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화〉
불꽃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화려하 게 하늘을 수놓았다.
그 환상적인 광경 한가운데서 세드 릭은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차갑고 단단한 비수가 손끝에 닿았다.
‘시계탑에 셋. 지붕에 다섯. 동상
뒤에 둘.’
도합 열 마린가. 붉은 시선이 무기 질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세드릭은 홀긋 아래를 내려다보았 다. 검은 망토에 푹 감싸인 아리엘 은 밤하늘 구경에 여념이 없어 보였 다.
‘십 초 안에, 소음 없이.’
에른에게 시선을 던진 세드릭이 눈 짓했다. 에른이 굳게 고개를 끄덕였 다.
세드릭은 암습에 특별히 뛰어난 편 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필요할 때 잔챙이 몇 정도 처리하지 못할 건 없었다. 세드릭은 손가락 사이에 독 발린 비수들을 끼웠다.
삼 초 뒤, 지붕에서 뭔가가 굴러떨 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상 뒤에서 역시 사람 그림자들이 힘없이 쓰러 졌다. 에른 역시 제 몫을 마친 듯했 다.
나머지는 미리 심어 놓은 그림자들 이 해결할 것이다. 세드릭은 다시 편안한 기분으로 밤하늘을 감상했 다.
오 분 뒤, 심어 놓았던 그림자 중
하나가 슬그머니 세드릭에게로 다가 왔다.
“모두 처리했습니다, 주인님.”
세드릭은 여전히 밤하늘을 올려다 본 채로 입만 열었다.
“생존자는?”
“둘은 살려 놓았습니다.”
“좋아.”
세드릭이 짧게 웃었다.
“수고했어.”
그림자가 고개를 숙였다.
밤하늘에서 무지갯빛 불꽃이 펑펑 터졌다. 세드릭은 불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아리엘일까.’
이전에도 그녀에게 접근하는 존재 들이 없진 않았다.
세드릭은 당연히 아제키안의 짓이
라고 생각했다.
아제키안은 자신의 과거를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으니까.
그는 아마 몇 가지 정보를 조합해 서, 아리엘이 뛰어난 조향 능력으로 자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 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자신을 증오해왔던 그 였기에, 세드릭은 당연히 그가 아리 엘에게 손을 쓰려 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리엘을 처리하든지, 제 사람으로 포섭하든지.
그래서 세드릭은 미리 아리엘 곁에 호위를 붙여두었다.
예상대로 아제키안은 온갖 방법으 로 아리엘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모 두 실패로 돌아갔지만.
여태까지 아제키안의 수작질은 딱 히 신경이 쓰이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거슬리기 시작했 다.
‘감히 자객을 붙이다니.’
그것도 상급 암살자를 열 명이나.
세드릭이 곁에 붙은 탓인지, 오늘 열 명의 암살자들은 숨죽여 아리엘 을 지켜보기만 할 뿐, 평소처럼 행
동을 개시하지는 않았다.
롤빵을 봤을 땐 순간 음독을 시도 하려는 건 아닌가 의심했지만, 마법 으로 검사한 결과 빵은 그냥 단순한 빵이 었다.
그냥 미친 듯이 달아빠졌을 뿐.
‘칸의 짓이군.’
이 시점에서 상급 암살자를 열이나 운용할 수 있는 집단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세드릭은 지그시 미간을 좁 혔다.
아제키안이 칸에게 붙은 것인가?
확실한 건 아직 알 수 없었다. 다 만 칸이 아리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죽일 생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열 명의 암살자들은 기회가 되면 언 제든지 아리엘에게 해를 가할 수 있 었다. 납치를 하든, 다른 짓을 하든.
‘감히, 주제넘게.’
세드릭이 밤하늘을 노려보았다. 적 안이 용암처럼 깊고 붉은빛으로 가 라앉았다.
왜 칸이 아리엘에게 관심을 보이는
지는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아리엘에게 또 다른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일까?
그건 이제부터 알아볼 차례였다.
“살아 있는 놈들은 지하 감옥으로 이송해.”
“예. 주인님.”
그림자가 곧장 어둠 속으로 녹아들 었다.
펑! 펑!
불꽃놀이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세드릭은 고개를 틀어 아리엘을 내 려다보았다.
검은 망토에 파묻힌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아리엘의 두 눈에 서, 일곱 빛깔의 불꽃이 아롱졌다.
그 화려한 색채의 향연에 세드릭은 순간 시선을 뺏겼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아리엘이 홱 고개를 돌렸 다. 세드릭은 깜짝 놀라 눈을 깜빡 였다.
“왜 계속 쳐다보세요, 전하?”
