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77화 (77/153)

〈78 화〉

“와아아!”

“봤어? 봤어?”

사람들의 환성이 들렸다.

아무래도 저 거리 너머에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죽 빼 보 았지만 사람들의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다.

“ 엄청나군!”

“자연의 신비란!”

도대체 뭔데 그래?

나는 에른 경을 콕콕 찔렀다.

“에른 경은 뭐가 좀 보이세요?”

“아직은 안 보입니다. 곧 이쪽까지 올 것 같으니 기다려 주십시오.”

오, 이리로 오고 있단 말이지?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기로 했 다. 과연 뿔피리 소리가 조금씩 가

까워지고 있었다.

“아빠, 나 좀 올려주세요!”

나도 누가 좀 올려줬으면 좋겠네.

나는 까치발을 선 채 서서히 다가 오는 무언가를 기다렸다.

머지않아 인파가 갈라지기 시작했 다.

“오오!”

“이야아!”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감탄사도 뱉지 못하고 입을 딱 벌렸다.

코끼리와 비슷할 만큼 커다란 괴수 가 육중한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 음 내딛고 있었다. 그리고 괴수의 위에는 조련사가 괴수를 신중히 조 종하고 있었다.

거대한 크기도 크기였지만, 무엇보 다 놀라운 건 괴수의 몸체에 반짝이 는 것들이 비늘처럼 촘촘히 매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저게 뭐죠……?”

나는 멍하니 물었다.

“수정 괴수 아르키오스입니다. 개 체 수가 무척 적은데, 여기서 보게 되다니…… 운이 좋군요.”

에른이 무덤덤히 대답했다.

“비늘을 떼어다 조각하면 값비싸게 팔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 비늘을요? 너무 잔인하지 않 나요?”

“아르키오스는 주기적으로 탈피하 듯 비늘을 떨어뜨립니다. 그걸 줍는 겁니다.”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햇빛의 각도가 달라질 때마다 반짝 이는 비늘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진짜 예쁘네요. 비늘들은 무척 비 싸겠죠?”

“그건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입니 다.”

응?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이건 에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옆을 돌아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순간 비명을 지를뻔 했다.

“세드릭 전하?!”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내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주변 사 람들이 우리를 힐끔거렸다.

나는 얼른 내 입을 틀어막았다. 대 신 해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세드릭 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오히려 따지는 건 세드릭 쪽이었다.

“도대체 오늘은, 왜……

거기까지 말한 세드릭이 옅게 숨을 몰아쉬었다.

……뛰어온 건가? 숨결이 거칠었 다. 늘 단정하던 이마에 앞머리가 한 올 내려와 있었고.

“오늘은 왜 여기 계신 겁니까.”

이게 다짜고짜 무슨 소리지.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되물었다.

“그럼 제가 어디 있어야 했던 건데 요?”

“그야, 당연히, 이틀 내내 황궁에 계셨으니……/

거기까지 말한 세드릭이 꾹 입을 다물었다.

곧 그가 체념한 듯 희미하게 미소 를 지었다.

“아닙니다. 거리 축제를 보러 나오

셨군요. 좋습니다. 흥미로운 축제 죠.”

나는 그제야 세드릭의 옷차림을 쳐 다보았다.

그는 오늘도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 다. 어두운 청록빛 연미복을 갖춰입 은 세드릭은 눈이 돌아갈 만큼 빛이 났다. 지난 이틀간 그랬던 것처럼.

딱 하나 다른 것은, 그가 눈부신 샹들리에 불빛 아래가 아니라 사람 이 바글바글한 거리 한복판에 서 있 다는 점이었다.

“혹시 황궁에서 곧장 오신 엇!”

나는 말을 하다 말고 홱 고개를 돌렸다.

세드릭과 이야기하는 동안 아르키 오스가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와아……,”

가까이서 보니, 수정 비늘이 더 눈 부시게 아름다웠다.

