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91화 (91/153)

〈92 화〉

“전하, 머리에 꽃잎이요.”

“……예?”

“여기요.”

나는 내 머리카락을 가리켜 보였 다. 세드릭이 자기 머리칼을 더듬었 지만 좀처럼 꽃잎엔 닿지 않았다.

“제가 떼 드릴까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나는 몸을 앞 으로 숙였다. 가까워진 세드릭이 살 짝 숨을 멈췄다.

“……네.”

“잠시만요.”

나는 팔을 들어 꽃잎을 집었다. 결 좋은 흑발이 손가락 사이로 스쳤다.

‘머릿결 좋네.’

매일 리나 표 레몬즙 탄 물로 머 리를 감는 나보다 좋은 것 같았다. 손가락 새로 머리칼이 스르르 빠져 나가는 감촉이 조금 아쉬웠다.

“이게, 새로 만드셨다는 그 향수입 니까?”

다시 몸을 뒤로 물리려는데 세드릭 이 물었다.

“네, 맞아요. 역시 바로 알아보시네 요.”

나는 활짝 웃었다.

문득 세드릭의 장점 중 하나가 떠 올랐다. 의외로 표현력이 좋다는 것.

세드릭은 〈파도가 전한 유리병〉 때도 엄청난 미사여구로 날 혼란에 빠뜨린 전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 다.

“마음에 드시나요?”

“고래 찌꺼기가 들어간 그 향수입 니까?”

“으음, 네. 단어 선택이 좀 적나라 하시긴 하지만 그 향수가 맞아요.”

“그렇군요. 좀 더 맡아봐도 되겠습 니까?”

“네? 아, 네. 물론이죠!”

내가 만든 향수를 꼼꼼히 시향해준 다는데 싫을 리가 없었다.

세드릭이 설핏 웃으며 물었다.

“향수는 주로 어디에 뿌리십니까?”

이건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다. 향 수를 뿌리는 방식은 사람마다 취향 이 극명하게 갈렸으니까.

나는 주로 머리카락에 뿌리는 방식 을 선호했다. 하지만 오늘은 양 손 목에 가볍게 뿌린 채 나왔다. 향수 마다 어울리는 방식이 따로 존재한 다.〈매혹의 미학〉은 스치듯 손목에 만 뿌리는 게 내 취향에 맞았다.

“오늘은 손목에 뿌렸어요.”

나는 오른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손을 들자 하늘거리는 소맷단이 흘 러내리며 손목이 훤히 드러났다. 세 드릭이 그리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군요.”

커다란 손바닥이 천천히 다가와 내 손목을 받쳤다. 세드릭이 느리게 고 개를 숙였다. 방금 어루만졌던 결 좋은 흑발이 턱 밑으로 가까워졌다.

세드릭의 코끝이 내 손목에 가볍게 닿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찰나 간 숨을 참았다.

잠시 뒤 세드릭이 고개를 들었다.

“특별하군요. ……향이.”

나를 올려다본 세드릭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한 템포 늦게 대답했다.

“그, 그렇죠. 저야 운 좋게 헐값으 로 샀지만, 사실 그 고래 찌꺼기가 되게 귀한 재료거든요.”

갑자기 왜 말을 더듬는 거지? 당 황스러움에 얼굴 위로 살짝 열이 올 랐다.

내 손목은 아직도 세드릭의 손바닥 에 감겨 있었다. 시선을 눈치챈 세 드릭이 내 손목을 놓아 주었다.

“아. 죄송합니다. 허락도 없이.”

세드릭이 순순히 사과해 왔다. 나 는 해방된 손목을 드레스 자락에 살 짝 문질렀다. 닿은 부위가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단 냄새네요.”

세드릭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 다. 내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혼잣 말 같았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엔 바닐라를 메인 컨셉으 로 잡아서……

이상했다. 어제만 해도 수많은 손 님들에게 입이 아프도록 향수 설명 을 되풀이했는데, 지금은 왠지 어색 한 기분이 들어, 말이 나오지 않았 다.