세드릭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아, 망토 이제 돌려드릴까요?”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아리엘이 물 었다. 정말 벗어주려는지 벌써 후드 까지 뒤집고 있었다. 세드릭은 황급 히 그녀를 말렸다.
“쓰고 계십시오.”
“안 추우세요? 전 아까 꽤 쌀쌀했 는데……『
아리엘이 망토를 넓게 펼쳐 길이를 확인하더니 아쉽게 혀를 찼다.
“같이 쓰기엔 너무 작을 거 같네 요. 전하께서 너무 크신 건가.”
아리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세드릭은 순간 정신이 조금 혼미해 졌다. 크기만 넉넉했으면 정말 자신 과 같이 쓰기라도 하려고?
결혼도 안 한 남녀가 한 망토를?
세드릭은 미간을 문질렀다. 아리엘 은 가끔 지나칠 정도로 경계심이 없 었다. 그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괜찮으니까…… 부디 계속 쓰고 계십시오.”
“그럼 번갈아가면서 쓸까요? 밤바 람이 꽤 쌀쌀한데, 감기라도 걸리시 면 어떻게 해요.”
“제가 감기에 걸릴까봐 걱정하는 사람은 레이디밖엔 없을 겁니다.”
세드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해 보면 감기뿐만이 아니었다. 아리엘은 종종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향은 잘 쓰고
있냐는 등, 잠을 푹 자고 술을 줄여 야 한다는 등 주치의조차 안 하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걱정, 이라……;
세드릭은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낯선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 걱정받는다는 건.
# 4《 쑤
해가 중천에 떠서야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돌아본 나는 이마를 탁 쳤 다.
‘미친 듯이 잤네.’
하긴, 어제 제법 늦게 들어왔으니까.
‘아……/
나는 순간 입을 멍하니 벌렸다.
어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 이었다.
아름답고 화려하게 밤하늘을 수놓
던 불꽃들, 밤이 깊어질수록 돌아가 기는커녕 계속 밀려들던 사람들. 나 와 세드릭, 에른은 바글대는 인파에 갇혀 옴짝달싹도 못 했다.
그리고……,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리엘 아가씨? 일어나셨나요?”
리나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응! 일어났어!”
“루나 아가씨께서 오후 티타임에 초대하셨는데, 응하시 겠어요?”
음.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차피 오늘까지는 가게를 닫을 생각이었으 니까, 상관 없겠지.
“그러자고 전해 줘.”
“네!”
느지막이 점심을 먹고, 슬슬 달콤 한 후식이 생각날 즈음 소녀들이 들 이 닥쳤다.
“아리엘 님!”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온 아이들이 붕붕 손을 흔들었다.
“저희 후원에 앉아서 먹어요!”
“운치 있게요!”
우리는 후원에 자리한 아담한 티테 이블에 둥글게 모여 앉았다.
“뭘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소녀들이 각자 가지고 온 피크닉 바구니를 풀었다.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노릇 노릇하게 구운 스콘과 살구잼, 버터 가 듬뿍 발린 페스츄리, 초콜릿 덩 어리가 콕콕 박힌 머핀 등. 나도 모 르게 군침이 흘렀다.
“헤헤. 티타임이라면 이 정도는 되 어야죠.”
“맞아요. 후식을 어설프게 때우면 나중에 배만 더 고파요.”
우리는 신나게 포크를 들었다. 한 창 스콘을 끝장내고 있는데 릴리가 물었다.
“아리엘 님, 어제는 황궁에서 보이 지 않으시던데요.”
아.
포크로 스콘을 집으려다 순간 삐끗 하고 말았다.
나는 얼른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아, 응. 어젠 세니아 지구에 있었
어. 거리 축제에 갔었거든.”
“와! 거리 축제에 가셨어요?”
“정말요? 부러워요! 저희도 너무 가보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절대 허 락을 안 해주세요. 그치, 사샤!”
“으응. 위험하다고……?
사샤가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소녀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해서인지 거리 축 제에 대해 호기심이 엄청난 것 같았 다.
“거리 축제엔 어떤 게 있어요?”
“신기한 게 많나요? 정말 서커스 공연도 있나요?”
“괴수가 행진했다던데 정말인가 요?”
질문 폭격이 쏟아졌다. 나는 차분 히 스콘을 썰며 하나하나 대답해 주 었다.
“서커스 공연도 했었어. 괴수 행진 도 구경했고. 이름이 아르키오스라 나?”
그러고 보니 엄청 예뻤지, 수정 비
늘.
햇빛 아래 영롱이던 비늘을 생각하 니 아쉬움이 들었다. 그런 수정으로 향수병을 조각하면 엄청나게 아름다 울 텐데.
