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화〉
“와……:’
“넓다.”
직원들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널찍한 작업장 안에는 마도 기계들 이 자리해 있었다. 조향을 돕는 기 계들이었다.
하나하나 사용법을 설명하자, 직원 들이 경청하는 얼굴로 내 말을 귀담
아들었다. 수첩을 꺼내 열심히 메모 하는 직원도 있었다. 손을 들고 적 극적으로 질문하기도 했다.
‘가게 운영할 때 제일 힘든 게 직 원들 관리라더니, 아직까진 순조로 운데?’
선생님이 된 것 같아서 조금 재밌 기도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서 마도 기계 사용법 설명이 끝났 다. 이젠 실습해볼 시간이었다.
“실습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휴
식 할까요?”
한 시간이나 내내 떠들었더니 목이 좀 탔다.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저 ‘사장님’ 소리…… 역시 좀 낯 간지럽다. 나는 괜히 뺨을 긁으며 리나가 가져다준 찻잔을 받아들었 다. 여름 바람이나 쐬면서 한잔할까. 좋은 생각 같아 나는 바로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
본 순간, 나는 하마터면 찻물을 뿜 을 뻔했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직원들이 깜짝 놀라 일어섰다. 나 는 얼른 직원들에게 괜찮다며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리곤 다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건물 앞에 아까는 없던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번쩍거리는 장식은 없지만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마
차였다.
거대한 마차 바퀴는 은빛으로 빛났 고, 마차 전체에 칠해진 값비싼 진 보랏빛 염료는 마차의 주인이 대단 한 재력가임을 암시했다.
그 휘황찬란한 마차 앞에, 세드릭 에반스가 기대어 서 있었다.
“리,리나. 공작 전하께서 언제부터 저기 서 계셨어?”
“네? 전하라니…… 히익! 공작님이 왜 저기 계시죠?”
세드릭을 발견한 리나가 소스라치
게 놀랐다. 나는 미간을 문지르며 일 층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 마차에 기대어 있던 세드릭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붉 은 눈이 단번에 나를 찾고는 웃음기 를 담았다.
“좋은 오후입니다, 레이디.”
“네, 좋은 오후…… 이긴 한데요. 전하께서 이곳엔 대체 어쩐 일이세 요?”
“어쩐 일이냐뇨. 걱정돼서 달려와 봤습니다.”
“네? 걱정이라요?”
세드릭이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내게로 숙였다. 그의 눈빛이 내 얼 굴 이곳저곳을 훑었다.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레이디께서 중병에 걸려 몸져 누우셨다고.”
“네에? 누가 중병에 걸려요?”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내 눈이 커다 래졌다.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쳐서 다리가 부러졌다는 소문도 있고, 불치병에 걸려 아예 시골로
내려갔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대체 왜 그런 무시무시한 소문 이……
그야 물론 내가 보름이나 두문불출 했기 때문이겠지만.
일부러 말없이 모습을 감춘 건, 신 제품을 만드는 동안 사람들의 궁금 증을 유발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과한 유언 비어가 퍼질 줄은 몰랐다.
“다들 상상력이 너무 뛰어나잖아 요!”
“글쎄요, 보름 동안 제도 그 어디 에서도 레이디를 본 사람이 없으니, 그런 소문들이 퍼져도 놀라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말한 세드릭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진실은 어느 쪽입니까? 중 병? 다리 부상? 요양?”
“……셋 다 아니에요. 그리고 전하 껜 아닉시아 향을 드리면서 간단히 사정 설명하는 카드도 동봉했잖아 요.”
“직접 얼굴 보고 만나 거래하기로 했던, 그 아닉시아 향 말이지요.”
세드릭이 뜬금없이 계약 사항에 대 해 언급했다.
그 점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없었 다. 아닉시아 향은 면대면으로 전달 할 것. 그렇게 계약서를 수정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죄송해요, 전하. 요즘 너무 바쁜 일이 많아서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 지 못하고 있네요.”
“레이디께서 큰일을 하시느라 바쁘
신 거니 어쩔 수 없지요. 계약 불이 행의 대가는 ‘원하는 것 들어주기’ 한 번으로 봐 드리겠습니다.”
원하는 것 들어주기, 라니……, 순간 불꽃놀이를 구경하던 지난 밤
이 떠올라 얼굴이 홧홧해졌다.
갑자기 열이 오르는 게 정말 여름 은 여름인 모양이었다.
나는 일부러 헛기침을 하곤 말했 다.
“알겠어요, 전하. 잘못은 잘못이니
까요.”
‘원하는 것’의 경계가 모호하긴 했 지만, 불꽃놀이 때도 큰 요구를 하 진 않았으니까.
내가 순순히 대답하자, 세드릭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게 쉽게 허락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네?”
“레이디. 모르십니까? 남자가 여자 에게 ‘소원’ 따위를 운운하는 건, 구 십구 퍼센트가 수작 부리는 겁니
다.”
“……예?”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세드릭이 고개를 돌린 채 마치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보면 레이디께선 경계심이 너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예……?”
나는 계속해서 눈을 끔뻑였다. 경 계심이 없단 소린 평생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수작 이라니…… 어떻게 이야기가 그렇게 돼요?”
“그렇게 됩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소원 들어주기’ 내기는 그런 용도 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말도 안 돼요!”
내가 외쳤다.
“그럼 건국제 날 했던 내기는요? 전하께서 그런 의미로 제안하셨던 건 아니었잖아요?”
세드릭이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 았다.
“……구십구 퍼센트라고 했지, 백 퍼센트라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세드릭이 슬쩍 눈을 피했다.
