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94화 (94/153)

〈95 화〉

# 오 쓰

“ 0 으” —르.

나는 멀어지는 세드릭을 바라보며 침음을 내뱉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아니, 세드릭 전하 말이야. 어제부

터 뭔가 좀 이상해지신 것 같아.”

“네? 전하께서요?”

“으으음, 뭐랄까. 날 깨지기 쉬운 향수병처럼 다루신달까.”

어제 식사자리에서도 뭔가 좀 이상 했다.

세드릭은 내게 필요 이상의 매너를 발휘했었다. 스테이크를 전부 다 잘 라 준다든지, 후식으로 나온 과일의 자잘한 씨마저도 모조리 해체해서 준다든지.

“내 과민반응인가?”

“음, 호위 기사를 갑자기 다섯이나 보내신 게 신기하기는 해요. 정말 저분들께서 앞으로 아리엘 님과 가 게를 지켜주시는 건가요?”

“글쎄, 그런가 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응접실에선 에른이 다섯 명의 기사 들을 도열시킨 뒤 그 앞에서 브리핑 을 하고 있었다. 가게의 구조와 주 의해야 할 것 등을 알려주는 것 같 았다.

그리고 기사들은 잔뜩 기합이 든 채, 존경심 가득한 얼굴로 에른의

브리핑을 듣고 있었다. 에른은 기사 단 소속은 아니지만, 세드릭의 직속 호위 기사였던 과거 때문인지 모두 의 존경을 받고 있는 듯했다.

기사들을 구경하는 동안 어느덧 시 계가 아침 아홉 시를 향했다. 직원 들이 속속들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오픈 준비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 아 나는 가게 문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좀 있기는 했 지만, 어쨌든 오늘 역시 활기찬 하 루의 시작이었다.

호 호

황금 같은 점심시간, 멜리사가 가 게를 찾아왔다.

“멜리사 양!”

나는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멜리 사가 생긋 웃었다.

“반가워요, 아리엘 양. 인터뷰는 생 각해 봤어요?”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다니,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인터뷰는 좀 부담스러워요. 향수면 몰라도, 저 자신에 대해선 딱히 할 말이 없는걸요.”

“어머. 질문은 제가 알아서 짜 갈 거예요. 아리엘 양은 있는 그대로 대답만 해 주면 되는걸요.”

멜리사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향기 살롱’ 특집 1호가 불티나게 팔렸잖아요. 1호가 괜히 1호예요? 2 호가 있어야 1호지. 아리엘 양 인터 뷰로 시원하게 2호 한 번 가죠. 사

례금은 아주 두둑이 드릴게요.”

“하아.”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가게 재오픈과 동시에 멜리사의 특 집 기사가 나간 덕분에 매상이 많이 오른 건 사실이었다. 입소문만으로 는 첫날 그렇게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진 않았을 거다.

인터뷰를 하면 또 한 번 매상이 뛸 것은 확실해 보였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게 부담스럽긴 하 지만…… 생각해 볼 만한 일 같기는 했다.

“그럼 조금 나중에요. 당장은 말고, 나중에 다시 말씀해 주세요.”

“좋아요. 당장 조르진 않을게요. 대 신 나중에 시간 되실 때 꼭 인터뷰 하기로 약속하신 거예요?”

“네, 네.”

나는 멜리사와 마주 앉아 티타임을 즐겼다. 멜리사가 내 뒤를 흘낏거리 며 말했다.

“그런데 저분들은 누구예요?”

“……아. 임시 호위 기사분들이세요.”

나는 멜리사에게 휴고와 멜른을 소 개해주었다. 지금 멜리사와 티타임 을 갖고 있는 이 테이블을, 에른과 휴고 그리고 멜른이 삼각 편대처럼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에반스 기사단의 갑옷 같은데요?”

“음, 맞아요. 역시 눈썰미가 좋으시 네요.”

“어머, 그렇다는 건 에반스 전하께 서……?”

멜리사가 은근한 눈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뱉으며 물었다.

