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화〉
“곧 시작하겠네요. 슬슬 가볼까요.”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공개 경매요!”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축제에 참여한 건 이것 때문 이었다.
건국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드는 만큼, 장사꾼들도 돈 냄새를
맡고 찾아들었다. 잔뜩 몰려든 장사 꾼들은 경매라는 이름으로 판을 합 쳤다.
공개 경매는 오늘 건국제의 꽃이라 고 할 수 있었다.
아기자기하고 저렴한 물건부터, 경 매가가 금세 천정부지로 치솟을 만 큼 값비싼 보물까지.
구경만 해도 즐거울 만큼 다양한 물건이 출품되는 장소였다.
물론, 나 역시 단순히 구경을 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공개 경매라…… 노리는 물건이라
도 있으십니까?”
“그럼요.”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제이나가 내게 서신을 보 낸 적이 있었다. 선물을 하나 보낼 테니 부담가지지 말고 받아달라고.
거기엔 다른 이야기도 하나 담겨 있었다. 건국제의 공개 경매에 대한 자그마한 정보였다.
“흐음.”
세드릭이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그리곤 내 쪽으로 슬쩍 허리를 숙였 다.
나와 세드릭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기껏해야 두 뼘 정도의 거리일까. 루비처럼 검붉은 눈에 내 얼굴이 비 쳤다.
세드릭이 장난스레 웃었다.
“제게도 귀띔해 주십시오.”
“……뭘요?”
“노리시는 물건이 뭔지. 어쩌면 제 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 까?”
“글쎄요. 감사한 말이지만 도움은
없어도 될 것 같은데요/
“자신이 있으신 겁니까? 무조건 손 에 넣을 수 있다는?”
“으 ”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곧 고개를 끄 덕였다.
“네. 자신 있어요.”
일단, 그 물건을 노리는 사람은 이 제도에서 나밖에 없을 거다.
만에 하나 취향 괴팍한 괴짜가 또 있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 물건에
나만큼 투자하지는 않을 테니까.
세드릭이 나를 설득했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 습니까?”
“좋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힌트 정도는 드릴게요.”
사실 바로 정체를 말해도 상관은 없었다. 세드릭만큼 입이 무거운 사
람도 찾기 힘들 테니까.
하지만 바로 알려주기는 싫었다. 궁금해서 안달이 나 있는 세드릭의 모습이 재미있었으니까.
세드릭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 덕였다.
“좋습니다. 힌트를 주시면 제가 맞 추죠.”
“향유고래예요.”
“ 예?”
세드릭이 미간을 구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어를 들은
얼굴이었다.
“향유고래…… 말씀이십니까?”
“네. 향유고래요. 힌트가 됐나요?”
세드릭은 여전히 알쏭달쏭한 표정 이었다.
세드릭의 당황한 얼굴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는 입을 가리 고 몰래 웃었다.
세드릭이 생각에 잠긴 듯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 곧 그가 입을 열었 다.
“향유기 름입니까?”
“ 아뇨.”
“그러면 용골?”
“아니에요.”
세드릭은 그 뒤로 몇 번 더 오답 을 내놓았다. 생각보다도 더 도전정 신이 투철한 타입이었다.
그러나 나는 줄줄이 고개를 저었 다.
고심 끝에 던진 다섯 번째 답마저 오답이자, 세드릭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재밌네.’
전전긍긍하는 세드릭의 모습을 보 는 게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공개 경매장에 도착할 때까지, 세 드릭은 향유고래의 거의 모든 장기 이름을 하나씩 댔다.
하지만 정답을 맞추지는 못했다.
“이렇게까지 못 맞추시는 것도 재 주네요, 전하.”
“하아……/
세드릭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덕분에 경매장까지 가는 길이 심심 하진 않았다.
“벌써부터 사람이 많네요.”
경매장은 일찌감치 도착한 사람들 로 바글바글했다.
하지만 다행히 복잡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제도 상인 조합에서 나온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관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상인 조합원에게 자리표를 받아 표에 적힌 번호를 찾아 움직이 기 시작했다.
“저기네요.”
나는 의자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의자들은 좋게 말하면 아담했고, 나쁘게 말하면 비좁아 보였다. 의자 를 바라본 세드릭의 표정이 어두워 졌다.
“전하와 에른 경껜 너무 좁으려나
요? 저 혼자 볼일 봐도 괜찮으니까, 두분께선 다른 곳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영애.”
“네? 아, 네.”
세드릭이 지나가던 상인 조합원을 붙잡았다. 그가 조합원의 귓가에 무 어라 속삭이자, 조합원의 눈이 휘둥 그레 졌다.
“물론입니다. 당장 모시겠습니다!”
조합원이 잽싸게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조합원의
뒤를 따랐다.
도착한 곳은 경매장의 맨 앞 줄이 었다. 이곳은 정해진 사람만 앉는지 드문드문 채워져 있었다.
게다가 이곳의 의자는 아까 그곳보 다는 훨씬 쾌적해 보였다. 그러나 세드릭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의자를 노려보았다. 곧 세드릭이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펼쳤다.
“임시방편이지만 앉으시죠.”
세드릭이 손수건 얹은 의자를 가리 켰다.
나는 조금 감동한 눈으로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어렸을 때부터 매너를 갈고 닦은 귀족 신사다웠다.
내가 손수건 깔린 의자에 착석하 자, 사람들이 우리를 주시하기 시작 했다.
뒷줄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나와 세 드릭, 에른을 바라보며 소곤거렸다.