“와아, 와아! 아르키오스를 직접 보셨어요?”
“정말 온몸의 비늘이 수정으로 되 어 있나요?”
“응, 이름값 톡톡히 하더라.”
내 담담한 대답에 소녀들이 아쉬운 한숨을 흘렸다.
“나도 꼭 보고 싶었는데. 저희 부 모님은 너무 과잉보호를 하세요.”
“그러고 보니 어제 공개 경매에서 아르키오스 비늘이 엄청 비싼 값에 팔렸다는 소릴 들었어요.”
“어, 너도 들었어, 릴리? 나도 오 늘 아침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들이 하는 얘기 들었어!”
“그랬지.”
나는 무심코 대답했다. 소녀들이 홱 나를 돌아보았다.
“직접 보셨어요?”
“경매장에 계셨어요, 아리엘 님?”
나는 하는 수 없이 실토했다.
“응, 있었어. 수정 비늘이 낙찰되는 것도 지켜봤고.”
확실히 낙찰가가 엄청나기는 했다. 나 역시 깜짝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낙찰 받은 사람에겐 별로 대단치 않은 금액이었을 거다. 다름 아닌 에반스 공작 전하셨으니까.
“그러셨군요! 그럼 아리엘 님도 뭔 가를 낙찰받으셨나요?”
“응, 그랬지.”
나는 싱긋 웃었다.
“내가 낙찰받은 건 향수 재료였어. 한 보름 쯤 뒤에 다시 찾아와. 그걸 로 신제품을 만들 건데, 너희 먼저 시향하게 해 줄게.”
“우와!”
“정말이시죠, 아리엘 님!”
티테이블이 난리가 났다.
루나와 에일린이 흥분해서 외쳤다. 사샤도 감동한 듯 두 손을 모았고, 릴리는 만세를 부르짖는 루나와 에 일린을 말렸다.
“그 대신 보름 동안은 찾아오지 마. 가게도 문 닫을 거고, 나도 바 쁠 거거든.”
“헉, 정말요? 가게 문도 닫으신다 고요?”
“손님이 엄청 몰려들 텐데요. 특히 이제부터는 더요.”
릴리가 사려 깊게 물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지금이 노를 저을 적기이기는 했다. 황궁 무도회를 휘저으며 힘차게 영업했으 니 그 효과가 슬슬 나오겠지.
하지만 나는 조금 더 뜸을 들이기 로 했다. 당장은 손해 볼 수도 있지 만 분명 감수할 가치가 있을 터였 다.
나는 소녀들에게 장난스레 웃어 보 였다.
“가게 문 오래 닫았다고 파리 날리
면, 너희라도 와 줘야 해.”
“물론이죠, 아리엘 님!”
“저희는 여기서 죽치고 살 수도 있 어요!”
루나와 에일린이 요란하게 맹세했 다. 사샤가 조심스레 물었다.
“세니아 지구에선 또 뭘 구경하셨 어요?”
사샤의 말에 나머지 소녀들이 또 반짝이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 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글쎄, 노점 돌아다니면서 길거리 음식도 먹었고. 연극도 구경했고, 악 사들 노래도 좀 들었고……
“불꽃놀이는요, 아리엘 님? 어제 역대급 불꽃놀이가 열렸잖아요!”
“저도 집에서 구경했어요!”
불꽃놀이.
그 단어에 내 포크가 또 삐끗했다.
“불, 불꽃놀이 말이지. 응, 구경했 어. 참 예뻤지. 사람도 엄청 많았 고.”
인파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에른마 저 파도에 쓸려갈 정도였다.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가 떠밀려갈 만큼 아주 굉장한 인파였다.
나와 세드릭은 쓸려가는 에른을 속 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어떡하죠, 전하?’
세드릭을 올려다본 나는 그렇게 속 삭였었다.
옴짝달싹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인파. 단 둘이 된 나와 세드릭.
밤이 깊어질수록 불꽃은 마법사까 지 동원되어 더 화려한 자태를 뽐냈 고……,
그리고.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심장이 거세 게 뛰었다.
“왜 그러세요, 아리엘 님?”
“어디 아프세요? 얼굴이 빨개지셨 는데요!”
호들갑 떠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곤 손등으로 얼른 뺨을 식혔다.
“열?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말 괜찮으세요? 감기 걸린 건 아니시고요?”
“감기는 무슨. 완전 멀쩡해. 자아, 이거나 마저 먹자, 얘들아.”
나는 소녀들이 더 물어볼 수 없도 록 한입 가득 머핀을 밀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