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87화 (87/153)

〈88 화〉

수정구 앞으로 다가가자 밝은 음성 이 울렸다.

[세드릭! 일하고 있었나?]

“하이넨.”

세드릭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 했다. 수정구에서 호쾌한 웃음소리 가 들렸다.

[목소리가 잠긴 걸 보니 기분이 별 로인가 보지?]

“내 기분이 별로인 건 자네가 용건 부터 말하지 않아서야. 무슨 일이 지?”

[매정하기는!]

수정구 속에서 하이넨이 상처받은 시늉을 했다. 세드릭은 반응 없이 무표정으로 수정구를 노려보았다. 하이넨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알겠어, 알겠어. 빨리 용건이나 말

하고 사라지겠네. 그…… 흠, 흠. 아 리엘 양께서 새로운 향수를 내놓았 다는 것 혹시 알고 있나?]

“그 얘긴 갑자기 왜?”

[아니, 그게 말이야. 내 부인께서 아리엘 양의 열렬한 팬이거든. 이번 신상품을 꼭 구하고 싶은데 좀처럼 물량을 구하기가 힘들다고 슬퍼하질 않나?]

“그래서?”

[그런데 마침 자네가 아리엘 양과 제법 친한 사이이질 않나? 이번 건 국제 때도 둘이 계속 붙어 다녔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 그래서 내가 생 각을 해 보았는데, 아리엘 양과 친

한 자네가 향수 하나만 슬쩍 빼돌려 달라고 부탁을 해 보면……』

세드릭은 더 듣지 않고 수정구를 덮으려 했다. 수정구 안에서 비명이 울렸다.

[아, 아아! 잠깐만! 덮지 말게! 알 겠네, 알겠어!]

세드릭이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하이넨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한번 해 본 소리네. 어쩌면

이렇게 매정하기가 겨울바람 같나? 내가 자네를 까마득한 아카데미 시 절부터 봤지만 매정하고 무심한 면 에선 사람이 참 한결같은 게……』

세드릭이 덮개를 반쯤 덮었다. 하 이넨이 다급히 본론을 꺼냈다.

[잠깐, 잠깐! 이번엔 진짜 본론일 세. 자네가 부탁한 정보를 막 입수 했네!]

세드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덮개 를 저 멀리 던진 세드릭이 낮은 목

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됐지?”

하이넨 크뤼거는 크뤼거 가문의 뿌 리 깊은 인맥, 그리고 본인의 사교 성 덕에 정보통으로 유명했다.

세드릭 역시 하이넨의 정보력 하나 만큼은 높이 샀다. 하이넨에게 아리 엘과 칸에 대한 조사를 맡긴 것 역 시 그를 믿기 때문이었다.

수정구 속 하이넨의 얼굴이 처음으 로 진지해졌다.

[확실해. 칸은 지금 아리엘 양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어. 지하 수 로에 심어 놓은 내 정보원이 방금 전해온 이야기니 틀림없을 거야.]

세드릭이 얼굴을 굳혔다.

아리엘에게 접근하려는 사람이 칸 이라는 심증은 있었지만, 확증은 없 던 상태였다.

건국제 중 잡은 두 명의 자객에게 서 소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잇새에 극독 알약을 숨기고 있을 줄 몰랐던 세드릭의 실수였다.

결국, 그날 세드릭은 자객들의 소

속조차 알아내지 못했었다.

“칸이 왜 레이디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나?”

세드릭이 나직이 물었다.

처음엔 당연히 자신 때문이라고 생 각했다.

자신에겐 적이 많았으니까.

자신과 가깝게 지내는 자들에게는 백이면 백 무조건 스파이가 붙었다.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이 거나, 인질 가치를 가늠하기 위해서.

하이넨 역시 달라붙은 자객들 때문

에 한동안 골치를 앓은 적이 있었 다.

아리엘 윈스턴은 세드릭의 첫 연인 이었다. 당연히 세드릭의 수많은 적 들이 아리엘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아리엘에게 사람을 붙인 이들 중엔 아제키안도 끼어 있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칸이 아리엘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 역시, 처음엔 단순히 자 신과의 친분 탓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짐작이 틀렸다면?