‘단 냄새, 라고.’

감상이라기엔 지나치게 짧았다. 손 님들이 건네주었던 칭찬과도 전혀 달랐다.

그런데도 어쩐지, 그 짧은 감상을 듣고 나자 피부가 간질거렸다.

내가 할 말을 찾기 위해 잠시 침 묵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히힝!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급정거 했다. 이어서 놀란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으(가I”

그와 동시에 몸이 기우뚱 기울었 다. 단단한 팔이 반사적으로 나를 받쳤다.

“뭐, 뭡니까?”

밖에서 마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 다. 말도 놀람이 가시지 않는 듯 여 전히 히힝거렸다. 하지만 난 밖을 내다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뻣뻣이 굳었다.

“괜찮습니까?”

세드릭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감싸 안은 자세 그대로.

“아리엘 양! 제발 나와 주세요!”

동시에 마차 밖에서는 누군가가 내 이름을 애타게 외쳤다.

“……제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데 요?”

내가 속삭였다.

속삭여야만 했다. 큰 소리를 내기 엔 세드릭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으니까.

세드릭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무시하시죠.”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예상하지 못 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황당히 되물었다.

“무시하라고요?”

“네.”

그때 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또 내 이름을 외쳤다.

“아리엘 양! 안에 계신 것 다 압니 다!”

잠깐. 이 목소리는.

나는 미간을 좁혔다. 알고 있는 목 소리였다.

‘내 가게 손님 중 하나인 것 같은 데.’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창밖 을 내다보았다. 내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이 느리게 떨어져 나갔다.

창밖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저 사람은…… 맥스웰 자작이잖 아?’

3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나는 그가 누군지 한눈에 바로 알아 볼 수 있었다. 바로 내 단골손님 중 한 명이었으니까.

맥스웰은 심한 신경성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 었다.

처음 내 가게에 들어왔을 때, 맥스 웰은 자신의 망상과 강박 증상을 털 어놓으며 도움이 될 향을 소개해 달

라고 부탁했었다.

그런 심각한 증세를 치료하려면 향 수 가게가 아니라 병원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나는 아칼리 꽃이 들어간 〈포근한 기억〉을 추천했다. 맥스웰 인 시향하자마자 곧장 향수를 구매 해갔고, 그 뒤로 단골이 되었다.

“나가실 겁니까?”

세드릭이 물었다. 희미하게 불만 어린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고객님 중 한 분이거든요. 급 한 일이 있으신가 봐요/

대로에서 마차를 억지로 세울 정도 면 엄청나게 급한 일인 것이 틀림없 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맥스웰은 가끔씩 영업시간이 아닐 때도 가게 문을 두드리곤 했다. 사 정이 급하니 한 번만 봐 달라면서. 그런 적이 지금까지 서너 번은 있었

지. 그때마다 별 대단한 사정은 아 니었고.

그렇긴 하지만, 달리는 마차를 잡 아 세울 정도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급한 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

마차에서 내리자 맥스웰의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계셨군요, 아리엘 양! 마차 를 보자마자 아리엘 양의 마차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대중 접객용 미소를 걸치며 꽃마차를 흘긋 바라보았다. 이 순백

색 꽃마차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미 온 제도에 소문난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맥스웰 자작님. 무슨 일이신가요?”

“먼저 회포부터 좀 풉시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보는……『

반갑게 외치던 맥스웰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시선이 내 옆을 향했 다.

세드릭이 나를 뒤따라 마차에서 내 리더니 내 옆에 와 섰다. 그리곤 아 무런 말 없이 빤히 맥스웰을 바라보

았다.

“어…… 그러니까……『

맥스웰이 더듬거렸다. 자길 조용히 노려보는 세드릭의 존재감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접객용 미소를 더 짙게 지으 며 말했다.

