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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95화 (95/153)

〈96 화〉

그로부터 며칠 뒤.

내심 고대하고 있던 것이 도착했다.

“아가씨, 아가씨!”

리나가 상기된 목소리로 외치며 달 려 왔다.

“꺅!”

달려오던 리나가 휘청거렸다. 바닥 에 튀어나온 못에 발이 걸린 모양이 었다.

나는 얼른 달려나갔다.

“리나! 괜찮아?”

“괜찮으십니까.”

“저희가 보겠습니다.”

내가 다가가기도 전, 기사들이 먼

저 리나에게 몰려들었다.

바닥에 튀어나온 못을 본 제이크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못대가리가 돌출되어 있군. 하마 터면 큰일이 날 뻔했어. 어째서 여 태 발견하지 못했지?”

“죄송합니다, 부단장님.”

“면목 없습니다, 부단장님. 죄송합 니다, 아리엘 님.”

기사들이 내게 꾸벅 사죄를 해 왔다.

“아니, 사과하실 일은 아닌데……,”

“멀뚱히 서서 뭣들하고 있나. 당장 수리를 시작하지. 공구를 가져와라, 휴고.”

“예!”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튀어나온 못은 곧 완벽히 제 자리에 박혀들어갔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나는 이마 를 문지르며 리나에게 물었다.

“리나, 아까 뭐라고 했어?”

“아, 참! 황실에서 초대장이 도착 했어요!”

“황실에서?”

리나가 얼른 초대장을 가져다주었다.

“네! 방금 어떤 사람이 델레이나 황녀님의 명을 받고 왔다면서 초대 장을 전해주고 갔어요.”

“델레이나 황녀님?”

나는 빠르게 초대장을 열었다.

과연 그 안엔 기대하던 내용이 적 혀 있었다.

다가오는 델레이나 황녀의 생일 연

회에 나를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좋아. 좋아.”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조대장을 접 었다.

드디어 델레이나 황녀에게 은혜를 갚을 날이 온 것이다. 이왕이면 오 해도 풀 수 있으면 좋고.

“아리엘 아가씨, 이제 황궁 연회에 월례행사처럼 참여하시네요. 정말 대단하세요!”

리나가 존경스러운 눈으로 나를 올 려다보았다. 나는 쓱쓱 리나의 머리 를 쓰다듬어 주었다.

“운이 좋았지, 운이. 음, 어디 보 자. 황녀님께 어떤 선물을 드리면 좋을까……『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선물을 하고 싶었다. 내 선물을 받 은 델레이나가 어깨를 으쓱일 수 있 을 만한 그런 선물을.

“경들께서는 좋은 아이디어 없으세

요? 황녀님께 드릴 생신 선물 아이 디어요.”

끄응 고민하던 휴고가 말했다.

“저는 얼마 전 멜른의 생일에 말 편자를 선물했습니다.”

“전 검을 손질할 숫돌을 선물했습 니다.”

제이크가 매서운 눈으로 두 기사를 노려보았다.

“편자, 숫돌? 그걸 네놈들은 지금

말이라고 하나! 죄송합니다, 아리엘 님. 변변치 못한 부하들을 두었습니다.”

침통한 얼굴로 사과한 제이크가 말 했다.

“들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델레이나 황녀님께서는 이국적인 것들을 좋아 하신다고 합니다.”

“이국적인 것들요?”

“네. 선인장이나 낙타 털로 만든 양탄자처럼 벨레르에선 볼 수 없는 것들로 방을 장식하기를 좋아하신다 더군요. 여행도 좋아하시고요.”

“ 오호.”

나는 심각한 얼굴로 턱을 쓸었다.

이국적인 것들이라.

“황녀님께서 특별히 좋아하시는 나 라가 있나요?”

“그건 제가 압니다, 아리엘 님.”

멜른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정말인가요?”

“옙! 듣기로 저번 겨울엔 탄자리에

다녀오셨다고 합니다. 여름엔 세나 스를 다녀오셨고요. 그리고 아카데 미 시험이 끝난 뒤엔 워프 포탈을 타고 유페리아로 다녀오시기도 하셨 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소식은 어디서 들은 거냐?”

휴고가 신기한 눈으로 멜른을 쳐다 보았다.