칸은 사실 처음부터 ‘아리엘 윈스 턴’에게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이넨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걱정 서린 얼굴로 세드릭을 천

천히 살폈다. 잠시 뒤에야 하이넨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정보원이 전해온 말로는, 세 드릭.]

세드릭이 살짝 주먹을 쥐었다.

자신과의 친분 때문이 아니라면, 칸이 아리엘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 는 하나뿐이었다.

[칸이 아리엘 양에게 성흔이 없다 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하네. 우리의 가설이 맞았던 것 같아.]

:……아리엘 양 역시, 이십 년 전 실험체 중 하나였다는 가설 말이 야.]

하이넨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드릭은 주먹을 더 세게 쥐었다. 주먹 위로 하얗게 뼈가 도드라졌다.

‘아리엘이, 그 지옥에 나와 같 이……/

이십년 전, 칸이 납치한 실험체는 비단 세드릭뿐만이 아니었다. 세드

릭은 가장 귀하고 가능성 큰 실험체 일 뿐이었다.

그 외에도 조건에 맞지 않아도 가 축처럼 실험당하고 죽어간 실험체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아리엘 역시 그중 하나였던 것이 다.

끔찍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나서야 이해되 는 것들이 몇 있었다.

먼저 아리엘은 아닉시아 향을 만들 어낼 수 있는 유일한 조향사였다. 아무도 만들지 못했던 레시피를 그 녀가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건 아마 도, 살아남기 위한 발버등의 일환이

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실험체 라는 강력한 증거는으

세드릭은 아리엘 윈스턴을 떠올려 보았다.

벌꿀이 흘러내리는 듯한 머리칼과 꽃에 집중하고 있는 청록색 눈동자. 희미하게 배어 나오는 특유의 향기.

세드릭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흘 러나왔다. 이제는, 아리엘을 떠올리 는 것만으로도 핏줄을 조이는 고통 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아리엘 역시 마물과 합성 당한 거

라면.’

그렇다면 이 현상이 모두 설명이 되었다.

아리엘의 향기를 맡을 때마다 머릿 속이 맑아졌던 것도, 아리엘과 가까 이 있으면 숨통이 트이는 것도, 자 꾸 얼굴을 보러 가고 싶은 욕구가 드는 것도……,

세드릭의 안에 자리한 마물의 피가 자신과 같은 존재를 원하는 것이다.

아리엘 윈스턴, 그녀 자체가 아닉 시아 꽃이었던 것이다.

세드릭』

하이넨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세 드릭을 불렀다.

하이넨은 세드릭의 과거에 대해 알 고 있는 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하이넨 역시 ‘실험체’라는 단어를 꺼내 친우의 과거를 들쑤시는 일이 편치 않았기에, 그가 걱정스러운 표 정으로 물었다.

[괜찮은 건가?]

세드릭은 그제야 고개 들어 하이넨

을 마주보았다.

괜찮냐고?

주먹 쥔 손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 고들어갔다. 손바닥의 살갗이 조금 씩 찢겨나갔다.

괜찮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아리엘에게도 똑같은 짓을 한 게 맞다면. 자신이 겪은 것과 같 은 고통을 아리엘에게도 강요했던 것이 맞다면.

세드릭의 가슴이 불규칙하게 호흡 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꿈틀거렸다.

세드릭은 오랜만에 핏줄이 터질 듯 팽창하는 것을 느꼈다. 아리엘과 자

주 접촉한 요즈음은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 전하……

리키온이 황급히 소리쳤다. 하얗게 뼈마디가 도드라진 세드릭의 주먹 밑으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괜찮으십니까!”

세드릭의 상태는 누가 봐도 심상치 않았다. 리키온은 겁에 질린 티를 역력히 내면서도 세드릭에게 달려왔

다.

“아닉시아 향을 대령하겠습니다! 아, 아니. 아리엘 님을 모셔올까 요?”

