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86화 (86/153)

〈87 화〉

“이런 향기는 처음 맡아 봐요.”

연보라색 영애가 멍하니 말했다.

용연향이 자아내는 깊고 고급스러 운 향기. 이 향에 매료되지 않을 사 람은 드물었다.

괜히 용연향이 바다의 보물이라 불 리는 게 아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정보를 준 제이나에게 경건히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리엘 님, 저 이 향수도 한 병 주세요. 아, 아니. 잠시만요.”

연보라색 영애가 가게 문밖을 불안 한 눈으로 훑었다. 문밖으론 줄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영애가 결심 한 듯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세 병 주세요!”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시는 구매하 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았 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네, 손님. 세 병으로 담아 드릴게 요.”

“아!〈보랏빛 밤의 끝자락〉도요!”

“네! 네 병 담아 드릴게요.”

네 병 추가 판매 완료.

귓전으로 금화가 쨍그랑 떨어지는 환청이 들렸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보라색 영애 에게 향수 가방을 건넸다.

연보라색 영애를 배웅한 나는, 다 음 손님을 응대하러 갔다. 한 손님 이 몽롱한 눈으로 매대 맨 위를 올

려다보고 있었다.

“아리엘 님. 저 향수병은 판매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나는 손님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시선의 끝에선, 손바닥만한 향수병 하나가 내리쬐는 햇살에 영롱히 빛 나고 있었다.

아르키오스의 수정 비늘을 깎아 만 든 향수병이었다.

손님이 황홀한 눈으로 향수병을 바 라보았다.

“꼭 예술작품 같아요. 하아…… 혹 시 판매하지는 않으시나요?”

“죄송해요, 고객님. 저 향수병은 비 매품이랍니다.”

내가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 하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손님이 계속해서 향수병을 아른하게 쳐다봤 다.

저 특별한 향수병은, 내가 봐도 유 별나게 아름다웠다. 향수병이라기보 다는 예술작품 같다는 손님의 감상 에 나 역시 동의했다.

난 여태 향수병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여본 적이 없었다. 안에 든 내 용물이 중요하지, 포장에까지 여력 을 쏟을 여유는 없다는 게 이유였 다.

하지만 막상 아르키오스의 비늘로 만든 향수병을 바라보니, 나도 몰랐 던 내 안의 예술혼이 눈을 떴다.

‘향수를 담는 병도 참 중요하구나.’

더 다양한 향수병을 만들어보고 싶 었다. 향수의 컨셉에 맞춰 아름답게 병을 조각한다면 고객들의 만족도도 더 커지지 않을까?

나는 세드릭이 소개해 준 장인을 찾아가서 비늘을 한 개 건네며 향수 병 제작을 부탁했었다.

향수병이라는 형태에 어울릴지, 안 에 향수를 넣으면 변질하지는 않을 지 먼저 시험해보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수정 비늘 향수병은 아름다웠고, 안에 든 향을 변질시키지도 않았다. 아르키오스의 수정 비늘은 최고의 향수병 재료였 다.

‘세드릭이 준 비늘을 죄다 깎아서 향수병으로 만든 뒤에…… 특별한 날에 한정판으로 판매해 볼까.’

아이디어가 몇 개 떠오르기는 했 다. 나는 그것들을 일단 머릿속 한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지금은 수정 비늘까지 동원해 손님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었다. 이미 넘쳐흐르고 있 었으니까.

“아가씨, 아가씨.”

그때 리나가 곁에 와서 속삭였다.

“매그너스 남작님이 찾아왔어요.”

“음, 그래?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전해드리렴.”

나는 여유롭게 웃곤 다시 손님을 상대했다. 가게 밖에서 기다리며 속 이 부글부글 끓어 오를 이웃님을 생 각하니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십 분쯤 뒤에야 나는 매그너스를 만나러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남작님. 오랜만에 뵈어요.”

나는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팔짱 을 끼고 있던 매그너스 남작이 대뜸 나를 노려보았다.

“아리엘 영애, 영애께선 분명 저와 선의의 경쟁을 하자고 하지 않으셨 습니까?”