“무슨 용건이시라고요?”

“그, 흠, 그게, 그러니까. 아리엘 양, 저희 요즘 통 얼굴을 볼 수가 없군요!”

맥스웰은 세드릭을 무시하기로 결 정한 듯했다. 다시 나를 바라본 맥 스웰이 안타까운 얼굴로 외쳤다.

뜬금없는 한탄에 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뭐야. 이번에도 특별한 일은 아니 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야말로 정말 급한 일이 생긴 줄 알았더니.

나는 양치기 소년을 바라보듯 가늘 게 뜬 눈으로 맥스웰을 응시했다.

“그랬던가요?”

“갈 때마다 줄이 어찌나 길던지요. 전 평범한 손님이 아니라고, 오랜 단골이라고 설명해도 직원들이 들은 체를 않더군요. 번호표를 지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그랬군요.”

직원들이 매뉴얼을 잘 지켰군. 역 시 믿음직한 직원들이야. 나는 속으 로만 흐뭇하게 끄덕였다.

맥스웰이 내 단골 중 한 명인 것 은 맞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의 방문이 그다지 내키지 않 았다.

손님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 다. 하지만 맥스웰이 나를 쳐다볼 때면 왠지 목에 소름이 돋았다.

‘그냥 괜한 느낌인 건진 모르겠지 만.’

아무튼 내겐 맥스웰을 줄까지 무시 해가며 특별 취급을 해줘야 할 이유 가 조금도 없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아리엘 양도 알잖아요. 아리엘 양의 가게가 유명 하지 않을 때부터 내가 얼마나 나서 서 입소문을 퍼뜨려 줬습니까?”

맥스웰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맥스웰의 말버릇이었다. ‘아리엘 양 이 잘 된 건 다 내 덕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 다.

“저도 마음 같아선 아리엘 양의 가 게를 저 혼자만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손님이 없으면 아리엘 양이 슬퍼할 테니까, 아리엘 양을 위해서 여기저기 소문을 낸 거죠. 그 덕에 아리엘 양이 이렇게 유명세를 얻게 되신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멕스웰이 한 발자국 을 다가왔다.

“잠깐.”

긴 팔이 나와 맥스웰 사이를 가로 막았다.

내내 가만히 있던 세드릭이 돌연

움직이자 맥스웰이 퍼뜩 놀랐다.

왼팔을 내 앞으로 펼친 세드릭이 맥스웰에게 명령했다.

“두 발자국 뒤로.”

“예? ……저한테 하신 말씀입니 까?”

“두 발자국, 뒤로.”

“……그쪽이 뭔데 제게 이래라저래 라 하는 겁니까?”

맥스웰이 경계하는 티를 역력히 내 면서도 세드릭에게 대들었다. 우스 운 건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두 발자

국 뒤로 물러났다는 것이다.

“거기서 고정.”

세드릭이 또 명령했다. 맥스웰이 기가 찬 듯 외쳤다.

“당신이 뭔데 내게 명령하는 겁니 까? 아리엘 양, 이 남자는 누구지 요? 경호원이라도 됩니까?”

경호원이라니. 나는 졸지에 제국의 공작을 경호원으로 둔 최강의 레이 디가 되고 말았다.

터무니없는 그의 착각을 정정해주 려던 차였다.

“잘 맞혔군. 경호원이다.”

나는 멍하니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세드릭이 나를 쳐다보곤 천연덕스 레 물었다.

“이자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아가 씨?”

“……예?”

“원하시면 당장이라도 치우겠습니 다.”

“이보시오! 당신이 뭔데 그런 소 릴!”

“경호원이라고 했을 텐데?”

세드릭이 성가신 눈으로 맥스웰을 내려다보았다. 맥스웰이 고양이 앞 의 쥐처럼 움찔 굳었다.

점점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 네. 나는 황당함을 묻어 두고 일단 중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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