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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79화 (79/153)

〈80 화〉

내기를 시작한 이후, 첫 경매품인 청동 조각상은 세드릭이 이겼다.

그 조그만 게 그렇게 비쌀 줄이야. 크기만 보고 무시했던 나의 패착이 었다.

두 번째, 백 년 전 회중시계는 아 슬아슬한 차이로 내가 이겼다.

세 번째, 센도르 왕국의 유명한 특 산품 향초는 내가 졌다. 그것도 아 주 어마어마한 차이로 졌다.

‘저 향초에 고작 그만한 가격밖에 안 부른다고? 그게 말이 돼?’

향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헐값에 낙찰되었다. 이 자리엔 죄다 보는 눈 없는 자들만 모여 있는 게 분명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낙찰 받을걸!

하지만 나는 최대한 자금을 아껴야 했다. 그 물건만큼은 무슨 일이 있 어도 내가 손에 넣어야 했으니까.

아무튼, 현재 스코어는 2:1,나는

역전의 기회를 노리며 두 손을 비볐

다.

진행자가 다음 물건을 소개했다.

“이번에 소개드릴 물건은 아주 특 별합니다! 북해에서 떠내려온 향유 고래 사체의 부산물이죠!”

나는 번쩍 눈을 크게 떴다.

드디어 내 차례가 온 것이다. 나는 세드릭을 돌아보곤 씩 웃었다.

“값을 불러 보세요, 전하. 제가 과 연 얼마에 낙찰받을까요?”

“이건 반칙입니다, 영애.”

세드릭이 투덜거렸다.

“직접 참여하는 것까지 카운트하는 게 어딨습니까?”

“어머나. 미리 금지하셨어야지요. 전 최소 금액인 오천 비스로 할게 요.”

“그럼 저도 오천 비스로 하겠습니 다.”

“그러시면 안 되죠! 따라하시는 게 어디 있어요?”

가볍게 말다툼이 오가는 사이, 경

매가 시작되었다.

내가 노리는 물건 차례가 바로 오 진 않았다. 한 마리 향유고래에서 나온 부산물은 종류가 무척 많았다.

고래기름과, 고래가죽. 용골. 모두 꽤 높은 가격에 팔려나갔다.

나는 한 번도 손을 들지 않았다. 세드릭이 내게 의아한 눈초리를 던 졌다.

쓸모 있는 장기들은 거의 다 팔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게 허리를 편 채 침착히 때를 기다 릴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진행자의 입에서 고대하던 것이 튀어나왔다.

“마지막으로, 자잘한 부산물들은 원활한 진행을 위해 한 번에 경매를 진행하겠습니다. 5천 비스부터 시작 합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래힘줄, 간유, 수염, 결석……/

드디어.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이번 공개 경매의 진행자, 샤이어 는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한 영애가 팻말을 든 것이다.

‘이건 안 팔릴 줄 알았는데. 입찰 자가 있을 줄이야!’

지금 무대에 올라 있는 것들은, 고 래기름이나 용골과는 달리 찌꺼기 모음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아 무 잡화점에나 떨이로 팔아야 할 것 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가끔 이렇게 호구가 잡힌다니까.’

샤이어가 속으로 킥킥 웃었다.

영애 외에 달리 팻말을 드는 사람 은 없었다. 샤이어는 영애가 마음을 바꿀세라 서둘러 숫자를 셌다.

“추가 입찰자가 없으시면 마감하겠 습니다! 오, 사, 삼, 이, 일……, 축 하드립니다! 낙찰되셨습니다 !”

샤이어가 환히 웃어 보였다. 고래 찌꺼기를 오천 비스나 주고 산 오늘 의 호구에게.

그러자 영애가 곱절은 더 환한 미 소를 돌려주었다. 더없이 아름답고 눈부신 미소였다.

샤이어는 조금 당황했다.

‘저렇게 기쁜가?’

취향이 독특하고, 또…… 흠, 흠, 미소가 예쁜 아가씨로군.

슬쩍 볼을 붉히며 샤이어는 계속해 서 경매를 진행했다. 낙찰된 고래 찌꺼기들이 새 주인을 맞기 위해 무 대 뒤편으로 옮겨졌다.

