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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92화 (92/153)

〈93 화〉

“자작님, 절 불러세우신 용건이 그 게 전부이신가요? 죄송하지만, 임의 로 순번을 조정할 순 없어요.”

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맥스 웰이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자작님께서 오랫동안 제 가겔 찾 아주신 건 감사하지만, 가게가 넓어 질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말을 맺은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 였다. 이 정도면 맥스웰도 납득하고 물러나 주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하지만 아리엘 양도 요즘 절 못 봐서 괴롭잖아요?”

“ 네?”

“저번에 제가 바빠서 일주일이나 들르지 못한 적이 있었죠. 그때 아 리엘 양께선 상심한 나머지 한 달이 나 두문불출하지 않았습니까?”

“ 예?”

“전 아리엘 양이 또 그렇게 상심할

까 봐 걱정돼서 찾아온 것뿐입니 다.”

나는 멍하니 맥스웰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거 지?

전부터 맥스웰이 내게 이상한 쪽으 로 집착한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 사흘에 한 번은 일이 없어도 꼭 찾 아온다든지, 리나가 응대하러 나오 면 굳이 나를 부른다든지……오

하지만 이렇게 황당한 착각까지 하 고 있는 줄은 몰랐다.

‘망상 장애

맥스웰이 첫 만남에서 털어놓았던 병증이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작님. ……제가 한 달 동안 가 게 문을 닫았던 건, 자작님 때문이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그건 정정해 야 할 것 같아요.”

“……네?”

맥스웰이 멍한 눈을 했다. 나는 문 득 그의 눈에 초점이 없다는 걸 깨 달았다.

자극하지 말고 천천히 납득시켜 보 자. 나는 단어를 고르며 이어 말했 다.

“물론 자작님께서 제 향수를 좋아 해주시는 건 무척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향수’에 강세를 넣으며 말했 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작님께만 특혜 를 드릴 수는 없어요. 순번을 무시 하고 자작님을 우대한다면 다른 분 들께서 박탈감을 느끼실 테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말까지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입을 열 었다. 확실히 해 둘 건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전 자작님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아요.”

나는 간결한 어조로 그 말을 전했 다. 맥스웰이 납득해 주기를 바라며.

맥스웰은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입을 헤 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들은 말이 잘 이 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개인적인 감정이 없다고? 그럴 리 가. 항상 제가 오길 기다리셨잖아 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자작 님께 개인적인 감정을 가진 적이 없 답니다.”

“말도 안 돼. ……그럼, 아리엘 양

에게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맥스웰이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텅 빈 눈동자에 소름이 훅 끼 쳤다.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려던 때였다.

맥스웰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 게서 이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 다.

“내 덕분에… 내 덕분에 잘나가게 된 거면서……

“네? 뭐라고 하셨어요?”

맥스웰의 목소리가 너무 작고 어두 워서 잘 들리지 않았다.

맥스웰은 한참 더 혼잣말을 중얼거 렸다. 말의 내용은 들리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세드릭이 검집에 손을 대는 게 보 였다. 그리고 동시에, 갑자기 맥스웰 이 홱 고개를 쳐들었다.

“배은망덕해! 좀 유명해졌다고 이 제 난 모른 척하겠단 거지!”

맥스웰이 눈을 까뒤집고 내게 달려

들었다. 뒤집힌 흰자에 놀란 나머지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세드릭이 재빠르게 내 앞을 가로막았다.

“끄억!”

세드릭의 손날이 맥스웰의 후두부 를 가격했다.

정확히 급소를 당했는지, 맥스웰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졌다.

쓰러지면서 맥스웰이 팔이 내 쪽을 향했다. 세드릭이 얼른 맥스웰의 몸 을 걷어찼다.

걷어차인 맥스웰이 볼품없이 땅바 닥에 쓰러졌다. 세드릭이 나를 돌아 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괜찮은데……?

“신경안정제를 과다하게 복용해 발 작한 것 같습니다. 눈을 보고 상태 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진작 처리할 것을……, 제 불찰입니 다.”

세드릭이 쓰러진 맥스웰을 경멸스 럽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신 것 맞습니 까?”

세드릭이 고개를 살짝 숙여, 나를 걱정스레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것은 맞았다. 맥스웰이 그렇게 갑자기 달려들 줄은 꿈에도 몰랐으 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맥스웰은 내 털

끝 하나 건들지 못했다. 조금 놀랐 을 뿐,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괜찮아요, 전하.”

“정말입니까?”

세드릭이 재차 물었다.

“숨이 가쁘다거나, 머리가 아프진 않으시고요?”

“네? ……아뇨. 깜짝 놀랐다고 머 리가 아플 정도로 허약하진 않은걸 요.”

“다행입니다.”

세드릭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정말.”

세드릭이 두 번이나 되풀이해 말했 다. 그러자,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 었다. 이렇게까지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쓰러진 맥스웰을 돌아본 세드릭이 으르렁댔다.

“감히 레이디를 놀라게 한 죄를 물 어 저 버러지는 지하 감옥에서 십 년은 썩게 하겠습니다.”

“네? 잠시만요.”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맥스웰을 지하 감옥에 넣기 전에 정신 병원에서 치료부터 받게 해야 하지 않을까?

“부족하십니까? 아니면 당장 원양 어선에 던져 버릴까요?”

“잠깐. 진정하세요.”