나는 팔짱을 꼈다.
“이것 봐요. 벌써 예외가 있잖아요. 소원 내기가 수작 부리는 거라는 전 하의 이론은 말이 안 돼요.”
“수작 부리는 거 맞습니다. 제 전 재산을 걸어도 좋습니다.”
전 재산을 좀 더 소중히 여기셔야 할 것 같은데요. 나는 가늘게 뜬 눈 으로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왜 이렇게 이상한 주제로 다투게 된 거지. 세드릭도 같은 생 각을 한 모양이었다. 헛기침을 한 세드릭이 말했다.
“아무튼, 무사하신 것 같아 다행이 군요.”
“물론이죠. 카드 말미에 신제품을
개발하는 것뿐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신제품은 무사히 개발하셨습니 까?”
세드릭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미소 가 떠올랐다.
나는 조향실에서 잠들어 있는 내 신제품을 떠올렸다.
보름간 수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 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건 생각나지 도 않았다.
머릿속에 남은 건 향수를 완성하고 유레카를 외치던 그 순간뿐이었다.
“네. 무사히 완성했어요.”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더 짙게 웃 었다. 세드릭이 그런 나를 보며 미 소 지었다.
“기뻐하시는 것 같아 저도 기분이 좋군요. 사실 오늘 여기에 온 것은 선물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네? 선물이요?”
“아리엘의 향기 살롱 재개장 기념 선물입니다.”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였 다. 나는 설렘을 감추며 말했다.
“정말요? 신경 써주시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전하.”
“그냥 가볍게 준비한 선물입니다. 부담없이 받아주십시오.”
세드릭이 사용인에게 눈짓을 보냈 다. 사용인이 얼른 마차 문을 열었 다.
나는 열린 마차 문 너머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머릿속에선 두 가지 생각이 충돌했다.
저번에 받은 보석 목걸이도 아직 못 갚았잖아?
에이, 선물인데 안 갚으면 뭐 어 때! 어차피 세드릭 에반스는 엄청 부자인걸!
마음은 후자 쪽으로 기울고 있었지 만, 나는 양심상 전자를 택했다.
비록 세드릭과 나의 재력에 크나큰 격차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선 기브 앤 테이 크를 지켜야하니까.
보석 목걸이도 그렇고, 이번에 받 을 선물도 그렇고, 언젠가 꼭 비슷 한 급의 선물로 보답해야……으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살짝 입을 벌렸다. 사용인이 마차 안에서 가지 고 나온 선물이 지나치게 컸기 때문 이었다.
나는 건장한 사용인이 품 안 가득 안고 있는 선물을 멍하니 바라보았 다.
“음전하? 선물이 너무 크지 않나요?”
너무 큰 선물을 받으면 갚을 길이 요원하다. 나는 당황한 눈으로 세드 릭을 올려다보았다. 세드릭이 어깨
를 으쓱이며 아까와 비슷한 말을 했 다.
“크기만 크지 별 것 아닙니다.”
“그렇군요……
“여기서 개봉할까요, 공작 전하?”
사용인의 물음에 나는 그제야 세드 릭을 너무 오래 세워 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 내 정신 좀 봐. 전하, 어 서 들어오세요.”
나는 뒤늦게 세드릭과 사용인을 데 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사용인 이 테이블 위에 커다란 선물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럼 열겠습니다.”
사용인이 그렇게 말하며 포장을 해 체했다. 고급스러운 상자가 드러났 다. 상자엔 눈에 익은 직인이 찍혀 있었다.
‘저건 상인 조합의 직인 아닌가?’
이번 건국제 때 공개 경매장을 운 영했던 제도 상인 조합. 나는 고개 를 갸웃거리며 개봉되는 상자를 바 라보았다.
아름다운 빛이 열린 틈 너머로 빠 져나왔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영롱한 빛깔이 시야를 가득 메웠 다. 감탄사조차 잊게 하는 아름다움 이었다.
“……전하.”
나는 조금 뒤에야 간신히 입을 열 었다.
“전하, 이건……-”
거리 축제에 참가했던 나는 이 물 건이 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아르키오스의 비늘이잖아 요.”
“그렇죠.”
세드릭이 담담히 끄덕였다.
나는 다시 아르키오스의 비늘을 바 라보았다. 영롱하고 반짝이는 수정 비늘이 수십, 어쩌면 백 개도 넘어 보였다.
게다가 비늘은 하나하나가 성인 남 성 손바닥만큼 큼지막했다.
보석이나 장신구에 관심이 없는 나 조차도 이 수정 비늘의 가치가 어마 어마하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 었다.
“그때 경매에 참여하셨던 게 혹시
제게 선물하기 위해서였던 건가요?”
나는 아직도 믿기 힘든 목소리로 물었다.
그날 세드릭이 공개 경매에서 수정 비늘을 낙찰받긴 했다.
낙찰가가 엄청 높아서 모두 수군거 렸었지.
낙찰가가 대체 얼마였더라? 머리를 열심히 굴려 보았지만 떠오르지 않 았다. 너무 큰 금액이라 감당이 안 된 뇌가 기억을 지워버린 것 같았 다.
물론 세드릭에겐 그 정도 금액도
대단한 건 아닐 거다. 하지만 객관 적으로 생각했을 때, 누군가에게 선 뜻 건넬 만큼 가벼운 선물은 절대 아니 었다.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 아뇨.”
아, 아니시구나. 그럼 그렇지…… 가 아니라.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게 아니면 왜 여기까지 가져온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