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화〉
“혹시, 이십 년 전에……『
그때 엄청난 함성이 귓가를 메웠 다.
나는 깜짝 놀라 밤하늘을 올려다보 았다. 피날레를 장식하듯 온갖 화려 한 불꽃이 수천 가지 빛깔로 피어오 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넋 놓고 그 광경을 구 경하다 정신을 차리고 세드릭을 바
라보았다.
“네? 뭐라고 하셨죠?”
세드릭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입을 닫아버 렸다.
평소였다면 ‘뭐예요? 말을 하다 마 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요.’라 고 쏘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섣불리 입을 열 수 가 없었다.
아직 세드릭이 체온이 닿아 있는 듯 어깨가 화끈거렸기 때문이었다.
부드럽게 어깨를 쥐던 그의 손이 아직도 나를 옥죄고 있는 것 같았 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괜히 크 게 심호흡을 해 밤공기를 들이마셨 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자 간질간질 한 기분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도 같 았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세드릭이 말했다.
뜬금없는 감사 인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드릭이 쓰게 웃었 다.
“무례한 요구를 들어주셨지 않습니 까. 감사합니다, 레이디.”
세드릭이 진지한 얼굴로 살짝 고개 를 숙였다.
“괜찮…… 흐, 흠!”
입을 열자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 왔다. 나는 얼른 헛기침을 했다.
“괜찮아요. 잠깐이었는걸요. 게다가 별것도 아니었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너무 애쓴 탓일까. 무심하다 못해 새침한 목소 리가 흘러나왔다.
세드릭이 그런 나를 보곤 미소를 지었다. 내 목소리가 웃기게 들린
걸까. 그의 미소가 점점 더 짙어지 더니,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별 것 아니었다면 다행이군요.”
그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순간 지 금 날 놀리는 거냐고 화를 내고 싶 었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눈꼬리까지 접어가며 웃음을 터뜨 리는 세드릭을 그냥 가만히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환한 얼굴이 낯설어서.
낯설고, 신기하고, 또 이질적이어서.
나는 한참 동안 그의 미소에서 시 선을 떼지 못했다.
소 쏘
“……엘 님. 아리엘 님!”
“아리엘 니임!”
헉.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루나와 에일린이 동그란 눈으로 나 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얼마나 넋 놓고 있었던 거야.
“아이, 참.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 똘히 하세요?”
“저희 목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루나, 에일린. 아리엘 님이 오늘 피곤하신 거 같은데……, 오늘은 일 찍 돌아가자.”
사샤가 루나의 옷소매를 잡아끌었 다.
나는 얼른 고개를 휘저었다.
“아냐, 아냐! 난 아무렇지도 않은 걸!”
다급한 외침에 소녀들이 놀란 눈으 로 날 쳐다보았다.
나는 오른손으로 왼쪽 손등을 찰싹 쳤다.
‘별 대단한 일도 없었는데, 왜 자 꾸 불쑥불쑥 떠오르는 거야?’
그래, 불꽃놀이가 굉장해서 그런 걸 거야-
대충 납득한 나는 포크를 쥐었다.
“어머, 초콜릿 넣은 크로아상이네? 누가 사 왔어? 잘 먹을게!”
나는 일부러 활기차게 외치며 크로 아상을 썰었다. 소녀들 몫까지 썰어 주자,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면 서도 아기새처럼 잘도 받아먹었다.
소녀들이 돌아간 오후, 나는 마차 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내 가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건물이었다.
“오셨군요!”
머리가 반쯤 벗겨진 남자가 얼른 나를 맞이했다.
“오늘 고객님의 안내를 맡은 중개 업자 마론 제론트라고 합니다, 영애. 어서 들어가시죠. 기다리고 있었습 니다.”
건물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전에 사시던 후작 부인께서 노후 를 위해 시골로 가게 되시면서 비게 된 집입니다. 풍광도 잘 들고 위치 도 완벽하죠. 여기는 후작 부인께서 침실로 쓰시던 방인데, 남향으로 나 있어서 햇빛이 아주 잘 듭니다.”
마론이 큼지막한 방을 소개하며 말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직원들 휴게실로 쓰면 되겠네.
“그리고 이 방은 서재였는데, 공간 이 아주 넉넉하죠?”
여긴 탕비실로 쓰면 되겠고.
“이 방은 창문이 안 나 있습니다. 후작 부인께서 암실로 쓰셨거든요.”
여긴 수면실로 쓸까.
나는 머릿속으로 대강의 스케치를 그리며 건물을 둘러보았다. 마론이 이어서 이 층을 보여주었다.
“먼저 이 방은……/
“아, 마론 씨. 이 층은 방마다 설 명해주실 필요 없어요.”
“네?”
마론이 눈을 끔뻑였다.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 층은 벽을 모두 허물 예정이거 든요.”
“저, 전부요?”
“네. 이 층은 전부 작업실로 꾸밀 거예요.”
나는 노래하듯 말하며 이 증을 둘 러 보았다.
