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89화 (89/153)

〈90 화〉

나는 신관과 소녀들이 주고받는 말 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러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세례를 받으면 영혼에 성흔이 새겨 진다는 건가? 벨레르 제국민들은 그 성흔을 바탕으로 조금씩이나마 신성 력을 지니고 있는 거고?’

그런 매커니즘이라면

마터스가 내 영혼에서 아무런 신성 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 다.

‘내 영혼은 아리엘 윈스턴의 영혼 이 아니잖아.’

내 영혼은 세례를 받은 적이 없으 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그렇게 이실직고할 수는 없 었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소녀들 만 말도 안 된다는 듯 방방 뛰었다.

“저희 아리엘 님처럼 신의 사랑을

받고 태어나신 분께 신성력이 없다 쇼!”

“그러니까요! 아리엘 님께선 외모 면 외모, 재능이면 재능, 뛰어난 성 품까지 갖추신 분인데! 이렇게 아리 엘 님을 사랑하시는 신께서 성흔을 안 주셨을 리가 없잖아요!”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겠지. 난 세례를 받은 적이 없으니까.’

나는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당혹스러운 미소를 유지했 다.

나와 눈이 마주친 마터스 신관이 무척이나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자매님. 정말 유감스럽지만……;

“자매님께선 신성력이 전, 혀! 없 으십니다. 따라서 운세 역시 봐드릴 수가 없습니다.”

“말도 안 돼요!”

“완벽한 아리엘 님께 신성력이 없 다니!”

소녀들이 절규했다.

난 그 사이에서 조금 다른 아쉬움 을 품었다.

‘그럼 사업운은 물어볼 수 없게 된 건가.’

이번 달 안엔 매그너스의 가게를 인수할 수 있을지 꼭 알아보고 싶었 는데.

아쉽게 된 일이었다.

나는 나보다 더 슬퍼하는 소녀들을 다독여 운세를 보게 했다.

소녀들이 마터스 앞에 조로록 줄을 섰다.

“어디 보자, 에일린 자매님의 올해 연애운은……

마터스가 에일린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기도실의 공기가 숨 막힐 듯 경건해졌다. 소녀들이 입도 뻥긋 않 고 엄숙한 얼굴로 마터스를 바라보 았다.

그때 성수 표면에 앉은 꽃잎이 살 짝 몸을 비틀었다.

마터스가 심각한 눈으로 꽃잎을 바 라보았다.

“이건……

에일린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터 스를 올려다보았다.

“여름 안에 에일린 자매님에게 훤 칠한 영식이 접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생김새와 다르게 막돼먹은 녀석이니 받아주지 마십시오.”

“ 또요?”

에일린이 울상을 지었다. 소녀들이 토닥토닥 에일린의 어깨를 두드려 위로했다.

나는 흥미롭게 꽃잎 띄운 성수를 바라보았다. 사업운 보는 건 물 건 너갔으니 이제 내게 남은 관심사는 성수뿐이었다.

소녀들이 모두 운세를 보고 난 뒤, 마터스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매님들의 남은 일 년이 평안하 기를 기원합니다. 주신의 축복이 자 매님들과 함께하기를 바라는 의미에 서, 성수를 한 병씩 담아 드리지요.”

기다리던 대목이었다. 나는 눈을 반짝였다.

마터스가 손수 작은 병에 성수를 담았다. 나는 병을 받자마자 조그마 한 입구 위로 코를 살짝 묻었다.

내 눈이 커다래졌다.

‘이건……/

청량하고 알싸한 향기였다. 민트를 들이마신 듯 시원한 기운이 몸을 타 고 돌았다.

왜 사람들이 냄새를 맡자마자 정화 받는 기분이 든다고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성수의 잔향을 만끽하며 마터

스에게 물었다.

“신관님. 이 성수에 정화하는 효능 이 있나요?”