경매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아르 키오스의 수정 비늘, 옛 선현의 두 루마리, 마법 스크롤 같은 것들이 비싼 값에 낙찰되었다.

특히 수정 비늘의 경쟁이 엄청났 다.

아까 거리에서 아르키오스의 행진 퍼포먼스가 있었다더니, 그 덕인 듯 했다. 경쟁자가 어마어마했지만 최 후의 승자는 망토 쓴 남자였다. 최 종 낙찰가는 샤이어조차 아찔해질 만큼 어마어마했다.

날이 어둑해질 때 즈음 드디어 길 었던 공개 경매가 파장했다.

물건을 낙찰받은 사람들이 조합원 들의 안내를 받아 무대 뒤편을 향했 다. 샤이어는 그 사이에서 아까 그 ‘호구 영애’를 발견했다.

“아, 고래 부산물들을 한 번에 낙 찰받으신 분이군요? 여기로 모시겠 습니다.”

호구 영애가 안내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물건들은 이미 여러 덩어리로 포장 되어 있었다. 포장지는 그럴듯했지 만, 안에 든 것은 하나같이 쓰레기 나 다름없었다.

영애가 그중 한 덩어리로 다가갔 다.

“여기 있다.”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영애가 덩어리를 쓰다듬었다. 더없 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어루만 지는 듯한 손짓이었다.

샤이어는 고개를 빼 덩어리를 쳐다 보았다. 덩어리의 정체를 알게 된 샤이어는 어이가 없었다.

‘저건 고래 결석인데. 결석을 저렇 게 소중하게 어루만진다고?’

저 냄새 나는 걸!

고래 결석은 찌꺼기 중의 찌꺼기였

다. 사체를 해체할 때 버려지지 않 고 경매장까지 흘러온 게 이상할 정 도로 쓸모가 없었다.

샤이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귀한 집 아가씨 같은데, 어째 취향 이 영 고약했다.

“저어, 아가씨.”

샤이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영애에 게 말을 걸었다.

“뭐지?”

그러나 대답한 것은 괴팍한 취향의 영애가 아닌, 망토를 뒤집어쓴 남자 였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수정비늘 을 낙찰받았던.

서슬 퍼런 적안이 샤이어를 노려보 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을 뒤 집어쓴 기사도 샤이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샤이어는 히익, 목 졸린 소 리를 냈다.

“저, 저는 그냥, 정말 저기에 오천 비스를 지불하셔도 괜찮은 건지 궁 금해서……『

“그게 자네와 무슨 상관인가?”

샤이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남자의 적안은 불쾌한 빛을 숨기지 않았다. 노려보는 것뿐인데 도 이상할 정도로 식은땀이 솟았다.

그때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제게 하시는 말씀이군요?”

영애의 목소리에 남자가 시선을 거 뒀다.

샤이어는 그제야 멈췄던 숨을 거세 게 내뱉었다.

“걱정 마세요, 오천 비스 정도는 전혀 아깝지 않으니까요. 사실 그 곱절에 곱절도 기분 좋게 지불했을 거예요.”

영애가 노래하듯 대답했다.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고, 곱절의 곱절이요?”

샤이어는 이번엔 다른 의미로 식은 땀을 흘렸다.

고작해야 고래 결석…… 갖고 있어 봐야 냄새만 나는 찌꺼기에 그런 돈

을 지불하겠다고?

아무래도 이 영애의 취향은 평범함 과 아득히 먼 것 같았다.

‘뭐, 나야 호구 잡아서 다행이긴 한데……

“그, 그러시군요, 아가씨. 만족스러 운 소비를 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샤이어가 식은땀을 훔치며 말했다.

영애는 이번에도 환한 미소를 돌려 주었다.

마치 세상의 부를 전부 제 손에

쥐기라도 한 듯이.

“흐 흐흐 ” X그 9    1=3 -

나도 모르게 자꾸 허밍이 나왔다.

세드릭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기쁘십니까?”

“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하던 물건을 성공적으로 낙찰 받았으니까. 그것도 최소 금액에!

나는 지금 날아갈 듯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게 그렇게나 귀한 물건입니까?”

“그럼요.”

나는 허밍을 멈추고 대답했다.

