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화〉
“……레이디. 실례가 안 된다 면…… 레이디의 성흔을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세드릭은 무척이나 힘에 겨워 보였다.
이런 말을 내게 건네는 것 자체가 미안하다는 듯이.
“네? 성흔…… 이요?”
“레이디께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닙 니다. 상처를 헤집으려는 것도 아니 고요. 그저…… 도와드리고 싶은 것 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하고 세드릭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세드 릭 에반스가 이렇게까지 약한 모습 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마치 나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 리로 말했다.
도대체 왜 갑자기 존재하지도 않는 내 성흔을 궁금해하는 건지는 몰라 도, 이렇게 힘겨워 보이는 세드릭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세드릭이 내 머리 위로 가볍게 손 바닥을 눌렀다.
세례를 내리듯 경건한 자세였다. 아까 마터스 신관이 취했던 자세 그 대로.
다른 게 있다면, 마터스는 신성력 을 지닌 신의 사제이고 세드릭은 마 물의 피를 지니고 있다는 것뿐이었 다.
머리 위에 얹은 세드릭의 온기가 따스했다. 그의 손길은 상냥했던 마 터스 신관보다도 훨씬 더 다정하고 사려 깊었다.
잠시 뒤.
‘아……/
알 수 없는 힘이 세드릭의 손바닥 에서부터 흘러나와 나를 감쌌다.
기묘하고 신기한 기분이었다. 아무 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본능적 으로 이 낯선 힘이 ‘마력’이라는 것 을 깨달았다.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활력이 온몸에 깃들었다.
만약 내게 신성력이 희미하게나마 존재했다면, 세드릭의 마력이 이렇 게까지 나를 잠식하진 못했을 것이 다.
그러나 내겐 성흔이 없었다. 덕분 에 나는 온몸으로 세드릭의 마력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만
마침내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 저었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었다. 다만 생전 처 음 느끼는 타인의 마력이 너무나 생 소하고 벅찼다.
세드릭이 불에 덴 듯 황급히 손바 닥을 치웠다. 그러자, 황홀하리만큼 전신을 채웠던 마력이 순식간에 빠 져나갔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그 감각을 견뎠다.
잠시 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
다.
“맞아요, 전하. 제겐 성흔이 없어 요. 아까 신관님께서도 놀라시더라 고요.”
마터스 신관은 가련하게도 꼬리 없 이 태어난 강아지를 보듯 나를 안타 깝게 쳐다봤었지.
그러나 마터스의 생각과는 달리 나 는 가엾은 어린양이 아니었다. 내게 성흔이 없는 건, 그저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다행히 이 세계에선 성흔이 없는
게 놀랍긴 해도 그리 끔찍한 일은 아닌 듯했다.
‘만약 마터스가 성흔 없는 나를 향 해 사탄이라며 호들갑이라도 떨었더 라면……/
난 나조차 이해하지 못한 ‘빙의’라 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애먹어야 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들 었다.
“하지만 성흔 같은 거 없어도 여태
까지 사는 데 지장은 없었으니까, 걱정해주실 필요는 전혀……,”
거기까지 말한 나는 입을 다물었 다.
나는 지금 두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이 믿기지 않아 눈을 홈떴다.
세드릭이, 세드릭 에반스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 고 있었다.
“……전하?”
나는 멍한 목소리로 세드릭을 불렀 다.
세드릭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 다. 나는 그를 더 부르지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왜……/
왜 그렇게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거죠?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방금 있었 던 일을 되짚어 보았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세드릭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어 마력을 흘려보 냈고, 나는 내 안에 성흔이 없다는 걸 그에게 고백했을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설마, 나한테 성흔이 없는 게 안 타까워서?’
마터스 신부도 나를 안쓰러운 눈으
로 쳐다보기는 했다.
성흔이 없다는 건 신관의 치유도 받을 수 없고, 신성력을 사용할 수 도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목숨에 위협이 될만한 일은 아니었다. 몸이 아프면 의사에 게 치료를 받으면 되니까.
게다가 난 사제가 될 생각이 추호 도 없었다.
그런데 왜 세드릭은 이렇게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전하, 혹시 제 성흔 때문에 그러 시는 건가요?”
“전 괜찮아요. 걱정해주지 않으셔 도 돼요. 성흔 같은 거 없어도 여태 잘만 살아왔는걸요.”
세드릭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저 입술을 짓씹으며 나를 내려다 볼 뿐.
계속되는 침묵에 나는 횡설수설 덧 붙였다.
“저 체력 좋은 건 전하께서도 아시 잖아요? 어제랑 그제도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손님 응대만 했는데, 보 세요, 완전 쌩쌩하잖아요. 그렇죠?”
나는 일부러 밝고 건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드릭의 눈빛이 조금 흐트러졌다.
“성흔이야 없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건강하니까 걱정 안 해주셔 도 돼요. 그게 뭐 별 거라구요. 사 제가 될 것도 아닌데요, 뭐.”
세드릭은 방긋 웃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는 힘찬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멀쩡하게 잘살고 있으니까 염려 마세요.”
그제야 세드릭이 입술을 달싹였다. 한참 만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힘이 드실 땐, 힘들다고 말씀 하셔도 됩니다. ……제게는.”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여 세드릭을 안심 시켰다.