“예. 그렇긴 합니다만…… 신성력 이 없으신 아리엘 자매님께는 영향 이 없을 것입니다.”

마터스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대답 했다. 나를 향한 그의 눈빛은 가련 한 어린 양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눈을 반짝였 다.

‘나한텐 효능이 없다면, 이 청량한 느낌은 온전히 향기 때문이라는 소 리잖아?’

나는 성수 병 입구 근처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손바닥을 팔랑팔랑 흔 들었다. 손바람을 타고 향기가 코끝 에 스며들었다.

민트 냄새가 강하게 나는데도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민트와 는 조금 다른 느낌의 알싸함 같기도 했다.

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터스 신관님, 이 성수는 배합법 이 어떻게 되나요?”

“배합법…… 말씀이십니까?”

마터스는 그런 걸 묻는 사람은 처 음 본다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 다. 그러나 곧 흔쾌히 대답해 주었 다.

“신성한 허브를 띄운 채 사흘을 내 버려 둡니다. 그 뒤 다섯 명의 신관 이 모여 정화의 기도문을 읊으면 완 성된답니다, 자매님.”

“그렇군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

면, 어떤 허브인지 자세히 알 수 있 을까요?”

마터스가 더 혼란스러운 눈빛을 했 다. 이렇게 구체적인 질문을 받는 건 처음인 듯했다.

하지만 친절한 마터스는 곧 허브

이름을 말해주었다. 셀레스틴이라는 이름이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머릿속으로 메 모했다. 역시 내가 들어본 적 없는, 이 세계에만 존재하는 허브였다.

“셀레스틴은 신성 도시 아젠드릭에

서만 자라는 허브입니다. 반출이 금 지되어 있어 구하기가 어려우실 텐 데요.”

마터스가 걱정스레 말했다.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젠드릭은 대신전이 위치한 곳이니만큼 출입하 기 쉽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멀었고.

아쉽긴 했지만, 크게 실망스러운 건 아니었다. 어차피 당장은 다른 허브를 연구할 시간이 없었다. 무엇

보다

‘아젠드릭까지 동행해 주십시오. ’

세드릭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세드릭은 내게 아젠드릭까지 같이 가 줄 것을 두 번이나 요구한 적이 있었다.

아젠드릭은 출입 허가증을 발급받 기 까다로운 도시긴 하지만… 그건 세드릭이 어떻게든 해 주지 않을까?

우리는 마터스와 인사한 뒤 기도실 을 나섰다. 회랑을 걷는 동안 루나 가 말했다.

“아리엘 님, 죄송해요. 제가 졸라서 오신 건데 정작 아리엘 님만 운세를 못 보셨네요.”

“으응? 아냐. 신전 나들이한 것만 으로도 기분전환이 됐는걸.”

좋은 향기가 나는 물도 얻었고 말 이야. 나는 흥얼거리며 오른손에 쥔 성수 병을 흔들었다.

“루나가 타로점이라도 봐 드릴까 요? 요즘 좀 배우고 있거든요!”

“아하하, 정말? 그럼 부탁 좀 할

게. 사업운도 봐줄 수 있어?”

“네에? 그런 건 제가 카드를 펼칠 필요도 없죠! 보나 마나 대박 난다 고 나올걸요? 지금보다 훨씬, 훨씬 더요!”

루나가 힘차게 외쳤다.

지금보다 훨씬, 훨씬 더 대박이 난 다는 건 어떤 거지. 2호점을 넘어서 3호점, 4호점을 내는 걸까? 온 거리 에서 내가 만든 향수 냄새가 은은히 진동하고, 또……오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는데, 갑자 기 소녀들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 헙?”

“헉.”

소녀들이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 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소녀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전하?”

내 입에서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 다.

회랑 반대쪽에 있던 세드릭도 나를

발견했는지, 그가 곧장 내게로 성큼 성큼 걸어왔다. 세드릭을 알아본 사 람들이 수군거리며 옆으로 비켜섰 다.