나는 간신히 세드릭을 말렸다.

세드릭의 반응만 보면 맥스웰이 내 게 칼이라도 들이댄 것 같았다. 나 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째 저보다 전하께서 더 놀란 것 같으세요. 전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 니까 진정하세요, 전하.”

세드릭이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자. 일단 마차로 돌아갑시다. 올려 드릴 테니 제 손을 천천히 잡으십시

오.”

세드릭이 말했다. 염려가 가득 배 인 목소리로.

‘……뭐지.’

음, 조금 이상한 소리기는 한데.

어쩐지 아까부터 세드릭 에반스가 나를 과보호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드릭의 손을 짚고 마차 위로 오 르면서 나는 또 위화감을 느꼈다.

세드릭은 항상 신사다운 매너를 발

휘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조심스 럽지는 않았다. 나를 마차 위로 올 리는 손길은 설탕 과자를 다루듯 신 중했다.

‘괜한 착각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차 위에 다시 안착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가게 문을 열 기 전 가벼운 아침 산책을 나섰다.

‘ 응?’

정확히는, 나서려고 했다. 내 문 앞에 도열한 다섯 명의 기사를 보기 전까지는.

“……누구세요?”

제일 가까이 선 기사가 차렷 자세 를 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아리엘 님. 에반스

기사단 1소대 부단장 제이크라고 합 니다.”

“1소대 대원 에라스입니다.”

“1소대 대원 휴고입니다!”

“1소대 대원……/

줄줄이 이어지는 소개에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자기소개는 잘 들었는데, 내 가게 앞에 모여 있는 이유가 뭐라고?

“잠깐. 에반스 기사단이라고 하셨 나요?”

“예! 그렇습니다!”

“……설마 세드릭 전하께서 여러분 을 보내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제이크가 기합 들어간 목소리로 외 쳤다.

“다들 모였군.”

그때 뜻밖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기사들이 한꺼번에 경례를 했다.

“공작 전하! 안녕하십니까!”

“……세드릭 전하?”

나는 아직 잠에서 덜 깨 멍한 목 소리로 물었다. 세드릭이 싱긋 웃었 다.

“좋은 아침입니다, 레이디.”

“……예, 좋은 아침이긴 한데요. 전 하의 기사분들이 왜 제 가게 앞에 도열해 있던 건지 여쭤봐도 될까 요?”

“그야 당연히 레이디를 호위하기 위해서죠.”

“네?”

나는 눈을 끔뻑였다.

내 반응에 세드릭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놀라십니까?”

나는 기가 막혀 세드릭을 올려다보 았다. 갑자기 시커먼 기사 다섯 명 이 날 호위하겠다며 몰려와 있는데 어떻게 안 놀라?

“어제 식사 자리에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레이디.”

세드릭이 설득시키듯 나긋한 목소 리로 말했다.

나는 빠르게 어제 레스토랑에서 가 졌던 점심을 떠올려 보았다. 즐거운 시간이긴 했다. 음식도 맛있었고, 흘 러나오는 음악도 감미로웠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에반스 기 사단을 내 호위로 붙이겠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대체 언제 말씀하셨다는 건가요?”

“레이디의 안전을 위해 호위를 강 화해야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 까? 레이디께서도 분명 동의하셨고 요.”

생각해 보니 그런 대화가 오가긴 했다. 나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었 고. 맥스웰이 난동을 부렸는데 동의 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내가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하지만 에른 경이 있으니까 괜찮 지 않을까요? 방금도 전하께서 나서 주시지 않았더라면 에른 경이 막아

줬을 것 같고요.’

‘물론 그야 그랬겠지만, 만약 에른 이 여럿이라면 더 든든하실 것 같지 않으십니까?’

‘네, 뭐, 그건 그렇겠지요.’

아주 가볍게 던진 대답이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라고?

나는 황망한 눈으로 내 앞에 도열 한 다섯 명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저는 레이디께서도 제 의견에 동 의하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세드릭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 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에반스 기사단을 데려온다고는 말 씀 안 하셨잖아요!”

게다가 한 명은, 자신을 부단장이 라고 소개하지 않았나?

이건 심각한 인력 낭비였다. 에반 스 기사단이라면 황궁 기사단과 맞 먹을 만큼 우수한 인재가 모인 곳이 었다.

일개 조향사 한 명을 호위하기 위 해 차출될 인원들이 절대 아니었다.

“이건 다이아몬드로 아이스크림 스 푼을 만드는 수준의 인력 낭비라고 요!”

내 말에 어쩐지 기사들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세드릭이 물끄러미 기사들을 돌아 보았다. 그러자 자신을 부단장이라 고 소개했던 제이크가 얼른 입을 열 었다.

“인력 낭비라니, 당치 않으신 말씀 입니다. 부디 아리엘 님을 호위하는

영광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

나는 제이크를 설득했다.

“아니에요, 다시 생각해 보세요. 제 가 하는 거라곤 그냥 가게를 경영하 는 것뿐이에요. 경들께서 실력을 발 휘하실 일이 전혀 없다고요. 엄청 지루하실 거예요.”

“영광스러운 일은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제이크 경이 당차게 외쳤다.

날 호위하는 일이 대체 왜 영광스

러운 일이라는 거야?

난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세드릭이 기사들을 단단히 세뇌시킨 게 분명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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