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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85화 (85/153)

〈86 화〉

“제가 낙찰받은 건 훨씬 많은 양이 었습니다. 여기 있는 건 그 반의반 도 안 됩니다.”

세드릭이 태연히 말했다.

이게 반의반도 안 된다고?

“정말 소량만 가져온 거니까 그렇 게 당황한 표정 짓지 마십시오. 아

니면 선물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모자라십니까? 더 가져오라 할까 요?”

“ 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럴 리가요? 모자랄 리가 없잖아 요! 다만 이건 너무……

부담스럽다.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였다.

“그냥 간단한 성의 표시라고 생각

해 주시면 됩니다. 말씀드렸듯, 제가 구매한 양의 반의반도 안 되는 양이 니까요.”

세드릭이 ‘반의반’에 힘을 주면서 재차 말했다.

이게 ‘간단한 성의 표시’라고? 나 는 다시 영롱한 비늘 더미를 바라보 았다.

그 성의 표시 한 번 잘못했다간 재산이 거덜 나겠는걸.

세드릭 뒤에서 리나가 퍼덕거리는 게 보였다. 필사적인 고갯짓을 보아 얼른 덥석 받으라는 의미 같았다.

‘아니, 나도 마음 같아선 그냥 날 름 받고 싶은데.’

이렇게 커다란 선물을 덥석 받아먹 었다간 체할 것 같단 말이야.

그때 이 층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 려 왔다.

“헉!”

“히익!”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 층으로 통

하는 계단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 고 있는 직원들의 얼굴이 보였다. 아래층에서 소란이 일자 호기심을 참지 못한 것 같았다.

세드릭도 나를 따라 계단을 올려다 보았다. 세드릭과 눈이 마주친 직원 들이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얼른 몸을 숨긴 직원들이 수군거렸 다.

“바, 방금 그분 에반스 공작님 아 니야?”

“그런 거 같은데. 상자 안에 있던 건 아르키오스의 비늘 맞지? 공작님 께서 사장님께 선물하신 건가?”

“그런가 봐. 사장님의 인맥은 정말 대단하셔. 저 수정 비늘은 깎아서 향수병으로 만들면 딱이겠다.”

“그러게 말이야.”

……음, 이 건물은 다 좋은데 방음 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훤히 들리는 직원들의 목소리에 나 는 어색한 미소로 세드릭을 바라보 았다.

“누굽니까?”

“새로 고용한 직원들인데…… 다들 성실하고 향수를 좋아해요. ……목

소리는 좀 큰 것 같지만.”

“아이디어가 뛰어난 직원들이군요. 향수병을 만든다는 생각은 저도 못 해봤습니다.”

“……그러게요.”

나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 다. 수정 비늘을 활용할 수 있는 가 장 좋은 방법이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수정을 깎아 향수 병으로 만든다면 얼마나 보기 좋을 까. 영롱한 수정 너머로 예쁜 색깔 의 향수가 찰랑거린다면……,

“기뻐하시는 걸 보니 저도 기쁘군 요.”

세드릭의 말에, 뒤늦게 나는 표정 을 가다듬었다.

수정 비늘로 향수병을 만드는 상상 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그럼 전 받아주시는 걸로 알고 이 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시계를 흘긋 쳐다본 세드릭이 대답 할 새도 없이 인사를 했다. 다음 일

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선물 감사해요, 전하. 다음엔 저도 꼭 전하 취향에 맞는 선물을 준비할 게요!”

“취향에 맞는 선물?”

세드릭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게 있을지 의문이라는 듯한 얼굴이 었다.

취향 없는 사람이 어딨어.

나는 세드릭이 묻지도 않고 내 취 향을 파악한 것처럼, 머지않아 꼭

그의 취향에 맞는 선물을 하리라 다 짐 했다.

“네! 기대하세요.”

그러자 세드릭이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살짝 풀어지며 사르르 녹 는 미소를.

“기대 하겠습니다.”

세드릭의 마차가 멀리 떠나간 것을 확인한 리나가 환호성을 질렀다.

“아가씨! 이제 로터스 녀석 콧대를 콱 밟아줄 수 있겠어요!”

“로터스? 로터스가 누군데?”

나는 세드릭의 마차에서 시선을 떼 고 물었다.

“아, 매그너스 향기 백화점의 직원 이에요. 자기네 향수병은 모두 수정 을 깎아 만든다고 어찌나 자랑하던 지! 이젠 그 녀석도 할 말이 없겠 죠!”

리나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내가

매그너스와 견원지간인 것처럼 리나 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는 모양이었 다.

나는 들떠 있는 리나를 향해 뜬금 없는 소리를 했다.

“리나. 세드릭 전하는 뭘 좋아하실 까?”

“네?”

“전하께도 취향이 있을 거 아니야. 가령, 내가 희귀한 허브에 사족을 못 쓰고, 리나 네가 고양이를 좋아 하는 것처럼.”

사를로트는 꽃꽂이하기 좋은 화병 을 좋아하고, 루나와 사샤는 단것이 라면 정신을 못 차린다. 멜리사는 만년필을, 에일린과 릴리는 장신구 를 좋아했다.

나는 어렵지 않게 주변 사람들의 취향을 하나씩 떠올려낼 수 있었다.

그러면 세드릭은? 세드릭은 뭘 좋 아하지?

‘……와인 마시기?’

볼 때마다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와인 선물은 저번에 했는 데……,

나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드릭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난 세드릭의 비밀스러운 과거에 대 해서도, 그의 광증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전부 원작을 읽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정보였다.

하지만 그의 일상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어떤 꽃을 좋아하 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쉴 때

는 주로 뭘 하며 머리를 식히는지.

