욕. 저희 오빠 이거 다 돈 벌려고 하는 일이거든요.”

“정말요? 단순히 돈 때문이라면 이 렇게 정성 들여 가꾸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아휴. 그건 사장님이 저희 오빠 돈 욕심을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이 에요.”

아이샤가 한숨을 내쉬며 푸념하는 동안, 나는 희귀한 허브들을 몇 발 견했다. 레엘리우스나 트레아처럼 희귀한 건 거의 없었지만, 동네 약 초방이나 꽃집에선 사지 못할 만한 값비싼 재료들이 많았다.

‘단골 되고 싶다

절로 그런 욕구가 치밀었다.

헤어지기 전에 잘 구슬려서 거래 계약을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레엘리 우스를 찾으러 갔던 리키우스가 돌 아왔다.

“여기 있습니다, 아리엘 님.”

돌아온 리키우스의 손엔 성인 남성

손 두 개 크기의 상자가 들려있었다.

상자를 연 리키우스가 내용물을 확 인시켜 주었다.

“원하시던 것이 맞으십니까?”

그 안엔 황금빛을 발하는, 종을 거 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생김새의 허 브가 누워 있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향을 맡았다.

“……하아.”

눈을 감고 잔향까지 음미한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 맞아요. 틀림없는 레엘리우스 네요. 당장 구매하고 싶어요.”

“어제 다프네 산 약초꾼에게서 직 접 거금을 주고 산 아이인데, 곧장 임자를 만났군요.”

우리는 곧장 거래를 시작했다.

리키우스가 제시한 금액은 5만 비 스였다.

솔직히 허브 하나에 지불하기엔 식 은땀이 날 정도로 큰 금액이긴 했지

만, 다름 아닌 델레이나에게 진상하 기 위한 허브였다.

게다가 황궁 정원에 아이리스가 심 긴 뒤부터 얻었던 여러 부수 효과들 을 생각해 보면 그리 돈이 아깝게 느껴지진 않았다.

‘2호점 준비하느라 돈을 탈탈 쏟아 붓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쓸 땐 써 야지.’

“좋아요. 거래하죠.”

단숨에 레엘리우스와 수표의 주인

이 뒤바뀌었다.

“또 찾아주십시오, 아리엘 님. 좋아 하실만한 물건들을 많이 들여놓겠습

니다.”

떠나려는 내게 리키우스가 말했다. 아무래도 시원시원한 거래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작업실로 돌아가며 나는 아이샤에 게 속삭였다.

“아이샤 씨. 좋은 오라버니를 두셨 네요.”

“엥? 그 돈만 밝히는 인간이 좋은 오라버니라고요? 사장님한테도 돈 한 푼 안 깎아주는 거 보셨잖아요?”

아이샤가 납득하지 못하며 진저리 를 쳤다.

나는 웃으며 품에 안고 있는 레엘 리우스 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작업실 건물로 돌아가자, 직원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레엘리우스를 구하러 나갔다는 소문

이 퍼진 모양이었다.

“구하셨나요, 사장님?”

라비와 플렉이 달려왔다. 나는 자 랑스레 상자를 내밀어 보였다.

“그럼요!”

“우와!”

나는 직원들의 빛나는 눈길을 받으 며 레엘리우스 상자를 개봉했다. 알 싸하면서도 황홀한 향기가 은은히 피어올랐다.

“그럼 작업을 시작해 볼까.”

레엘리우스를 만져 본 지도 벌써 삼 개월 전이었다. 클레어가 ‘사랑 에 빠지는 향수’를 의뢰하러 찾아온 때가 초봄이었으니까.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나는 레시 피를 점검했다.

조향 작업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화이트 머스크와 장미가 들어가는 건 저번과 같았고, 차별점을 주기 위해서 일랑일랑과 백합을 추가했 다.

강렬한 일랑일랑의 향기는 레엘리 우스의 산뜻하면서 매혹적인 향을 놀랄 만큼 잘 보조해 주었다.

“사장님께서 엄청 집중하고 계셔.”

“눈도 안 깜빡이시는 거 같은 데…… 괜찮으실까?”

“쉿. 집중하실 수 있도록 조용히 해.”

직원들이 속닥거리는 소리도 들리 는 것 같았지만, 귀에 들어오진 않 았다.

“우린 사장님 일하시는 동안 잔 일 거리들을 해치워 놓자.”

“좋아. 바닥도 쓸고, 기구들도 청소 해 놓자고.”

나는 해 질 녘 즈음에야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일주일만의 휴일이 거의 다 지나간 뒤였다. 창 바깥으로 보랏빛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뭔가 모자라.”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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