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화〉
“세드릭 전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신 거예요.”
“부담스러우십니까?”
세드릭이 그렇게 물으며 내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곤 얼토당토않게도 수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 무 걱정된다는 듯이.
나는 본능적으로 경계 태세를 올렸 다. 세드릭이 저런 표정을 지으면
마음이 약해지곤 했으니까.
때마침 막 떠오르는 아침 해가 세 드릭을 비췄다. 비스듬히 떠오른 태 양이, 세드릭 쪽으로 기다랗게 그림 자를 그리며 기가 막힌 분위기를 자 아냈다. 나는 순간 홀린 듯 그 광경 을 바라보았다.
세드릭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저, 레이디가 걱정되어 서……『
갑자기 나도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 다.
뭔진 몰라도 내가 잘못한 것 같았 다. 세드릭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한 내가 나쁜 것 같았다.
‘아니. 잠깐만!’
나는 얼른 고개를 탈탈 털어냈다. 또 저 얼굴에 말려들 뻔했다.
“거…… 걱정이 된다 하셔도 이건 절 과보호하시는 거예요. 이건 정말 심각한 인력 낭비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레이디.”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전 그저 레이디의 후원자로서 해 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인걸요. 어제 같은 범죄자가 또 출몰한다면…… 후우,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하군 요.”
세드릭이 정말 염려스럽다는 듯 한 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세드릭 에반스가 나를 이렇게 끔찍하게 생각했다고? 기가 찼다.
내 표정을 흘긋 살핀 세드릭이 또
눈을 내리깔았다.
“물론 레이디께서 끝까지 거부하신 다면, 제가 계속 강요할 수는 없겠 죠.”
“하지만, 비단 어제 일 때문만은 아닙니다. 봄의 제전 때부터 레이디 의 이름이 폭발적으로 알려지지 않 았습니까?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 서라도 레이디의 호위를 더 강화해 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세드릭이 잠시 말을
멈췄다.
막 떠오른 태양보다 붉은 눈동자가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았다. 세드릭 의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그래도 부담스러우십니까?”
아침 해가 세드릭의 눈동자 안에서 일렁였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두 개의 목 소리가 머릿속에서 싸웠다.
‘괜찮지 않을까? 부담스럽긴 하지
만 내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니까.’
1번 목소리를 2번 목소리가 곧장 반박했다.
‘아니,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기사를 다섯이나 붙였다니까, 다섯 이나! 너무 과잉보호 아냐? 세드릭 에반스가 어제부터 좀 이상해졌다 고!’
그러자 1번 목소리가 대수롭지 않 게 대답했다.
‘에이, 진짜 걱정되나 보지. 어제 맥스웰이 난동부리는 거 코앞에서 봤잖아. 무엇보다, 너 저 얼굴에 대 고 싫다고 말할 수 있어? 네 호의 따위 부담스러우니까 다 데리고 돌 아가라고 말할 수 있냐고.’
2번 목소리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나는 세드릭의 얼굴에 약했 다.
당분간만이 라면요.”
요즘 손님이 너무 몰린 나머지 곤 란한 일이 종종 생기긴 했으니까.
직원들이 잘 대처해주고는 있었지 만, 험악한 일이 아예 벌어지지 않 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자 세드릭이 환하게 웃었다. 언제 처연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이.
“감사합니다. 그럼 곧장 배치를 시 작하겠습니다.”
“예, 뭐……-”
“에라스. 지붕을 조사해. 휴고, 에 이든은 울타리를 조사하고. 제이크
는
내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드릭 이 지시를 시작했다. 나는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사분들께서 굉장히, 음…… 행 동력이 좋으시네요.”
“고도로 훈련받은 자들이니 레이디 께 누가 되지 않을 겁니다.”
세드릭이 나를 향해 싱긋 멋진 미 소를 지었다.
“예
지붕에 올라간 에라스 경을 보니 갑자기 마음이 착잡해졌다.
에반스 기사단 1소대에 속할 정도 면 굉장한 실력자일 텐데. 그런 인 재가 내 지붕 위에서 낭비되어도 되 는 걸까……오
“아가씨, 아침 다 준비 되었… 히 익?”
가게 문을 열고 나온 리나가 기사
들을 맞닥뜨리곤 소스라쳤다. 기사 들이 무해함을 주장하듯 두 손을 들 고 리나를 안심시켰다.
“저희는 아리엘 님의 호위 기사입 니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그, 그, 그러시군요……?”
리나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나는 작게 한숨 쉬며 이따 설명하겠다고 말했다.
리나 뒤로 달콤한 음식 냄새가 흘 러나왔다.
나는 예의상 세드릭에게 물었다.
“혹시 아침 식사는 하셨나요?”
“아뇨.”
“……아.”
설마 공복일 줄은 몰랐는데, 생각 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얼 떨결에 권했다.
“어, 그럼 같이 식사 드시겠어요?”
“초대해 주시는 겁니까? 감사합니 다.”
세드릭이 기다렸다는 듯 대번에 내 권유에 응했다. 나는 리나에게 눈짓 으로 물었다.
‘전하 드실 것도 있어?’
