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화〉
공고문을 올리면서 나는 원하는 직 원상을 몇 개 생각해 보았다.
첫째, 성실하진 않아도 무단결근은 하지 않을 사람.
둘째, 책임감이 투철하진 않아도 기밀 유출은 안 할 사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셋째.
진심으로 향을 좋아하는 사람.
향에 정통할 필요는 없었다. 허브
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분자 구조를 알 필요는 더 더욱 없었다.
그냥 산책 중 어디선가 맡은 꽃냄 새에 기분 좋아지는 사람이면 좋을 것 같았다.
나와 리나는 라비를 응접실에 둔 채 잠시 복도로 나왔다.
“어때, 리나?”
리나는 ‘아리엘의 향기 살롱’ 첫 공개 채용의 정식 면접관이었다. 나 를 제외하면 유일한 면접관이기도
했고.
“전 대찬성이에요.”
리나가 결연히 말했다.
“왜?”
“아리엘 아가씨의 향수를 좋아하잖 아요.”
“……그게 전부야?”
“당연하죠. 취향이 고급스럽다는 이야기니까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 론 나도 내 향수를 자랑스럽게 생각 하긴 하지만, 리나는 나보다도 심했 다.
“팔불출.”
“취향이 고급스러운 거라고 해 주 세요, 아가씨!”
나는 픽 웃으며 리나의 머리를 쓰 다듬었다.
아무튼, 그럼 결정은 난 건가?
“리나도 찬성이고, 나도 찬성이니
까 라비 씨는 합격이네.”
라비 뮤렌느가 첫 공개 채용의 첫 합격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내 가게가 처음으로 가내 수공업을 벗어난 순간이기도 했다.
‘좋아. 순조로워.’
2호점 계획도 순탄히 진행되고 있 었다.
더 많은 직원, 더 넓은 작업실, 그 리고 ‘아리엘 윈스턴’이라는 조향사 의 인지도.
마지막으로 딱 하나가 더 필요했 다.
이 모든 것들을 뒷받침할 새로운 향수.
나는 조향실에 보관해둔 용연향을 떠올렸다. 잘 잠들어 있을 내 보물 으
“알지? 리나. 직원들 채용이 끝나 면 난 바로 조향실에 틀어박힐 거 야.”
“네, 각오하고 있어요. 최소 보름은 두문불출하실 거라고 했잖아요.”
리나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 다.
“그래도 식사는 끼니마다 꼭 챙겨 드셔야 해요!”
“물론이지, 리나. 굶어 죽으면 기껏 만든 신제품도 못 파는걸.”
나는 웃으며 말했다.
부 후 노
여태까지 내가 만든 향수는 플로럴
계열이 대다수였다. 로즈, 자스민, 라일락 등 특정 꽃의 향기를 컨셉으 로 잡은 향수가 많았다.
나머지는 상쾌한 시트러스 계열이 나, 청량한 우디 계열.
대체로 내 향수 가게에서 파는 제 품들의 향은 달콤하면서도 가벼웠 다. 어린 귀족 영애들이 아무 부담 없이 뿌리고 다닐 수 있을 만한 향 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한창 작동 중인 마도기계를 바라보면서 골몰했다.
‘이번엔 색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 은데.’
물론 내가 유독 플로럴과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를 좋아하긴 했지만, 내 가 좋아하는 향은 그게 전부가 아니 었다.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은 향수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마도기계를 지그시 노려보며 나는 생각에 골몰했다.
저 기계 안에서는 용연향이 알코올 에 담겨 숙성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용연향은 최소 2년 정도는 숙성시켜 사용해야 한다. 하 지만 내겐 그럴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이 세계는 마도학이라는 신 비의 학문이 놀랄 만큼 발달해 있었 다.
‘마도학 거리’를 이 잡듯이 뒤진 결과, 나는 2년이라는 시간의 간극 을 메울 수 있는 마도기계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앞으로 5일이 면 용연향에서 향료를 추출할 수 있 었다.
나는 익히 알고 있는 그 향기를 떠올렸다.
용연향을 단독으로 사용하는 경우 는 없다. 용연향 자체에선 은은한 흙냄새 비슷한 향이 날 뿐이었다.
하지만 알코올에 녹여 향수에 첨가 하면, 특유의 미묘한 향이 더해져 더욱 풍부하고 고급스러운 향기를 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용연향을 넣으면 향수 의 향이 훨씬 오래 남았다. 나는 이 러한 특성을 어떻게 하면 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자주 만들던 플로럴 계열도 좋겠 지.’