“제국 일보 가십 코너요.”

“검을 잡는 이가 가십거리에 시간 을 쏟다니.”

휴고가 한심한 듯 눈을 가늘게 뜨 자, 멜른이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다.

“하지만 제국 정세 동태를 파악하 는 데 유용한 신문입니다. 최근엔 아리엘 님의 기사도 그 신문에 실렸 었습니다. 이 가게의 훌륭함을 아주 객관적으로 기술했더군요.”

“그래?”

휴고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좋은 신문이군. 방금 발언은 철회 하지.”

내 가게 기사와 제국 정세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텐데……,

기사들의 대화는 다소 정신없었지 만, 소득은 있었다. 델레이나가 이국 적인 나라로 여행하길 즐긴다는 것.

나는 제이크와 멜른을 향해 엄지를 치켜올려주었다.

“좋은 정보 고마워요. 제이크 경. 멜른 경.”

“도움이 되었다면 영광입니다.”

제이크와 멜른이 절도 있는 동작으

로 손을 가슴에 올렸다.

‘좋아. 황녀님께 드릴 선물 아이디 어는 떠올랐고.’

문제는 그걸 전부 오늘 안에 만들 어낼 수 있느냐였다.

다행히 오늘은 일주일에 한 번 있 는 휴일이었다.

나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곗바 늘이 아침 열 시 이십 분을 가리키 고 있었다.

‘빠듯하긴 한데…… 지금부터 서두

르면 될 것도 같아.’

나는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 다.

“리나, 나 작업장에 다녀올게.”

“아가씨! 또 휴일에 일하시려고 요?”

리나가 경악한 얼굴로 말했다. 나 는 싱긋 웃음으로 답하곤, 콧노래를 부르며 겉옷을 걸쳤다.

부 쑤 쑤

나는 레시피 수첩을 바라보며 고개 를 갸웃거렸다.

델레이나에게 건넬 선물의 얼개는 정했다.

선물은 총 세 개의 향수였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아이디어는 완벽했 다.

문제는 세 개나 되는 향수를 새로 연구할 시간이 없다는 거였다.

다행히 내겐 미리 적어둔 레시피들 이 많았다. 아직 판매한 적은 한 번 도 없는, 갓 캐낸 채소처럼 싱싱한 레시피들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향수는 이걸로 하자.’

나는 레시피 수첩을 뒤적이며 메모 했다.

첫 번째 향수는 정열적인 사막의 나라 ‘탄자리’를 컨셉으로, 두 번째 향수는 거대한 폭포로 유명한 휴양 지 ‘세나스’를 컨셉으로 삼기로 했 다.

두 장소는 떠오르는 이미지가 뚜렷 한 만큼 향수의 레시피를 정하기도 쉬웠다.

탄자리를 상징할 향수는 자극적인

사프란을, 세나스 향수는 민트를 메 인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문제는 마지막인데……/

나는 펜대로 톡톡 뺨을 두드렸다.

마지막 향수는 다른 둘보다 특별했 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었다.

나는 아이디어를 적어놓은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지막 향수의 컨셉은 ‘유페리아’ 였다.

사랑의 섬 유페리아.

대륙 최대의 휴양지로 유명한 유페 리아는, 연인들의 낙원으로도 불렸 다.

사시사철 상쾌한 날씨와 에메랄드 빛 바다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곳. 샤를로트가 이번 여름에 다녀온 곳 역시 유페리아였다.

신혼부부들 대부분이 그곳으로 신 혼여행 가기를 선호할 만큼 유페리 아는 어딜 가든 하트 장식과 사랑스 러운 분홍빛이 가득한 섬이라고 한 다.

‘난 안 가 봐서 잘 모르겠지만, 샤 를로트가 그렇게 말했었지.’

언젠가 나도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긴 했다.

무엇보다 섬 중앙의 호수에 가득 피어 있다는 라플레시아가 궁금했 다. 그 커다란 꽃에서 흘러나오는 향기가 황홀하리만치 향기롭다던 데……,

‘아, 집중. 집중해야지.’

나는 다시 수첩을 톡톡 두드렸다.

아무튼 유페리아 하면 떠오르는 단 어는 단연코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유페리아를 상징할 향수 역시 ‘사 랑’이란 감정을 담아야만 했다.