“알겠어요, 전하. 그렇게 말씀해주 셔서 감사하네요. 그러니 이제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제 표정……『
세드릭이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엄청 걱정돼서 죽겠다는 표 정 짓고 계시잖아요.”
내 입으로 말하고도 낯설었다.
세드릭 에반스가 이렇게까지 날 걱
정해주다니. 단지 성흔이 없다는 사 실 하나 때문에.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로 고맙기도 했다. 이렇게 염려해주는 걸 보니 그간 그와 나 사이에 친분이 쌓이긴 한 것 같아서.
하긴, 함께한 시간이 제법 되긴 하지.
‘하지만 그런 표정은 정말 그만 지 어 줬으면 해.’
세드릭이 슬퍼하는 얼굴을 보자, 어쩐지 나까지도 슬퍼지는 것 같았 다.
그리고 슬픈 표정은 세드릭에겐 전 혀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재수 없게 비웃는 표정이 나았다.
“얼굴 좀 펴세요, 전하.”
그제야 세드릭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죄송합니다.”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절 걱정해 주신 건데요. 아무튼, 저희 이 일은 그만 넘기기로 해요.”
세드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그나저나 신전엔 정말 절 찾으러 오신 건가요? 아까 말씀하신 이십 년 전 이야기는 뭐고요?”
세드릭이 잠시 날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또 침묵이 이어지려나 겁이 나려던 찰나였다.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레이디.”
그렇게 말한 세드릭이 갑자기 목소 리 톤을 바꾸었다.
“가게가 손님으로 꽉 찼다고 들었 습니다.”
표정도 어느새 평상시로 돌아와 있 었다. 나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 다.
“네! 거의 한 달이나 쉬었는데 다 행히 다들 절 잊지 않으셨나 봐요.”
“한 달이나 쉬셨으니까 더 잊지 못
했겠지요. 한 달간 레이디를 둘러싼 소문이 얼마나 흉흉했는지 말씀드렸 지 않습니까?”
“하하, 그랬죠.”
가게를 재오픈한 뒤 손님들이 엄청 호들갑을 떨었었다. 넘어져서 다리 가 부러졌다던데 괜찮은 거냐는 등, 급성 폐렴은 좀 회복됐냐는 둥.
“오늘은 휴일인 겁니까? 한가해 보 이시네요.”
“네, 모처럼 쉬고 있어요.”
“이후 일정은 있으십니까?”
“으음, 글쎄요. 모처럼 얻은 휴일이 니까…… 이불 속에 일찍 들어가기? 책이나 보면서 쉬기?”
“바쁘시 겠군요.”
세드릭이 설핏 웃었다.
오늘 처음 보는 그의 미소가 반가 워서 나는 방긋 웃었다.
“네. 무척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아 요.”
장난스레 말하자 세드릭이 더 짙게 웃었다. 이젠 완전히 평상시의 세드
릭으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괜찮으시다면 그 바쁜 하루에 제 가 잠깐 끼어들어도 되겠습니까?”
“ 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드릭 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마침 점심 시간인데, 함께 식사라 도 하시죠.”
“ 아.”
그러고 보니, 소녀 군단과 점심까 지 먹고 헤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소녀들이 도망가 버렸으니 점심 약 속은 깨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곧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같이 해요.”
“아는 레스토랑으로 모시겠습니다.”
세드릭이 능숙하게 나를 에스코트 했다.
신전 회랑을 지나는 동안 사람들이 우릴 보며 수군거리는 것이 느껴졌
다.
불과 몇 달 전까진 세드릭과 또 스캔들이 불거질까 봐 몸을 사렸던 것도 같은데. 이젠 그것도 귀찮았다. 스캔들이 내 가게 매상에 도움이 됐 으면 됐지, 해가 되진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 참.”
마차장에 도착한 나는 우뚝 멈춰섰 다.
“전하. 오늘은 제 마차를 타고 가
셔야 할 것 같아요.”
마차장에 선물 받은 내 꽃마차가 서 있었다. 내가 산 거면 몰라도, 선물 받은 건데 이렇게 번잡한 마차 장에 두고 가기가 좀 그랬다.
세드릭은 별 고민 없이 선선히 대 답했다.
“그러시죠, 그럼.”
나는 내 마차가 서 있던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순백색 꽃마차는 멀리서부터 엄청
난 위용을 자랑했다. 지나가던 사람 들이 내 마차를 한 번씩 흘끗거리는 게 보였다.
“여기예요, 전하.”
나는 내 마차 앞으로 세드릭을 안 내했다.
세드릭이 꽃마차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괜히 민망해져선 웅얼거렸다.
“길베르트 백작님께서 선물로 주신 마차예요. 엄청 휘황찬란하죠……? 저도 알아요.”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께서 안목이 좋으시군요. 레 이디의 격에 걸맞은 마차입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말을 잃 었다.
이 꽃마차를 본 순간 놀라지도 않 고, 신나 하지도 않고, 그냥 담담히 나와 잘 어울린다고 하다니…… 이 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역시 범상치 않은 사람이야.’
나는 식은땀을 훔치며 세드릭의 에 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탑승했다.
그리고 내 뒤를 이어 세드릭이 마 차에 올라탔다.
곧 마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무심코 맞은편에 앉은 세드릭을 돌 아본 나는 풋 웃음을 흘렸다. 세드 릭의 머리 위에 분홍색 꽃잎이 한 장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