“누군진 몰라도 신분이 대단한 사 람들 같은데…… 뭘 노리고 온 거 지?”
“이번에 진귀한 보석이 많이 나온 다던데, 그런 것들 아니겠어?”
“마리안느 화백의 미공개 유작은 아니겠지? 그건 꼭 내가 낙찰받아야 하는데!”
아니랍니다, 걱정 마세요.
나는 속으로만 말하며 조용히 웃었 다. 내가 노리는 건 누구와도 겹치 지 않을 거다.
세드릭이 내게로 슬쩍 몸을 기울였 다.
“계속 말씀 안 해주실 겁니까?”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 비밀이니까요.”
세드릭이 한숨을 쉬었다.
세드릭의 숨결이 내 피부에 닿았 다. 그 바람에 문득 나는 세드릭과 의거리가 평소보다 더 가깝다는 것 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의자 간의 간격이 좁은 탓이었다. 물론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사향 냄새.’
나는 눈을 깜빡거 렸다.
세드릭의 몸에서 희미하게 체향이 풍겨왔다.
한 번 의식하고 나자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세드릭의 체향은 한 단어로 정의내 리지 못할 만큼 기묘했다.
묵직한 사향 같으면서도, 침엽수처 럼 상쾌하기도 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내가 아는 재료들을 조합해 보았다. 그러나 어 떤 레시피를 사용해도 이 냄새를 재 현하진 못할 것 같았다.
“왜 그러십니까?”
세드릭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깜짝 놀라 내 어깨가 움찔 튀어올 랐다.
“네?”
“방금 중얼거리지 않으셨습니까?”
앗.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레 시피를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전하께서는 노리시는 물건 없으세 요?”
“노리는 물건이라……/
“기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하나쯤 낙찰받아 가셔도 좋을 것 같은데 요.”
“글쎄요, 레이디께서는 그 수수께 끼의 물건 말고 또 원하는 건 없으 십니까?”
“음, 모르겠어요. 봐야 할 것 같은 데요.”
“그럼 저도 보고 고르겠습니다.”
머지않아 정각을 알리는 시계탑의 종소리가 여섯 번 울렸다. 그와 동 시에 경매가 시작되었다.
온갖 신기하고 진귀한 물건들이 무 대에 올랐다. 제일 앞 줄에 앉은 덕 에 나는 제법 생생하게 그것들을 구 경할 수 있었다.
“와, 엄청 번쩍이네요. 저런 그릇으 로 식사를 어떻게 하죠? 장식용인 가?”
“마음에 드십니까?”
“아뇨. 저기다 음식을 담아 먹었다 간 체할 것 같아요.”
나는 번쩍번쩍 빛을 발하는 황금 그릇을 바라보며 고개 저었다. 그릇 은 꽤 높은 금액으로 낙찰되었다.
다음으론 큼지막한 홍옥을 박은 목 걸이와 귀걸이 세트가 나왔다.
영롱한 자태에 나는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네에. 요즘은 어쩐지 붉은 계열 보석이 예뻐 보이더라고요.”
루비, 가넷, 스피넬 같은. 피처럼
붉은 보석이.
그러고 보면 예전엔 딱히 붉은색을 좋아하지는 않았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취향이 변했나? 나 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런데 저 목걸이는 별로네요.”
보석은 예뻤지만 컷팅한 모양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팔을 움직이려던 세드릭이 우뚝 멈 췄다. 마치 내 말을 듣고 멈춘 것 같았다.
그러시군요.”
홍옥 장신구 세트 역시 비싼 값에 낙찰되었다. 나는 슬쩍 시간을 확인 했다. ‘그 물건’은 언제쯤 등장하는 걸까?
여기저기서 경쟁적으로 가격을 외 치는 걸 구경하는 것도 꽤 재밌긴 했지만, 마냥 기다리고 있자니 조금 무료했다.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세드릭이 슬그머니 내 게로 몸을 기울였다.
“놀이 하나 하시겠습니까, 영애?”
나는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그의 붉은 눈에 장난기가 떠올라 있었다.
“낙찰가를 맞추는 겁니다. 가장 많 이 맞춘 사람이 이기는 걸로 하죠.”
내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흥미로 운 제안이었다.
“좋아요. 흐음, 이런 건 뭔가를 걸
어야 재밌는데.”
돈을 거는 건 좀 그렇고. 잠깐 고 민하던 나는 제일 무난한 것을 말했 다.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원하는 걸 들어주기로 해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영애?”
세드릭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덧붙였다.
“너무 비싼 것, 너무 어려운 것, 너무 오래 걸리는 건 제외예요.”
물론 세드릭이 이런 간단한 내기 따위로 무언가 큰 걸 요구하진 않겠 지만-
하지만 세드릭은 의외로 순순히 수 긍하지 않았다. 그가 고민하듯 눈을 내리깔더니, 잠시 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무 어려운 것, 너무 오래 걸리 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정합니까?”
나는 눈을 끔뻑였다.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데.
“글쎄요…… 주관적이긴 한데, 쌍 방 합의가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쌍방 합의라.”
세드릭이 짧게 되풀이했다.
곧 그가 싱긋 눈웃음을 지으며 나 를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그 미소에 어쩐지 등골이 오싹했 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세드 릭을 쳐다보았다. 작고 여린 조향사 에게 뭐 대단한 걸 시키려는 건 아 니겠지?
아무튼 내기는 성립되었다. 나는 이 흥미로운 놀이를 에른에게도 제 안했으나,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결 국 나와 세드릭 둘만의 대결이 펼쳐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