신기하게도 원작의 세계는 내가 살 던 세계와 많은 부분이 비슷했다. 특히 꽃과 식물 종류는 겹치는 게 아주 많았다.

그 덕분에 조향을 하는데 크게 어

려움이 없었다. 물론 이 세계엔 존 재하지 않는 재료도 있었지만, 반대 로 이 세계에만 존재하는 재료 역시 있었다. 따라서 웬만한 것은 대체재 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만큼은 대체재를 구하는 게 불가능했다.

‘향유고래의 결석.’

즉, ‘용연향’이었다.

이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도 대체할 재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용연향이란, 향유고래가 주먹이인

오징어를 소화하는 과정에서 남은 찌꺼기가…… 으음. 그다지 위생적 인 과정은 아니니 자세한 설명은 생 략하자.

아무튼 용연향은 바다의 보물이라 불릴 만큼 희귀한 재료였다. 이걸 향수에 첨가하면 잔향이 훨씬 오래 갈뿐더러,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깊 고 풍성한 향이 더해졌다.

‘웬만한 고급 향수에는 꼭 들어갈 정도로 귀한 재료인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 세계의 조향 사들은 용연향을 전혀 이용하지 않

았다. 마도학이 발전했는데도 아직 용연향의 가치를 알아내지 못한 것 이다.

하긴,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 니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향유 고래의 결석은 단순히 ‘냄새 나는 찌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 니까.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연금술사들 이 현자의 돌을 연성하기 위해 온갖 재료로 실험하던 끝에 겨우 용연향 의 가치를 알아냈다는 설이 있었다.

나는 그간 용연향을 구하려는 시도 를 여러 번 했었다. 그러나 이 제국 은 고래잡이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기에 방법이 없었다. 그저 자연 사해 떠내려오는 고래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오랜 기다림이었지.’

그러던 어느날, 정보를 미리 입수 한 제이나가 편지로 귀뜀해준 것이 었다. 이번 공개 경매에 향유고래 사체가 올라올 거라고.

‘감사합니다, 길베르트 백작님. 보 은할게요!’

나는 마음속으로 제이나에게 키스 를 날렸다.

“아주 귀한 물건이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때 펑, 하고 하늘에서 뭔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났다.

“뭐지?”

나는 깜짝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가, 곧 작게 입을 벌렸다.

“ 와아

아름다운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빨간색, 파란색, 보라색…… 일일이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색깔이 까만 하늘을 물들였다. 나는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 예쁘다.’

이 세계는 내가 원래 살던 세상과

같은 것도 많았지만, 다른 것 역시 그만큼 많았다.

하지만 이 불꽃만큼은 내가 알고 있던 광경과 똑같았다.

묘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마 치 지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예전 세계에 미련은 없었다. 투병 생활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이전의 삶을 생각하면 날카로운 환상통이 으레 뒤따라왔다.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하늘을 수 놓고 있는 불꽃을 바라보 니 어쩌면, 약간의 향수 정도는 남 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알록달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몸에 소름이 오소소 박혔다. 오월 이긴 하지만 그래도 밤바람은 꽤 쌀 쌀했다. 대충 옷깃을 여미고 계속 불꽃을 구경하는데, 문득 어깨가 따 스해졌다.

“응?”

세드릭의 망토가 내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전하, 전 괜찮은데요!”

“제가 더워서 그럽니다. 그냥 잠깐 걸치고 계세요.”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얌전히 세드릭의 망토를 걸친 채 숨을 들이쉬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냄새가 났다.

‘……침엽수 냄새/

망토에는 세드릭의 냄새가 잔뜩 묻 어 있었다.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있었 지만, 나는 더 이상 불꽃을 구경하 지 못했다.

괜히 호흡이 의식되었기 때문이었 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세드릭의 체향이 스며들었다. 그렇다고 숨을 안 쉴 수도 없었다.

세드릭의 체향은 청량하게 폐부를 환기시키는 것 같으면서도, 무게가 있는 것처럼 뚜렷하게 잔향을 남겼 다.

‘용연향을 사용하면 이 냄새를 재 현할 수 있을까?’

아니.

아마 그래도 안 될 것 같다.

나는 슬며시 망토 깊숙이 몸을 묻 었다. 그의 체향 때문에 자꾸만 폐 부가 간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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