리키온이 걱정스레 외쳤다. 세드릭 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세드릭이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조절할 수 있어.

세드릭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그 말을 되뇌였다.

광증 따윈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 어. 나는 짐승도 아니고, 마물은 더 더욱 아니니까.

세드릭은 짧은 시간 동안 그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러자 터질 듯 빠르게 박동하던 심장이 간신히 가라앉았다.

세드릭은 다시 시선을 들어 수정구 를 노려보았다.

“레이디에게 성흔이 없다는 사실을 그자들이 어떻게 알아낸 거지?”

하이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넨의 눈에 걱정과 불안이 뚜렷 이 서려 있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지 않겠나? 어떤 경로로든 아리엘 양에게 신성력을 사용해본 거겠지. 그 뒤 전혀 통하 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것이고.]

[벨레르 국민에게 신성력이 통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뿐이지 않나.]

벨레르 제국에서 태어난 이들은 누

구나 주신의 세례를 받는다. 귀족은 물론이고 가난한 이들마저도 예외는 없었다.

하지만 세드릭에겐 성흔이 존재하 지 않았다.

‘성흔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이니 까.’

마물과 합성당하는 과정에서 세드 릭의 영혼은 상처를 입었고, 그 때 문에 세례의 축복은 무효화되었다. 덕분에 그는 검술과 마법에 능통했 지만, 신성력은 조금도 사용할 수 없었다.

[세드릭. 아리엘 양에게 성흔이 존 재하는지 확인해본 적 있나?]

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성흔을 확인하려면 신전에서 복잡 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만약 아 리엘이 정말 실험체였다면, 그 과정 에서 그녀는 자신이 의심하고 있다 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세드릭은 그런 식으로 아리엘의 상 처를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세드릭.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만…… 아리엘 양을 보 호해야 해. 윈스턴 백작은 칸에게서 아리엘 양을 지켜내기엔 너무 무능 해.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자네밖엔 없네.]

하이넨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지;

나는 귓가를 살짝 긁적였다. 어쩐 지 아까부터 귀가 간지러웠다.

“사장님! 이렇게 하는 것 맞나요?”

라비가 손을 들어 나를 불렀다.

라비의 비커에는 완벽한 빛깔의 보 라색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밝게 웃었다.

라비는 학습이 빨랐다. 직원들 중 처음으로 용연향을 넣은 신제품, 〈매혹의 미학〉의 레시피를 그에게 알려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레시피 유출을 하지 않겠다는 각 서를 쓴다는 조건이었지만.’

라비는 다행히도 마법이 걸린 각서 에 흔쾌히 서명해 주었다. 만약 그 가 레시피를 유출하려고 한다면 무 시무시한 대가가 뒤따를 것이었다.

“색은 완벽하네요. 향을 맡아볼게 요.”

“예, 사장님.”

나는 비커를 가볍게 쥐었다. 라비 의 눈에 긴장이 역력히 떠올랐다.

나는 살짝 숨을 들이마셔 향을 맡 아 보았다.

깊고 우아한 향이 코끝으로 스며들 었다.

초여름에 어울리도록 청량한 향이 지만, 마냥 날아갈 듯 가볍진 않았 다. 파우더리한 잔향이 포근하게 남 아 향기의 무게감을 지켜주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완벽하네요. 이 정도면.”

“정말인가요, 사장님! 다행이네요!”

옆에서 함께 향을 맡던 라비가 환 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고급스러운 향이에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용연향은 향에 우아한 깊이를 선사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용연향이 첨 가된 향수는 그렇지 않은 향수에 비 해 굉장히 긴 지속시간을 자랑했다.

‘그건 엄청난 장점이지.’

더 이상 귀찮게 파우치에 향수를 넣어 다니며 뿌릴 필요가 없는 것이 다. 고객님들도 곧 그게 얼마나 커

다란 장점인지 깨닫겠지.

작업장을 둘러보며 한창 직원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선반 위에서 통신용 수정구가 반짝 거렸다. 곧 그 안에 루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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