“멜리사. 성흔이 없다는 게 그렇게 걱정할 만한 일인가요?”

호위 기사를 다섯이나 데려올 정도로?

뜬금없는 질문에 멜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성흔이요? 으음, 글쎄요. 성 흔이 없으면 신성력을 받지 못하니 까 좋은 일은 아니지만…… 요즘 세 상엔 그렇게 큰일 날 일도 아니지

않나요? 의술이 워낙 발달해서 신전이 아니더라도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까요. 그런데 갑자기 성흔은 왜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세드릭이 이상해 진 건 신전에서 만난 날 이후부터인 것 같았다.

내게 성흔이 없다는 걸 안 그때부 터 날 싸고돌기 시작한 거다.

‘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건지.’

오히려 내가 그를 걱정해야 할 판

국에.

나는 아직도 칸이 왜, 어떻게 돌아 온 건지, 그자들이 다시 세드릭을 노 리고 있는 건지 알아내지 못했다.

‘다행히, 칸 이야기를 듣고도 세드 릭이 별 반응을 안 보인 걸 보면 괜 찮은 것 같기는 한데……/

내가 읽었던 원작과는 확연히 다른 전개 였다.

원작 속에서 세드릭은 분명, 칸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다 죽 여버 리겠다며 날뛰 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활자 속에서 읽었던 세드릭과, 지금 내가 알고 지내는 세드릭은 조금 다른 것 같아.’

아니, 확실히 달랐다.

원작 속의 세드릭은 지금보다 훨씬 차갑고 무뚝뚝한 느낌이었다. 그래, 딱 처음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처럼.

하지만 요즈음의 세드릭은 조금 달 랐다.

그는 농담도 자주 했고, 미소도 자주 지었다. 고질적인 병증 때문에 원작

에서 자주 보이던 거칠고 예민한 면 모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 내 특제 향수 때문에?’

나는 매번 개발하는 신상품들만큼 이나 아닉시아 향에도 심혈을 기울 이고 있었다.

가끔은 서비스로 기운을 북돋아 주 는 향이나 활력 향이 첨가된 향수를 끼워 주기도 했다.

조금 뿌듯한 기분이 들려 했지만, 나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어찌 됐든, 칸이 원작보다 훨씬 일찍 돌아왔으니, 먼저 손을 써야 해.’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세드릭이 원작처럼 폭군이란 칭호 를 얻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 다.

비단 원작에서 세드릭에게 대항하 다 죽어 나갔던 황궁 기사단원들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세드릭이 불행을 피할 수 있 다면 피하길 바랐다. 독자로서가 아 닌, 한 명의 지인으로서.

개 개 :1:

“아리엘 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멜리사가 내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 었다.

나는 그제야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죄송해요. 저희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죠?”

“뭐였더라. 아, 그래. 델레이나 황

녀 전하의 생신이 곧이란 이야기였 죠, 아마?”

“델레이나 황녀님의 생신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멜리사 가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리엘 양께선 황녀 님과 악연이 있죠?”

“네? 아뇨! 악연이라됴.”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인연이죠, 인연. 제가 황녀님께 얼 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데요.”

“은혜요?”

나는 멜리사에게 자초지종을 이야 기해주었다. 황궁 무도회에서 황후 와 델레이나를 만났던 일을.

“어머나, 황궁 정원에 아이리스를 재배하기 시작한 게 아리엘 양 때문 이었단 말이에요?”

멜리사가 감격한 눈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아리엘 양. 당신, 마케팅 하나는 천재적이네요.”

“에이,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뭐. 말씀드렸다시피 델레이나 황녀 님께서 황후 폐하께 계속 귀띔을 하 셨기 때문이라니까요.”

델레이나 덕에 아이리스는 황궁 정 원에서도 재배되는, ‘품격 있는 꽃’ 이 되었다. 델레이나의 의도가 어떻 든 간에 내가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황녀 전하의 생신 파티 때 저도 축하드리러 가야겠어요.”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은혜를 입 었으니 보답을 하는 게 맞았다.

