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화〉
[아리엘 님!]
“ 루나?”
루나가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말했 다.
[저희, 신전에 운세 보러 가요!]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싫어. 사람 많을 거 아냐. 귀찮 아.”
일 년의 절반이 지나간 시점. 남은 반년의 운세를 보는 게 이즈음의 유 행이었다. 타로 천막들도 북적였지 만, 역시 가장 사람이 많은 건 신전 이었다.
내 단호한 거절에 루나가 눈을 울 망거 렸다.
[줄 안 서셔도 돼요, 아리엘 님! 제 아버지께서 신전에 아는 신관님
이 계시거든요! 그 신관님께 운세를 봐 달라고 하면 돼요!]
난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난 운세 같은 거 안 믿 어.”
[네? 정말요?]
루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어나자마자 의무적으로 세례를 받는 이 벨레르 제국에선 낯선 이야 기인 모양이었다. 루나는 순간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아리엘 님은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자 파’이셨군요. 역시 멋있으세요.]
“음, 대충 그런 거지.”
[그럼 신전은 저희끼리 갈게요. 아 쉽네요. 신관님이 성수도 한 병씩 담아 주신다고 하셨거든요.]
“……성수?”
내 눈이 커졌다.
벨레르 제국의 성수는 유명했다. 신성력이 듬뿍 담겨 있다는 소문이 돌아 타국에서도 줄을 서서 받으러
올 정도였다.
물론 나는 이 제국의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신성력 같은 건 관심 없었다. 내 관심사는 다른 거였다.
“냄새를 맡기만 해도 정화 받는 기 분이 든다는 그 성수 말이야?”
성수는 독특한 향기를 지니고 있 어, 그 청량하고 상쾌한 향기를 맡 는 순간 몸속의 나쁜 기운들이 정화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네, 네. 아버지께서 아시는 그 신
관님께서 고위직에 계시거든요. 시 장에 나돌아다니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배기 성수로 주실 거예요!]
루나의 호언장담에 솔직히 귀가 솔 깃했다. 루나가 그 틈을 놓치지 않 고 파고들었다.
[같이 가시겠어요, 아리엘 님? 꼭 믿지 않으셔도 재미로 운세 보셔도 재밌을 거예요! 루나가 장담할게 요!]
하긴. 리나와 타로 가게에 갔을 때
도 점괘를 보는 것 자체는 꽤 재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타로 가게 주인이 끔찍한 점괘를 가지고 수습 하느라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재밌었지.
그러고 보니 점괘에 나왔던 그 할 아버지는 지금쯤 어떻게 됐으려나? 많이 편찮으신 것 같던데…… 아직 살아 계실까.
‘마침 내일은 휴일이기도 하고.’
잠깐 다녀오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 였다.
“좋아. 갔다 오자, 루나.”
[와! 잘 생각하셨어요!]
루나가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나 는 웃으며 수정구의 연결을 끊었다. 그때 뒤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 렸다.
“으악! 안 멈춰!”
“이, 이게 왜 이러지? 제니타! 내 손 잡아!”
마도기계가 폭주해서 사방팔방에 원료를 뱉어내고 있었다. 아수라장 이 따로 없었다.
나는 얼른 달려가선 강제로 마도기 계를 멈췄다. 겁에 질린 직원들이 구세주를 보듯 날 바라보았다.
“많이 놀랐어요? 괜찮아요, 멈췄으 니까. 비상 정지 버튼은 여기에 있 으니까 다들 잘 숙지해둬요.”
“네,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사장님!”
사고를 친 직원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손을 뻗어 제니타의 어깨를 다 독여 주었다.
“마도기 계는 다루기 어렵잖아요.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예 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니타가 감격한 눈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새로 채용한 직원들은 하나같이 성 실하고 착했다. 라비, 제니타, 올슨, 유리아, 전부 좋은 직원들이었다. 습 득 능력도 빨랐고.
‘〈매혹의 미학〉을 만들 땐…… 당 분간 라비의 도움만 받아야겠어.’
저 마도기계가 마구 뱉어댄 원료가 만약 용연향이었다면? 식은땀이 흘 렀다.
‘그래도 리나랑 단둘이서 고생할 때보단 팔자가 폈지.’
나는 직원들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 보았다.
곧 매그너스의 가게를 인수한다면
직원도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러면 능률도 훨씬 올라가겠지.
미래의 일을 그려보자 미소가 더 짙어졌다. 나는 직원들과 함께 폭주 한 마도기계를 정리하면서도 실실 웃었다.
‘매그너스가 빨리 항복했음 좋겠 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듯했다. 아 제키안의 후원이 끊어졌으니까. 예 상치 못한 전개였지만 내겐 잘된 일 이었다.
지금은 매그너스가 자존심 때문에 버티고 있지만, 그는 원래 향수가 아닌 화장품이 주력이었다.
자존심으로 버티던 매그너스도 곧 자신이 큰 손해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닫겠지.
머지않은 날을 떠올리며 나는 콧노 래를 불렀다.
화창한 햇빛이 신전 가는 길을 비 추었다.
나는 오랜만에 제이나가 선물해준
순백색 꽃마차를 꺼냈다. 사실 개인 적으론 황궁 정도 되는 자리가 아니 면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은 마차였지 만……,
“아리엘 님! 이 마차 너무 크고 좋 아요!”
소녀들이 너무 좋아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우릴 쳐다 봐요!”
