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화〉
인파가 너무 몰리자 세드릭은 억지 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 나마 숨통 트이는 곳으로 나를 이끌 었다.
“휴, 좀 살 것 같네요.”
막다른 골목길 앞에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옆 건물 때문에 불꽃이 반 정도밖에 안 보이긴 했지만, 사 람들 사이에서 압사당하는 것보단 나았다.
“안색이 하얀데. 괜찮은 겁니까?”
세드릭이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할 새가 없었다. 언제 또 사람들이 몰려들었는지 세드릭과 나를 밀어댔기 때문이었다.
“하아.”
세드릭이 낮게 한숨을 뱉었다. 그 의 오른팔이 내 머리 위를 짚었다. 한쪽 팔로 인파를 버티며 세드릭이 말했다.
“당분간은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겠 군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습 니다. 그나저나 괜찮으신 거 맞습니 까, 레이디?”
세드릭이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지금 나와 세드릭의 사이는 무척 가까웠다.
하지만 사람들이 계속해서 세드릭 의 등을 밀어대는 통에 조금씩 더 가까워지는 상황이었다.
세드릭은 지금 셔츠만 한 장 입은 상태였다. 망토를 걸칠 때 거추장스 럽다며 자켓을 버리고 나온 탓이었 다.
단추가 두 개 풀린 셔츠는 목덜미 를 훤히 내보였다.
시선을 억지로 올리지 않으면 세드 릭의 목울대를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눈앞의 목울
대가 오르락내리락거렸다.
물론 나는 다른 영애들처럼 예법 교육을 제대로 받거나, 형식적인 걸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코앞에서 성인 남성 의 목덜미를 빤히 바라보는 게 예의 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한껏 고개를 든 채 억지로 세드릭 과 눈을 맞추자 그가 웃었다.
“목 안 아픕니까?”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 개를 저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인파가 줄어 들면 바로 데리고 나갈 테니……
나는 이번에도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섣불리 입술을 움직이기 도 힘들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기 때 문이 었다.
그때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 야아!”
“피터, 저것 좀 보렴!”
굉장한 불꽃이 터진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빼 보았 지만, 빽빽한 사람 장벽 탓에 밤하 늘이 가려 보이지 않았다.
꿈지럭대는 나를 내려다보던 세드 릭이 웃으며 말했다.
“혹시 안 보이십니까? 이런. 굉장 히 화려한 광경인데요.”
지금 나를 놀리나?
나는 세드릭에게 뾰족한 시선을 던 졌다.
“전하께선 잘 보이시나요? 좋으시 겠네요, 키가 크셔서.”
“제가 원해서 큰 건 아니지만, 이 런 장점도 있군요.”
세드릭이 뻔뻔한 얼굴로 자랑하자, 나는 볼멘소리를 냈다.
“놀리지 마시죠, 전하. 목마라도 태 워주시든가요.”
저기 저 피터 아버님처럼 말이지. 내 투덜거림에 세드릭이 쿡쿡 웃었 다.
세드릭의 시선이 우리가 바짝 붙어 있는 건물을 이리저리 훑었다. 잠시 뒤 그가 말했다.
“목마는 무리지만, 다른 방법은 있 을 것 같습니다.”
“다른 방법이요?”
세드릭이 두 손을 내밀었다.
“오 초만 실례하게 해 주십시오.”
“네? 무슨 실례요?”
“레이디를 저 지붕 턱 위로 올려드
리겠습니다.”
나는 세드릭이 턱짓한 방향을 바라 보았다.
과연 내 머리 높이 조금 위에, 사 람 서넛은 넉넉히 앉을 만한 공간이 있긴 했다.
저기로 날 들어올린다고? 나는 사 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요!”
“금방일 텐데요.”
“떨어지면 어떻게 해요?”
“안 떨어뜨립니다.”
“하지만……/’
그때 또 한 번 환호성이 들렸다.
“엄청나다! 불꽃 마법사를 동원했 다더니 사실이었군!”
“피터, 오늘 고생해서 나온 보람이 있지?”
“네, 아빠! 최고예요!”
나는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항복 했다.
“……올려 주세요.”
“ 예.”
세드릭이 씩 웃고는 잠시 실례하겠 다고 속삭였다. 나는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단단한 무언가가 잡아준 덕분에 흔 들리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잠시 뒤 눈을 뜨자 시야가 뒤바뀌 어 있었다.
‘와……!’
나는 멍하니 탄성만 흘렸다.
번쩍이는 황금색 불꽃과 눈부신 은색 불꽃. 마법사들이 그려낸 환상적인 불꽃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광경이었다.
세드릭이 훌쩍 내 옆으로 뛰어올랐 다. 우리는 나란히 앉은 채 불꽃을 구경했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야가 쾌적했다.
“아주 훤히 보이네요. 감사해요, 전 하.”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금 하늘을 팔레트 삼고 있는 불 꽃 마법사는 무척이나 유능한 자인 듯했다. 이번엔 전설에나 나올 법한 신수들이 하늘을 뛰놀았다. 입이 저 절로 벌어졌다.
“이런 불꽃을 만드는 덴 돈이 얼마 나 들었을까요?”