멜리사가 으음, 하고 고개를 기울였 다.

“글쎄요. 황녀님께서 아리엘 양을 초대하실까요?”

“……그분께서 절 그렇게 싫어하세 요?”

설마 봄의 제전에서 자기 측근을

이겼다고 그러는 건 아닐 테고.

정말 세드릭 때문인가? ……내가 세드릭과 친해 보여서?

‘브라더 콤플렉스가 심한 분이신가.’

“싫어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 도 좋아하지는 않으실걸요. 하긴, 뭐 모르는 일이죠. 황녀님이 아카데미 에서 돌아오신 뒤로 첫 생신 파티니 까 초대하실 지도요. 엄청 성대하게 열린다던데……,”

“귀족들도 많이 초대받겠네요?”

“네, 그렇겠죠. 운이 좋다면 아리엘

양도 그사이에 끼실 수 있을지도 몰 라요.”

잠시 생각하던 멜리사가 덧붙였다.

“델레이나 황녀님께서 사교계 입지 를 넓히고 싶으시다면, 당연히 아리 엘 양을 초대할 거예요. 아리엘 양, 한 달이나 두문불출한 뒤로 아직 무 도회엔 전혀 참석한 적 없죠?”

“음, 네. 시간이 안 나서요.”

“다들 오랫동안 사교 행사에 참석 하지 않은 아리엘 양이 어떤 가문의 행사에 가장 먼저 참여할까, 궁금해

하고 있어요. 제가 황녀님이라면 소 문의 주인공이 될 기횔 놓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하하, 희망적인 말씀 감사해요.”

나는 멜리사의 말을 웃어넘겼다.

내가 만든 향수면 몰라도, 내가 그 렇게까지 사교계에 영향을 미친다 고?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멜리사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아리엘 양이 요즘 사교 행사에 참 여하지 않아서 잘 모르는 거예요.”

“네?”

“요즘도 청자색이 레이디들의 패션을 지배하고 있는 걸요.”

나는 뺨을 긁적였다. 내 가게를 찾 는 손님들 중에도 아직 청자색 소품 을 지닌 사람들이 많기는 했다.

‘아, 역시 이런 화제는 좀 부담스 러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찻잎 향이 참 좋네요.”

“흐음. 아리엘 양은 향수 칭찬은 온종일이라도 들으려고 하면서, 자 기 칭찬은 못 들은 척하더라고요?”

“……그런 적 없어요.”

그렇게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점심 시간이 곧 끝났다. 멜리사를 배웅하 기 위해 가게 밖으로 나서자, 직원 들이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좋은 오후입니다, 사장님.”

“네! 좋은 오후예요.”

웃으며 대답하자 직원들이 더 환한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뭐지? 오늘따라 다들 행복해 보이 는데.’

원래 이맘때쯤 직원들의 표정은 딱 딱하고 사무적이었다. 끝도 없이 밀 려드는 손님들을 아침부터 관리했을 테니 피곤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직원들의 얼굴엔 피로 대신 쾌적한 미소가 떠 올라 있었다.

시선을 돌린 나는 곧 이유를 깨달 을 수 있었다.

에른처럼 갑옷을 껴입은 기사 셋이 줄을 지키고 있었다. 기사들의 허리 춤에선 휘황찬란한 칼자루가 빛을 발했다.

손님들은 그런 기사들을 힐끔거리 며 잡담조차도 목소리를 죽여 소곤 거렸다.

‘기사들 효과가 이렇게 좋을 줄이야.’

원래도 진상 고객이 나타나면 에른 이 전담해서 퇴치해주기는 했다.

사실, 퇴치랄 것도 없었다. 에른이 거대한 갑옷 차림으로 나타나는 순간,

지레 겁먹은 손님이 도망갔으니까.

그런 에른이 세 명으로 늘어나자, 이젠 퇴치할 필요도 없었다. 알아서 예방됐기 때문이었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직원들을 돌 아보았다. 직원들이 행복해 보이니 나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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