“물론이죠. 저와 남작님이야말로 긍정적인 의미의 라이벌 아니겠어 요? 서로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자극 하고 있으니까요.”

비아냥대려는 게 아니었다. 매그너 스가 아니었으면 나는 2호점이라는 거창한 꿈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향수를 만드는 것만 좋아할 줄 알았지, 가게를 키우는 데에 재

미를 느낄 줄은 몰랐다.

‘나도 몰랐던 내 야망을 일깨워 줬 으니, 선의의 라이벌 맞지.’

나는 따뜻한 미소로 매그너스를 바 라보았다. 매그너스가 미간을 구겼 다.

“아리엘 영애, 정말 그렇게 생각한 다면 서로 간에 최소한의 예의는 지 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머. 혹시 제가 남작님께 어떤 무례를 저질렀나요?”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아리엘 영애의 가게 앞에 늘어선 줄! 그 줄 이 내 가게의 입구를 막고 있질 않 습니까!”

“어라. 그랬던가요?”

나는 슬쩍 고개를 빼 매그너스의 가게 쪽을 돌아보았다. 인파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내 가게를 찾아온 손님들이 매그너스의 가게 입구를 막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저는 저 줄이 전부 제 가게

를 찾아오신 분들인 줄 몰랐어요. 평소엔 매그너스 남작님의 가게에도 항상 줄이 있었잖아요?”

내 말에 매그너스가 순간 말을 잃 고 어깨를 부들댔다.

“그, 오늘은…… 좀 예외입니다.”

“그러시겠죠, 물론.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던 매그너스 님의 가게에 줄 이 없을 리 없죠. 오늘은 정말 죄송 해요. 남작님의 가게 영업에 방해되 지 않도록 당장 조치할게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매그 너스를 계속 살살 긁었다. 잔뜩 약 이 올랐는지 매그너스가 얼굴을 붉 혔다. 반격도 못 하는 모습이 꽤 재 미 있었다.

부들부들 몸을 떨던 매그너스는 반 격할 거리가 생각났는지, 미소를 지 으며 입을 열었다.

“작업장을 얻으셨단 소식 들었습니 다. 에반스 공작 전하께서 아리엘 영애를 아주 살뜰히 보살피시는 모 양이지요?”

매그너스가 비아냥거렸다. 내가 세 드릭의 돈으로 작업장을 얻은 줄 아 는 것 같았다.

구태여 정정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어깨만 으쓱였다. 그러자, 매그 너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 다.

“젠장, 아제키안 전하께선 대체 왜 연락도 안 되시는 건지……, 후원금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셔 놓곤……/

아제키안이라……그러고 보니 요즘 은 그 귀찮은 황자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설마 세드릭의 마법사가 설치한 접 근 금지 마법이 효험을 발휘한 걸 까?

“아제키안 전하께서 요즘 바쁘신가 봐요?”

“뭐, 뭡니까. 엿들으신 겁니까?”

매그너스가 팔짝 뛰어올랐다. 아니, 바로 앞에서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 거리면 당연히 들리지.

매그너스가 간신히 당황을 가라앉 히곤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흐, 흠. 바쁘신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연락만 받지 않으시는 건 당연히 아니고! 사교계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고 계시다고 합니다.”

매그너스가 열심히 변명했다.

사실, 아제키안의 행방이 그리 궁 금한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대충 고 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혹시 아제키안 전하께서, 최근에 아리엘 영애를 찾아가신 적이……?”

“최근엔 없는데요.”

그러자 매그너스가 눈에 띄게 안도 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아제키안이 나한테로 갈아탔 을까 봐 걱정한 건가? 은근히 귀여 운 구석이 있다니까.

“아, 그나저나. 매그너스 남작님.”

내가 예의를 갖춰 부르자 매그너스 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마침 남작님께 사업과 관련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무, 무슨 말을 하시려는 겁니까?”

매그너스가 경계 가득한 표정을 지 었다. 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남작님의 가게, 제게 매각하실 생 각 없으신가요?”

“예에?”

매그너스가 펄쩍 뛰었다.