물론 향긋한 플로럴 계열에도 용연 향은 잘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신제품을 파격적 으로 만들고 싶었다. 모두의 예상과 기대를 깨고 싶었다.
‘여태 내가 잘 사용하지 않던 향료 가 뭐가 있지.’
나는 벌떡 일어나 재료 캐비닛으로 향했다. 내 손가락이 캐비닛에 붙은 향료 이름을 하나하나 훑었다.
‘자스민, 일랑일랑, 베르가못
늘 애용하던 향료들을 지나.
‘샌달우드, 파출리.’
원래 이번 여름 시즌 신상품에 사 용하려 했던 향료들도 지나쳤다.
곧 내 손가락이 어느 한 곳에 멎 었다.
‘바닐라.’
나는 이름표에 적힌 글자를 천천히 읽었다.
캐비닛을 연 나는 안에 든 바닐라
를 꺼낸 뒤, 코에 대고 천천히 향을 음미했다.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향 기가 코끝에 감돌았다.
한 천재 조향사가 이런 말을 했었 다. 바닐라를 첨가하는 순간 향수는 놀랄 만큼 에로틱해진다고.
바닐라의 달콤하면서 관능적인 향 과 용연향을 더하면 아주 매력적인 향이 탄생할 것 같았다. 나는 노트 에 일단 바닐라와 용연향이라는 이 름을 적어넣곤, 그 위에서 펜촉을 까딱거 렸다.
‘기본 컨셉은 정했는데. 이 위에
뭘 올리지?’
바닐라를 생각하니 자연스레 파우 더리한 향기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분명 잘 어울리는 조합이기는 했다. 지금이 여름만 아니었어도 당장 노 트에 적어넣었을 터였다.
‘금방 한여름이 될 텐데. 과연 사 람들이 텁텁한 파우더리 향을 뿌리 고 다닐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향수 산업은 ‘계절감’이 무척 중요했다.
파우더리한 향기는 겨울에는 따스 하고 포근하게 느껴지지만, 여름엔 답답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여름이니까 상큼한 과일 향을 넣 어 볼까.’
내 손가락이 레몬과 자몽 사이를 오갔다. 나쁘진 않은 느낌이었지만, 평범한 것 같았다. 뭔가 더 끌리는 조합이 있을 것 같았다.
으으음.”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골똘히 고 민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재료 캐 비닛 사이를 정처 없이 훑었다.
‘ 일랑일랑……/
화려하고 짙은 꽃향으로 사랑받는 향료.
내 손끝이 홀린 듯 일랑일랑의 이 름표 위를 쓰다듬었다.
일랑일랑에는 ‘사랑의 전령사’라는 별명이 있다. 특유의 매혹적인 향 때문이었다.
나는 가볍게 일랑일랑의 향을 들이
마셨다. 종종 신혼부부의 침실에 뿌 리기도 한다는데, 그 이유를 알 것 도 같았다.
그만큼 사람을 홀리는 향기였다.
‘바닐라와 잘 어울리겠는데.’
바닐라로 잡은 관능적인 컨셉을 일 랑일랑이 한껏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방향을 잡자 그다음은 쉬웠다. 나 는 쉴 새 없이 캐비넷을 여닫으며 노트에 아이디어를 적어나갔다.
미들 노트에 일랑일랑과 카네이션,
텁텁한 느낌을 잡기 위해 탑 노트로 는 베르가못을……오
머릿속에서 실험을 수없이 반복하 며 나는 레시피를 완성시켜 나갔다.
“아리엘 아가씨, 식사 가져다 놓았 어요. 잊지 말고 챙겨 드세요!”
밖에서 리나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 친 것 같았지만, 내 머리엔 전혀 들 어오지 않았다.
부 쏘 쏘
“아니타 영애, 그 소식 들으셨어 요?”
청자색 모자를 쓴 영애가 말했다. 그녀의 모자에는 가짜 아이리스 꽃 잎이 앙증맞게 매달려 있었다.
“윈스턴 영애의 가게가 오늘도 문 을 안 열었대요!”
“어머나. 오늘도요?”
살롱에 모인 영애들이 수런거렸다.