“다들 부러운가 봐요!”
하하…… 그렇겠지. 내가 행인이었 어도 이렇게 호화로운 꽃마차가 지 나가면 한 번쯤 돌아볼 것 같다. 대 체 주인이 얼마나 꽃에 미친 사람인 가 싶어서.
‘혹시 제이나 님께 내 이미지가 그 런 식으로 박힌 건 아닐까……/
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런 사 람으로.
은은히 풍겨오는 꽃내음이 기분 좋 기는 했다.
따스한 초여름의 햇살, 잔잔한 산
들바람, 은은하게 닿아 오는 꽃내음. 나는 가볍게 흥얼거리며 가까워지는 신전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신전에 오는 건 처음 이네.’
보통 사람들이야 밥 먹듯 들르는 곳이었지만, 난 이번이 처음이었다. 반면 루나와 소녀들은 매번 들락거 린 듯 익숙해 보였다.
“신전도 오랜만이다. 저번 달에 운 세 보러 온 게 마지막이니까, 거의
한 달 만이네?”
“그러게. 진짜 오래됐다.”
대체 이 애들은 운세를 얼마나 자 주 보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도 중 드디어 마차가 신전에 도착했다.
신전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나 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이리저리 던 지며 회랑을 걸었다.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운세 이야기를 하는 게 들렸 다.
“난 이번 달 연애운 만점이래.”
“진짜? 이번 달에야말로 청혼해
봐!”
아무리 봐도 여긴 신전이라기보단 그냥 점집 같은데…… 의미가 많이 변질된 거 아냐?
들려오는 대화를 흘려넘기며 나는 느긋이 신전을 구경했다.
우리는 회랑 속을 꽤 깊숙이 걸었 다. 루나와 인맥이 있다는 신관님께 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위 신관 인 모양이었다. 깊숙이 들어가면 들 어갈수록 사람이 줄어들었다. 흰색 신관복을 차려입은 신관들만이 간혹 보였는데, 다들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자매님들.”
한 신관이 우리에게 아는 척을 하 자, 루나가 밝게 웃었다.
“마터스 신관님!”
“루나 자매님. 이번 달에도 오셨군 요. 운세를 보러 오신 겁니까?”
“네! 친구들도 함께요. 아, 이번엔 아리엘 님도 모셔 왔어요!”
“오호. 이 자매님께서……?
마터스라는 신관이 호기심 어린 눈 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루나에게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 다, 아리엘 자매님. 운세를 보러 오 신 건가요?”
“아, 네. 안녕하세요, 신관님.”
마터스 신관이 익숙하게 우리를 기 도실로 안내했다.
기도실에선 약초 냄새가 가득 풍겼 다.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성수 를 찾았다. 신상의 손 부근에서 마 치 작은 계곡처럼 성수가 흐르고 있
었다. 나는 눈을 반짝였다.
‘저걸 맡는 순간 온몸이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고?’
정말 저 성수에 그런 성스러운 효 능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기 분이 들 정도로 향기가 좋은 것인지 궁금했다.
노골적으로 성수에 꽂힌 내 시선을 보곤 마터스 신관이 빙그레 웃었다.
“운세를 어서 보고 싶으신 모양이 군요, 아리엘 자매님. 지금 바로 성
수를 통해 운명의 신 셀레네 님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오. 운세라는 건 저 성수를 통해 서 보는 건가 봐.’
핑계 대지 않고 성수를 가까이할 수 있는 기회이니 대찬성이었다.
“아리엘 자매님, 이리로.”
마터스 신관이 나를 신상 앞으로 안내했다.
운명의 신 셀레네를 조각한 석상이
나를 굽어보았다. 조각상의 뛰어난 퀄리티에 나도 모르게 조금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자매님.”
마터스 신관이 양해를 구하곤 내 머리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마 치 세례를 내리듯이. 그러고 있자니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원래 나는 미신 같은 건 믿지 않 지만, 생각해 보니 이 세계는 내가 이전에 살았던 세계와 다른 장소였 다.
여기엔 마법도 있고 신성력도 있었 다. 정말 운명의 신이 존재해서 내 미래를 살짝 누설한다고 해도 이상 할 게 없었다.
마터스 신관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채 집중한 듯 침묵을 지켰다. 경건한 침묵이 길어질수록 내 기대 감도 커졌다.
‘사업운도 여쭤봐야지.’
매그너스가 언제쯤 포기하고 내게 가게를 넘길지 꼭 여쭤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터스 신관이 침음을 흘렸다.
마터스 신관이 감고 있던 눈을 떴 다. 그는 무척 곤혹스러워 보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신관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 렸다.
마터스는 한참 더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채 끙끙댔다. 마침내 그 가 포기한 듯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매님, 정말 죄송하지만……,”
“ 네?”
나는 조금 불안한 얼굴로 마터스를 올려다보았다. 마터스가 무척 유감 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매님께는 신성력이 조금도 없으 신 것 같습니다.”
“……네?”
“이상한 일이군요. 벨레르 제국민 들은 모두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
으니, 아주 미약하더라도 영혼에 신 성력이 새겨져 있어야 하는데…… 자매님의 영혼에는 신성력이 전무합 니다.”
“네에?”
“마터스 신관님, 그게 무슨 말씀이 세요! 저희 아리엘 님의 영혼에 성 흔이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소녀들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외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