“그게 난데없이 무슨 말씀입니까, 영애! 제가 가게를 왜 팝니까! 손님 도 많고, 장사도 잘되고, 아제키안 전하 같은 든든한 후원자도 있는데 요!”

매그너스가 벌게진 얼굴로 외쳤다. ‘손님도 많고’와 ‘장사도 잘되고’에 유달리 힘을 줘서.

나는 매그너스의 가게 입구를 슬쩍 돌아보았다.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우리 프로페셔널한 직원분들께서 벌 써 줄을 예쁘게 정리한 뒤였다.

이제 내 가게 줄이 매그너스 가게 의 입구를 전혀 가리고 있지 않았 다.

방해꾼이 없어진 입구는 아주 쾌적 하고 한가해 보였다. 지나치리만큼.

내 시선을 느꼈는지 매그너스가 어 깨를 바르르 떨었다.

“잠시 비수기가 왔을 뿐입니다! 장 사라는 게 늘 한결같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비수기가 있죠. 저도 요즈 음은 매출이 좀 주춤해서 걱정이에 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까지 폭 뱉었다. 매그너스의 시선이 반사적 으로 내 가게에 늘어선 줄로 향했 다.

나는 매그너스가 파들파들 떠는 것 을 바라보며 속으로 웃었다.

이렇게 놀리기 쉬운 성격일 줄이야 “아무튼, 남작님. 제 제안 생각해 보 세요. 전 언제든지 매그너스 향기 백화점의 새로운 주인이 될 각오가 되어 있답니다.”

“무슨! 그럴 일 없다고 하지 않았 습니까!”

“남작님께서 고용하신 직원분들도 최상의 대우로 모셔 갈 테니 걱정하 지 마시고요.”

“영애! 정말 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시는군요!”

드디어 깨달았군. 매그너스가 귓불 이 새빨개져선 외쳤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줄 관리에 신경 써 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매그너스가 등을 돌리 더니 잔뜩 화가 난 걸음걸이로 멀어

져갔다. 나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 었다.

‘귀엽다니까.’

쏘# 쏘

“전하, 전하!”

리키온이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세드릭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곤 리키온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저 촐싹거림은 왜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건지.

세드릭의 냉랭한 눈빛에 리키온이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리키온은 포 기하지 않고 세드릭의 앞까지 다가 왔다.

“전하, 오늘 아리엘 님의 가게가 재오픈했다는 것 알고 계셨습니까?”

아, 하긴. 전하께서 모르실 리가 없으시지. 거슬리는 소릴 중얼거린 리키온이 말을 이었다.

“손님이 어마어마하게 몰렸다고 합

니다! 거의 한 달 만에 다시 여는 건데도요.”

“줄이 너무 길어서 줄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아주 장관일 것 같지 않으십니까? 전하께서도 궁금하시지요?”

리키온이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세드릭은 이마를 꾹꾹 눌렀다.

“리키온. 내가 뭐라고 했지?”

“……쓸데없는 소린 하루에 한 문 장씩만 하라고요. 그것도 많이 봐준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리키온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 소식은 쓸데없는 소리 가 아니지 않습니까? 전하. 아리엘 님의 이야긴데요.”

“쓸데없는 소리 맞아. 당연히 사람 이 폭발적으로 몰려들었겠지. 그걸 직접 봐야만 아나?”

세드릭은 아리엘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다.

화제성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 돌연

가게 문을 닫고 모습도 감춘다. 그 리고 자신에 대한 소문이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졌을 무렵, 뛰어난 신제 품과 함께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뛰어난 신제품’ 이었다. 만약 신제품이 신통치 않다 면 그간의 노력이 전부 물거품이 될 터였다.

그러나 세드릭은 그 점에 대해선 아리엘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잘 해냈을 것이다. 그 괴상 한 고래 찌꺼기를 가지고 무언가 환 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냈겠지.

그런 것쯤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전하, 통신용 수정구가 깜빡입니 다.”

리키온의 말에 세드릭이 뒤를 돌아 보았다. 평소엔 투명한 수정구 위로 젊은 남성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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