“윈스턴 영애께 무슨 일이 생기신 건 아니겠죠? 사교계에도 얼굴을 비 치지 않고 계시다던데……
“제가 어제 샤를로트 영애의 티파 티에 참석했는데, 거기서도 윈스턴 영애를 못 뵈었어요. 두 분은 친분 이 깊어서 웬만하면 서로의 행사에 참석하시잖아요? 이상한 일이에요.”
“확실히 이상하네요. 음, 휴양이라 도 떠나신 건 아닐까요?”
“아아, 그럼 안 되는데. 매일 뿌리 고 있는〈장미 정원〉이 이제 곧 바 닥난단 말이에요!”
“전〈보랏빛 밤의 끝자락〉을 빨리 사고 싶어요. 이번에 들은 얘긴데,
황후 폐하께서 황실 정원에 아이리 스를 심으라고 지시하셨다면서요? 그 이야길 들으니 관심이 생기지 뭐 예요!”
“어머나, 정말요? 황후 폐하께서는 유행에 큰 관심이 없으신 분이시잖 아요.”
“이제 아이리스가 단순한 유행이 아니게 되었단 뜻이죠. 세일라 항구 처럼 우리 제도에서도 아이리스 꽃 밭을 보게 되는 날이 머지않았을걸 요?”
“정원뿐일까요? 듣기로 황후 폐하 께서 매일 부채에〈보랏빛 밤의 끝 자락〉을 뿌리신다던데요.”
“아아, 저만 유행에 뒤처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빨리 하나 장만하 고 싶은데!”
“저도요!”
“그런데 혹시 그 얘기 들으셨어요? 저도 어쩌다가 입수한 정보인데…… 윈스턴 영애께서 신상품을 개발하고 계시다던데 요?”
“네에? 벌써요?〈보랏빛 밤의 끝 자락〉이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요?”
“이번엔 어떤 작품일까요? 잘 사용 하시는 꽃향기 계열이겠죠?”
“그럴 확률이 높아 보여요. 아아,
궁금해라!”
여기저기서 아쉬운 소리가 터져나 왔다. 영애들이 한목소리로 불평을 토로했다.
“대체 왜 가게 문을 안 여시는 거 람!”
가게 문을 열고 문밖으로 발을 내 디뎠다. 내 손에는 소중한 향수 레 시피 노트가 꼭 쥐어진 채였다.
오랜만에 맡는 바깥바람이 조금 무 덥게 느껴졌다.
‘그새 초여름이 되었나?’
그렇게까지 오래 틀어박혀 있진 않 았던 것 같은데. 고작해야 보름 정 도? 하지만 바람에선 분명 여름 냄 새가 났다.
마차에 올라타며 나는 리나에게 물 었다.
“벌써 여름인가 보네, 리나. 내가 그렇게 오래 틀어박혀 있었나?”
“조향실에 보름이나 계셨으니까, 엄청 오래 안 나오셨죠.”
리나가 말했다. 조금 삐진 듯한 목 소리였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걱정했어? 미안.”
“뺨이 홀쭉해지셨잖아요! 또 끼니 안 챙기고 작업만 하신 거죠!”
“홀쭉해지다니? 전혀 아냐. 오히려 쪘을걸? 방에 콕 틀어박혀서 리나가 준 고열량 음식만 먹었잖아.”
리나를 달래는 동안 마차가 목적지
에 도착했다. 보름쯤 전 임대 계약 을 완료했던 건물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네 명의 직 원들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보 름 전 채용을 확정한 직원들 중, 조 향 파트를 맡게 된 직원들이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셨습니까!”
조르르 서서 인사하는 모습이, 마 치 병아리들 같았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분명 공정한 평가를 거쳐 채용한
직원들인데, 왜 다들 리나 같은 느 낌이 들지? 나도 모르게 내 취향대 로 뽑았나?
“만나서 반가워요, 여러분. 여러분 들과 함께 작업하는 첫날이네요.”
음, 이렇게 인사하는 게 맞나? 직 원을 고용해본 건 처음이라 감이 안 왔다-
직 원들이 나를 초롱초롱한 눈빛으 로 쳐다보았다. 일곱 쌍의 시선이 내가 왼쪽으로 움직이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오른쪽으로 따 라 이동했다.
나는 직원들을 데리고 이 층으로 이동했다. 그새 개조 공사가 완벽히 끝난 이 층은, 이전과 전혀 다른 공 간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