“재료도 재료지만 마법사를 고용하 는 데에도 많은 비용을 썼을 겁니 다. 이만큼 불꽃을 자유자재로 조종 하는 마법사라면 시가가 최소……
한참 현실적인 대화를 이어가던 세
드릭이 뜻밖의 화제를 꺼냈다.
“그런데, 아까 한 내기 말입니다만.”
“내기요? 아, 네.”
낙찰가 맞추기 내기 말이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드릭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가 이긴 거 아닙니까?”
“……아, 그랬던가요?”
그러고 보니 최종 스코어가 7:3이
었던가……,
그래. 비록 가벼운 내기였지만 승 부는 승부지. 나는 착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전하가 이기셨어요.”
뭘 걸었더라? 아, 그래. 이긴 사람 이 원하는 걸 들어주는 거였지.
나는 전부 내려놓은 표정풔으로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원하는 걸 말씀하세요. 뭐, 제가 전하께 얼마나 유용한 걸 드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요.”
가령 아닉시아 향 10회 무료 이용 권이라거나?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세드릭이 그 런 시시한 걸 요구할 리는 없지.
“제가 원하는 건, 레이디.”
세드릭이 낮게 속삭였다.
나는 입을 다물고 겸허히 승자의 판결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가 이어 속삭인 말은,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잠시만 레이디를 안아보고 싶습니 다.”
“……네?”
나는 순간 넋을 잃었다.
그리고 잠시 뒤 놀라 소리쳤다.
“네에?!”
“확인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잠 시면 되는데요.”
“뭘…… 뭘 확인하시려는 건데 아, 안, 안아보기까지 해야 하나요?”
“음……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리겠 습니다.”
“나중이 언제인데요!”
“조금 더 나중에. 모든 게 확실해 지면.”
들으나 마나 한 대답이었다. 나는 여전히 황당함에 말도 못 잇고 입술 만 달싹였다.
세드릭이 눈을 내리깔았다. 달빛과 불꽃이 만들어낸 역광이 그의 얼굴 과 어우러졌다.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일 초만
안아보고 금방 떨어지겠습니다.”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건지 아세요?! 저희 헤어진 사이라 고요.”
“죄송합니다, 레이디.”
순순히 사과하는 그의 얼굴은 기가 막히게 처연해 보였다. 나는 다급히 속삭였다.
“들키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쥐잡듯 이 잡아댈 거라고요! 다시 만나는 거냐, 얼마나 된 거냐 등등!”
“압니다만……
세드릭이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붉은빛이 나를 물끄러미 바 라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나를 가만히 마주보며 세드릭이 속 삭였다.
“지금은 아무도 안 보고 있지 않습 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우린 골목 끝 자락에 자리한 건물의 지붕 위에 앉
아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불꽃 구 경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짙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요구였지만, 사 실, 그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파블로프의 개 효과.’
세드릭은 전부터 가끔씩 이상한 소 리를 하곤 했다.
내 체향을 맡으면 기분이 조금 나 아진다는 둥, 내가 있어야 아닉시아 향의 효과가 더 강해진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나
와 아닉시아 향은 아무런 상관관계 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세드릭 입장에서는, 마치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도 있었다.
연상 효과라고들 하지.
세드릭은 아닉시아 향이 있어야만 후유증을 달랠 수 있고, 그 아닉시 아 향은 나만이 만들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공식은 이랬다.
세드릭을 안정시키는 것은, 아닉시 아 향.
아닉시아 향을 만드는 건, 아리엘 윈스턴.
여기서 중간 과정을 건너뛴다면 이 런 공식이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세드릭을 안정시키는 것은, 아리엘 윈스턴.
물론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이야기 였다.
하지만 일곱 살부터 지금까지 평생 광증에 시달려온 그에겐 논리가 중 요치 않을 수 있었다.
그만큼 간절하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뿐이었다.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몸소 알려주는 것.
나는 후, 심호흡을 했다.
“좋아요.”
“정말입니까?”
세드릭이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놀랄 거면 왜 물어봤어요, 이 사람아.
나는 작게 한숨 쉬며 고개를 끄덕 였다.
“일 초라고 하셨죠?”
“네. 일 초요.”
“좋아요. 그 정도쯤이야.”
호기롭게 뱉었지만 외간 남자에게 안긴다고 생각하니 괜히 긴장됐다.
긴장을 숨기기 위해 나는 질끈 눈 을 감았다.
세드릭은 곧바로 다가오지 않았다.
밤바람만이 피부를 스쳤다.
왜 안 오는 거지.
참을성 없이 내가 눈을 뜬 순간이 었다.
숨이 멈췄다.
코앞에 세드릭의 머리칼이 있었다.
까만 비단처럼 결 좋은 머리칼이 내 뺨을 스쳤다. 곧 어깨를 따스한 온기가 감싸 안았다. 짙은 침엽수림 과 미묘한 사향 냄새 역시.
세드릭의 체온은 따뜻했다.
일 초가 이렇게나 길었던가?
단단한 손바닥이 등을 감쌌다. 귓 가에서 세드릭의 숨소리가 들려왔 다. 피부 위를 나비가 내달리는 듯 간질거렸다.
한참 같던 일 초가 지난 후.
세드릭이 천천히 내게서 멀어졌다-여전히 두 손은 내 양어깨를 쥐고 있는 채였다. 붉은 눈이 나를 내려 다보았다.
“레이디.”
낮게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세드릭은 잠시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곧 그가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