“사랑. 사랑, 사랑……-”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사랑이요, 사장님?”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 라 옆을 바라보았다. 휴일인데도 연 습을 하겠다며 작업장을 찾아온 기 특한 직원, 아이샤였다.

“엇, 놀라셨어요? 죄송해요. 전혀 눈치 못 채신 걸 보니까 엄청 깊이 생각에 잠겨 계셨나 봐요.”

아이샤가 보라색 눈망울을 찡긋거 리며 말했다.

“어떤 분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 어요, 사장님?”

“새 향수 레시피 생각하고 있었는 데요.”

내가 눈을 끔뻑이며 대답하자, 아 이샤가 사랑스럽게 웃으며 은근슬쩍

가까이 다가왔다.

“계속 ‘사랑’이라는 단어를 중얼거 리고 계시던데……

아이샤는 무언가 기대 가득한 얼굴 로 나를 초롱초롱 바라봤다.

“헤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대 체 사랑이란 뭘까, 하는 철학적인 고민이 자꾸 들죠. 저만 그런 줄 알 았는데, 사장님도 같으신가 봐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향수 레시 피 고민 중이었다니까요. 아, 그래.

온 김에 이리 앉아 볼래요?”

아이샤가 신이 나선 얼른 내 맞은 편에 앉았다.

나는 아이샤를 향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아이샤 씨는 ‘사랑’ 하면 어떤 이 미지가 떠올라요?”

“음, 핑크색……? 장미?”

아이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 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받아적었다.

“좋아요. 계속 말해 봐요.”

“음, 음…… 화이트 머스크! 그리 고 자스민 향기요!”

그렇지, 그렇지. 나는 아이샤의 대 답을 적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음?’

정신없이 받아적은 종이를 돌아본 나는 문득 눈썹을 찌푸렸다.

‘이 조합, 뭔가 눈에 익은데?’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빠르게 레시피 수첩을 뒤졌 다. 팔락팔락 소리를 내며 페이지가 경쾌하게 넘어갔다.

곧 찾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엘리우스 향수!”

“네‘?”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아이샤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홱 고개를 들곤 아이샤에게 말했다.

“성 카트린의 축일 때 만들었던 향 수예요. 레엘리우스를 메인으로 한!”

‘사랑에 빠지는 향’을 만들어 달라 는 의뢰 때문에 나를 골머리 앓게 했던 그 향수.

“레엘리우스라면 그 엄청 희귀하다는 허브요? 와, 어떻게 얻으셨어요?”

아이샤의 보랏빛 눈에 흥미로운 빛 이 번쩍거렸다.

“안 그래도 향이 좋기로 유명한 허

븐데, 사장님께서 그 허브로 향수를 만드셨다면 엄청난 작품이 탄생했겠 네요! 혹시 시향을 해볼 수 있을까 요?”

“안타깝지만, 남은 게 없답니다. 그 때 의뢰한 손님을 위해 딱 하나만 제작했던 거라서요.”

하지만 레시피는 아직 남아있지-

나는 그때 사용했던 레시피를 들여 다보았다. 아까 아이샤가 말했던 장 미와 화이트 머스크, 자스민과 익숙 한 재료들이 눈에 띄었다.

‘이걸 조금 손보면……/

유페리아 섬의 에메랄드 빛 바다를 상징하는 씨솔트와 따스한 남쪽 날 씨를 떠올릴 일랑일랑……,

열심히 아이디어를 받아 적는데 옆 에서 아이샤가 말을 걸어왔다.

“사장님, 사장님.”

“네?”

나는 펜대를 움직이며 입만 열어 대답했다.

“지금 적으시는 레시피는 저희 가 게의 새 상품인가요? 아니면 다른 분께 선물하실 건가요?”

“선물이에요.”

어떻게 알았지?

아이샤는 의외로 눈치가 빠른 모양 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보 듯 아이샤를 쳐다보았다.

은근슬쩍 가까워진 아이샤가, 책상 에 팔꿈치를 괴어 꽃받침을 하곤 물 었다.

“중요한 분께 선물하시려는 건가 봐요? 레엘리우스처럼 귀한 재료를 고려하시는 걸 보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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