‘있긴 한데요, 입맛에 맞으실지는 잘……/
안 맞으면 어쩔 수 없지, 뭐. 나는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들어오세요. 요리가 입에 맞으실 진 모르겠지만 대접할게요. 기사님 들께서는……/’
“저희는 괜찮습니다, 아리엘 님. 신 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이크가 듬직하게 웃곤 다시 작업 에 열중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 며 세드릭을 안으로 들였다.
보호호
“거긴 좀 어때, 에라스?”
울타리 보수 작업을 간단히 끝마친 휴고가 물었다. 에라스가 고개를 들 었다.
“응, 지붕은 상한 곳이 없는 것 같 아. 적이 지붕으로 침투하지는 못하 겠어.”
“그렇군. 그나저나 아까부터 뭘 그 렇게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응? 아니야.”
에라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휴고가 수상한 눈빛을 하곤 지붕을 올랐다.
에라스 곁으로 다가간 휴고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지붕에 난 채광창으 로 식당이 들여다보였다.
“너 전하와 아리엘 님을 훔쳐보고 있었어?”
“뭐?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에라스가 허둥지둥 손을 흔들었다.
“지붕에 채광창이 나 있으니까 보 안이 염려되어서 조사한 것뿐이야.”
“그런 것치고는 뚫어져라 쳐다보던 데.”
“아니, 그게…… 너도 좀 봐. 전하 께서 케이크를 드시고 계시다고.”
“ 뭐?”
휴고가 놀란 눈으로 채광창을 자세 히 들여다보았다.
식탁에서는 세드릭과 아리엘이 단 란하게 마주 앉아 있었다. 식탁 한 가운데에 위치한 스폰지 케이크를 본 휴고는 헉- 소리를 냈다.
“정말이잖아? 전하께서 케이크를 드시고 계셔!”
“게다가, 잘 봐. 생크림이랑 과일잼 도 엄청 뿌려져 있다고.”
“정말이군!”
휴고는 경악한 나머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세드릭은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에반스 기사단의 선임 기사인 휴고 도 세드릭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거 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세드릭이 단 것을 질색한다 는 것 정돈 알고 있었다.
“전하께서 아침으로 생크림 케이크 를 드시다니…… 다른 녀석들에게 말해도 절대 안 믿겠는걸.”
“아리엘 님도 놀라워. 아침부터 케
이크를 드시면 속이 느끼하지 않으 실까?”
“그러게. 어쩌면 연약하신 분이니 까, 케이크처럼 부드러운 것을 드셔 야 하는 건지도 몰라.”
“과연.”
에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어제, 1소대 다섯 명을 집합 시킨 세드릭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자네들은 레이디 한 명 을 호위하게 될 거야.’
‘수상한 것이 있으면 바로 처단해
라. 수습은 내가 할 테니까.’
세드릭은 무엇보다도 이 말을 당부 했다.
‘혹시나 레이디의 호흡이 불안정해 보이거나, 어딘가가 아픈 것처럼 보 인다면 즉시 절대 안정을 권하도록 해. 그리고 곧장 나를 불러라. 알겠 나?’
‘예, 전하!’
다섯 기사들이 잔뜩 기합이 들어간 채로 대답했다.
세드릭이 이렇게까지 당부한다는 건, 호위 대상이 굉장히 특별한 존 재임을 의미했다.
동시에 굉장히 연약한 분인 것 같 았다. 세드릭이 호위 대상의 건강을 신경 쓰라고 몇 번이고 신신당부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아리엘 님은 그렇게 연약 하신 분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무척 건강하고 활기차 보이 셨어.”
휴고의 말에 에라스가 고개를 끄덕
이며 동의했다.
“맞아. 혈색이 아주 좋으셨지. 하지 만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당부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야.”
“물론이야. 우리가 아리엘 님을 잘 보필해야지.”
당연한 일이었다. 섬기는 주인의 ‘특별한 사람’을 보필하는 건 기사 의 영광이었으니까.
“그런데 아까부터 어디선가 좋은 냄새가 나지 않아?”
“응. 맞아. 이 집 전체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
“아리엘 님에게서도 굉장히 향기로 운 냄새가 났는데. 너도 느꼈어?”
“응. 마치 꽃향기 같았어.”
“맞아. 그건 정말…… 꽃향기였지.”
기사들은 여태껏 꽃이나 향기에는 일말의 관심도 가져 본 적이 없었기 에 그 이상의 묘사는 할 수 없었다.
“어제 아내에게 선물했던 꽃에서도 그런 냄새가 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아내가 더 좋아했을 거야.”
“아리엘 님께 여쭤보는 건 어때? 어떤 향수를 쓰신 거냐고 말이야.”
“헉. 함부로 아리엘 님께 말을 걸 었다가 전하께서 화를 내시진 않을 까?”
“음. 그럴지도 모르겠군. 방금 말은 취소할게.”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오갔다. 휴 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마지막으로 파견 나갔던 도시는 사방에서 악취가 풍겼잖아.”
“맞아. 위생 상태가 최악인 곳이었
지.”
“거기에 비해서 이곳은 천국 같 아.”
에라스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 다. 그저 좋은 향기가 날 뿐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사르르 풀어졌 다.
“휴고, 에라스! 지붕 조사는 마쳤 나!”
부단장 제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휴고와 에라스가 얼른 몸을 곧추세
웠다.
“예, 부단장님! 지금 복귀하겠습니 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채광창 너머에 서는, 아리엘과 세드릭이 여전히 케 이크와 함께 커피를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