물론 그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것 도 있긴 했다.

그가 생각보다 자주 웃는다는 것 도, 냉랭한 겉모습과 달리 짓궂게 굴 때도 많다는 것도, 연상 효과를 철석같이 믿을 만큼 순진한 구석이 있다는 것도.

하지만 이런 정보는 선물을 고르는 데 아무 도움도 안 된다. 나는 한숨 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그의 취향에 맞는 선물을 줄 수 없었다.

‘분발해야지.’

세드릭이 뭘 좋아하는지 알아내서, 완벽한 선물로 갚아주자.

나는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아르키 오스의 비늘을 바라보며 다시금 다 짐했다.

멜리사 크라운은 휘릭휘릭 만년필 을 돌렸다.

칸에 대한 실마리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돌아온 게 분명한데, 새로운 본거지를 어디로 잡았는지, 의뢰를

받고는 있는 건지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알아낸 건 딱 하나였다. 새로운 칸 의 수장이 전대 수장의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이 적갈색 빛을 띠고 있다는 것.

‘쓸모없는 정보야.’

머리카락 색이야 염색을 하면 언제 라도 바꿀 수 있었다.

멜리사는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아무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건, 일 부러 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건

데……, 혹시 벌써 중요한 의뢰를 받은 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후배 기자 가 벌떡 일어났다.

“헉! 멜리사 선배!”

“아, 깜짝이야. 왜 그래?”

“지금 들어온 소식인데요. 아리엘 윈스턴 영애가 가게를 다시 열었대 요! 그 ‘향기 살롱’이요!”

“뭐?”

멜리사가 만년필을 책상에 콱 박았 다. 잉크가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이번 호 ‘문화예술’란 뒤엎어. 이 번엔 향기 살롱 특집으로 간다.”

“예에-?”

방금 막 원고를 마감한 후배 기자 가 비명을 질렀다. 멜리사는 못 들 은 척을 하고 진하게 커피를 내렸 다.

“질서를 지켜주세요.”

“번호표를 잃어버리시면 재발급은 어렵습니다.”

직원들이 능수능란하게 손님들을 통제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랑 리나, 둘만 있을 땐 줄을 지 켜달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도 꼭 새 치기범이 나타났었는데, 지금은 이 렇게 손님이 많은데도 다들 순한 양 들 같았다.

물론 모든 손님이 그런 건 아니었 다. 가끔 돌발행동을 하는 손님도 있었다.

“벌써 두 시간을 기다렸다고!”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약혼녀 를 만나기로 한 시간이 곧인데 이곳 향수를 꼭 사 가기로 해서…… 헤 헤, 여기 얼마 안 되는 금액이지만 받으시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슬쩍 뇌물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 나 둘 다 직원의 차가운 눈빛에 제 압되 었다.

“다른 손님께 폐를 끼치시면 입장

이 제한됩니다.”

“번호표에 적힌 순서를 반드시 준 수해주셔야 합니다. 따르지 않으시 면 입장이 제한됩니다.”

단호한 직원의 태도에 안하무인으 로 행동하던 손님들이 깨갱 꼬리를 내렸다. 직원들의 확실한 대처가 몹 시도 흡족했다.

‘진작 이럴걸!’

진작에 직원들을 고용했어야 했다. 바보같이 인건비 좀 아끼겠다고 고

용을 미루다니…… 이렇게 쾌적하고 편안한걸!

“저기…… 아리엘 님,〈보랏빛 밤 의 끝자락〉을 시향해보려는데요.”

연보라색 나들이 드레스를 입은 영 애가 나를 불렀다. 나는 기꺼이 손 님에게 다가가 시향을 도와주었다-

연보라색 영애가 어색한 손짓으로 시향지를 받아들었다.

아무래도 향수 가게에 처음 온 것 같았다.

‘귀여워.’

나도 모르게 짙은 미소가 떠올랐 다. 뿌리는 것까지 도와주기 위해 다시 시향지를 받아든 순간이었다.

“어…… 혹시, 아리엘 님?”

연보라색 영애가 갑자기 말을 더듬 더니, 조금 빨개진 얼굴로 물었다.

“지금 아리엘 님에게서 나는 향기 가 어떤 향수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것도〈보랏빛 밤의 끝자락〉인가

요?”

“ 아.”

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 다.

“아뇨, 이건 다른 향수예요. 오늘부 터 새로 판매하기 시작한 제품이랍 니다.”

“저, 그…… 그것도 한 번 시향해 볼 수 있을까요?”

연보라색 영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줍음이 많은 성격인 듯했

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나는 중앙 매대로 걸어가며 재고를 확인했다. 오늘 하루 동안 날개 돋 친 듯 팔려나간 것치고는 다행히 아 직 꽤 남아 있었다.

일랑일랑과 바닐라, 용연향을 조합 한 플로리엔탈 계열의 향수,〈매혹 의 미학〉. 보름간의 칩거 끝에 탄생 한 신상품은 미친 듯한 속도로 팔려 나가고 있었다.

내가 한 마케팅이라곤 간단했다. 그냥 내 몸에〈매혹의 미학〉를 뿌 린 채 손님들을 응대한 게 전부였 다.

그리고 내가 응대한 손님들 중 절 반은 내가 뿌린 향수의 이름을 묻고 는 구매까지 해갔다.

나는 시향지에 향수를 뿌려 연보라 색 영애에게 건넸다. 향을 들이마신 영애가 몽롱한 눈을 했다.

“향이 엄청 깊고, 기묘하네요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매혹의

미학〉을 처음 맡아 본 사람들은 다 들 비슷한 감상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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