“레이디.”

내 앞까지 다가온 세드릭이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엔 가쁜 숨이 섞 여 있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한참을 찾았습 니다.”

“저 를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세드릭이 날 찾아다닐 일이 뭐가 있지?

“……신전에 계셨군요. 어쩐지 에 른에게 연락이 닿지 않는다 했습니 다.”

나는 에른을 돌아보았다.

에른과 세드릭은 마법을 통해 연락 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걸로 알고 있 었는데……?

나는 의아한 눈을 했다.

“신전 안에선 에른 경과 연락을 못 하시나요?”

“제 마법은 신성력과 부딪히면 힘 을 못 씁니다.”

세드릭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 제야 나는 무언가를 깨닫고 입을 다 물었다.

세드릭의 몸속엔 마물의 피가 흘렀 다. 당연히 그의 마법은 신성력으로 가득한 신전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 할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밝게 웃었다.

“그러셨군요.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절 찾으셨나요?”

세드릭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 다.

그저 잠시 동안 나를 말없이 내려 다볼 뿐이었다.

“……전하?”

세드릭의 눈빛이 이상했다.

뭐라 한 단어로 형언하기 힘든 눈

빛이었다. 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 가 나를 가만히 직시했다.

그는 무척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검붉게 변한 눈동자 너머에서 수많 은 감정들이 범람했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읽어보려던 순 간, 세드릭이 눈을 감았다.

“아리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드릭이 나를 이름으로 불렀다.

레이디도 아니고 아리엘 양도 아니 었다. 그냥, 아리엘이었다.

세드릭은 방금 자신이 나를 뭐라 불렀는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다 시 눈을 뜬 세드릭이 나를 내려다보 았다.

“신전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갑 자기 왜 신전에 오기로 정하신 겁니 까? 레이디.”

이번엔 다시 ‘레이디’였다. 방금 전의 그 호칭이 찰나의 실수였던 것처럼.

나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어…… 글쎄요. 그냥 운세를 좀

보려고요.”

세드릭은 잠시 말이 없었다.

“운세…… 요?”

“네. 루나가 보러 가자고 졸랐는데, 들어보니 나쁠 것 없다 싶었거든 요.”

나는 루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루나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세드 릭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십니까! 공작 전하.”

세드릭은 아직도 말이 없었다. 나 와 루나를 한 번씩 번갈아 가면서 쳐다본 세드릭이 내게 말했다.

“그게…… 전부입니까?”

“네.”

“치유를 받으러 오신 게 아니고 요?”

“치유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전혀 아니에요. 제 몸은 완 전히 팔팔한걸요.”

어제 그렇게 많은 손님을 소화했는 데도 조금 피로할 뿐 쌩쌩했다. 나 는 오히려 내 튼튼한 체력에 감탄하 고 있는 중이었다.

세드릭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 보았다. 침묵이 몇 초간 이어지자, 별안간 소녀들이 외쳤다.

“아리엘 님, 저흰 먼저 돌아가 볼 게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렇게 외친 소녀들이, 잡을 새도 없이 삽시간에 멀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나는 세드릭과 단둘이 되 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세드릭 을 올려다보았다.

“하하…… 애들이 참 달리기가 빠 르네요. 어려서 그런지.”

세드릭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

저 탐색하듯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 다.

침묵이 길어지자 나는 조금 불안해 졌다.

방금 루나가 외친 말 때문은 아니 겠지? 루나는 왜 쓸데없는 말을 해 선……!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레이디, ……제가 일전에 여쭈려 고 했던 것이 있었지요.”

무겁게 입을 여는 그의 모습은 어 딘지 힘겨워 보였다.

마침내 그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십 년 전, 레이디가 겪었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요.”

내가 겪었을지도 모르는 일?

그것도 이십 년 전에?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지. 마치 수수께끼를 듣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이마를 찌 푸렸다.

까쓰'4 요정#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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