벽을 모두 허물면 제법 널찍할 것 같았다. 조향 작업을 하기에 모자람 이 없을 듯했다.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마론이 얼른 따라붙었다.
“아, 아! 작업실로 쓰실 예정이셨 군요! 아주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나는 마론을 돌아보았다.
“이 건물로 할게요.”
이 건물은 여러모로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내 가게와 그리 멀지도 않았고, 최 소 대여섯 명이 함께 작업할 수 있 을 만큼 넓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든 것은 개 조 공사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는 것이었다.
“훌륭하신 선택입니다. 당장 계약 서를 가져오겠습니다!”
“개조 공사는 대략 며칠 정도가 걸 릴까요?”
“알아봐야겠지만 아마 보름이면 충
분할 겁니다!”
곧 나는 마론이 가져온 계약서에 내 이름을 휘갈겨 썼다. 임대 계약 이 완료된 것이다.
매달 임대료를 내야 한다는 게 뼈 아프긴 했지만, 이 정도는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여유 자금이 없었던 옛날과 달리, 이제 어느 정도 투자를 할 정도로 자금이 생겼으니까.
가게로 돌아가자 리나가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아가씨! 첫 번째 지원자가 와있어 요!”
“ 벌써?”
빠르네.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약속 시 간보다 삼십 분이나 이른 시간이었 다.
응접실로 들어가자, 다갈색 머리를 한 청년이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 다.
리나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라비 뮤렌느 씨예요. 작년에 제국
아카데미 화학과를 차석으로 졸업했 고요.”
제국 아카데미 차석 졸업이라니. 엄청난 인재였다. 나는 속으로 휘파 람을 불었다.
나를 알아본 라비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라비 씨. 만나서 반갑 습니다.”
“저,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라비가 꾸벅 인사를 하며 외쳤다.
왜 이렇게 기합이 들어가 있지? 나는 당황을 숨기며 말했다.
“먼저 지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라비 씨.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저야말로 지원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비는 도돌이표처럼 같은 말을 반 복했다.
긴장을…… 많이 한 건가? 그럴 필요 전혀 없는데.
나는 일부러 활짝 미소를 지으며 라비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
했다.
“원래 향수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네, 있었습니다! 화학과에 입학한 것도 그 때문이고요!”
관련된 전공을 선택할 정도로 향수 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나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걸쳤다. 이번엔 백 퍼센트 절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그러셨군요. 평소에 조향 작업도 종종 하셨었나요?”
“아, 조향은……7
라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내가 말실수를 했나? 당황하는 사 이 라비가 입을 열었다.
“시도는 많이 해 봤습니다만…… 책에 기록된 레시피를 따라 하는 게 고작입니다. 제가 창작한 레시피는 모두 실패했거든요.”
라비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그랬구나. 나는 안타까운 얼굴로 라비를 바라보았다. 내가 직
접 배합한 향수에서 신통치 않은 향 이 날 때의 그 기분, 나도 잘 알지.
“그러셨군요. 저도 그 마음 이해해 요.”
“아리엘 님께서 이해하신다고요?”
라비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내 말 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이 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 였다.
“네, 그럼요. 실패는 언제 경험해도
씁쓸하죠.”
“아리엘 님 같은 분께서는 실패 같 은 건 안 하실 줄 알았어요!”
라비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웃 어 버렸다.
“그럴 리가요. 제가 무슨 세기의 천재도 아니고요.”
“세기의 천재 맞으시잖아요!”
라비가 외쳤다. 목청이 하도 커서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끔뻑였다.
“〈장미 정원〉을 처음 맡은 순간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시나요? 그 렇게 싱싱하고 깊은 장미향을 재현 하는 방법은 책 속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어요. 아리엘 님의 향수가 제겐 곧 교과서였어요!”
라비가 두 손을 불끈 쥐며 말했다.
나는 멍하니 라비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연기처럼은 안 보였다. 아무래도 이 지원자님은 원래부터 내 향수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첫사랑의 법칙〉도 너무 완벽해
요! 라일락은 흔해서 자칫 뻔한 느 낌이 날 수도 있는데〈첫사랑의 법 칙〉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오히려 생생하고 신선했죠! 그리고……,”
라비가 그 뒤로도 내 향수들을 줄 줄 읊었다.
리나가 흐뭇한 얼굴로 라비를 바라 보더니 맞장구까지 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끝이 안 날 것 같아 서 나는 얼른 둘을 말렸다.
“자세한 소감 정말 고마워요, 라비 씨.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 요.”
“넵!”
“어떤 계열의 향을 제일 좋아하세 요?”
“플로럴이요! 특히 섞지 않고 하나 의 꽃에만 집중한 향기를 좋아합니 다!”
취향이 뚜렷한 건 좋은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그 다음으로 좋아 하는 향은요?”
“시트러스 계열도 좋아합니다! 맡 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향^요!”
그 뒤로 같은 문답이 세 번 더 오 갔다.
라비는 그때마다 다양한 대답을 했 다. 좋아하는 향이 최소 다섯 종류 는 된다는 이야기였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