조련사는 능수능란하게 아르키오스 를 조종했다. 거리를 따라 행진하며

조련사가 구경꾼에게 손을 흔들었 다.

“잠시 뒤 공개 경매에 방금 탈피한 수정 비늘이 올라옵니다! 많은 관심 가져 주세요!”

조련사가 외쳤다. 아르키오스에게 매료되어 있던 구경꾼들이 술렁거렸 다.

와, 장사는 저렇게 하는 거지. 나 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동안 아 르키오스가 멀어져갔다.

“굉장히 아쉽다는 표정이십니다.”

옆에서 세드릭이 말을 걸었다. 나 는 솔직히 인정했다.

“맘 같아선 계속 따라다니면서 구 경하고 싶지만…… 정신 차려야죠. 오늘은 바쁘니까요.”

나는 아르키오스에게 꽂혀 있던 시 선을 거두고 절레절레 고개 저었다.

“그나저나 전하께서는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심지어 이런 차림을 하고서.

나는 다시 한 번 세드릭을 훑었다. 오늘의 세드릭은 지나치게 완벽했 다. 앞머리칼이 한 올 흘러내린 것 까지도 완벽했다. 어떻게 봐도 길거 리 마실 나온 차림이 아니었다.

세드릭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 다.

“놀러 나왔습니다만.”

“거짓말.”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

다. 세드릭은 눈썹 한 번 까딱이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정말입니다.”

“그런 차림으로요?”

“이런 차림으로는 놀러 나오면 안 됩니까?”

“안 되죠! 왜냐면……,”

거기까지 말한 나는 입을 다물었 다.

‘사람들이 다 전하만 쳐다보잖아 요! 얼굴 안 따가우세요?’

그렇게 말하려던 나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 세드릭은 언제나 시선 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조금도 주변의 반응에 신경 쓴 적 없었고.

내가 조용해지자 세드릭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세니아 지구는 잘 아십 니까?”

“아뇨.”

세니아 지구는 저번 입춘제 때 처 음 와봤을 뿐이었다.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내 좀 해 주십시오.”

“잘 모른다니까요?”

“그럼 지금부터 함께 알아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나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세드릭 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세니아는 초행이라서.”

“……초행이신 분이 수행원도 없이 혼자 나오셨다고요?”

“수행원들에겐 휴가를 줬습니다.”

그건 나랑 같네. 나도 리나에게 휴 가를 줬으니까.

미약한 동질감이 경계심을 무너뜨 렸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반스 전하께서 왜 엉뚱한 짓을 하 고 계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뭔가 이유가 있겠지.

나는 세드릭이 말하기 싫은 것은

죽어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 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 차림으로 다니시 게요?”

행인들이 아까부터 힐끔힐끔 세드 릭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정장 차림을 통해서 그의 정체를 열심히 추리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구경을 할 수 가 없었다.

“전하. 제가 옷 한 벌 사드릴게요.”

나는 길 건너 옷가게를 가리켰다. 옷가게의 쇼윈도에는 큼지막한 망토 가 걸려 있었다.

다행히 세드릭은 고집부리지 않고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 대신 스 스로 망토 값을 치른 세드릭은 그걸 뒤집어썼다.

“음. 훨씬 낫네요.”

지금도 망토 밖으로 드러난 부츠가 지나치게 고급스럽기는 하지만, 아 까보다는 나았다.

“이제 괜찮습니까?”

세드릭이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 쓱였다.

‘그래, 뭐. 길동무 하나 생긴 셈 치 지.’

그렇게 나는 세드릭과 에른이라는 두 남자를 양옆에 매단 채 거리를 누비게 되었다.

축제는 대단했다. 어느 쪽을 돌아 봐도 눈이 휘둥그레 벌어졌다. 나는

연신 감탄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 다.

“와, 저 천막은 뭐지?”

“서커스 천막이군요.”

“이리야 출신 방랑 서커스인 듯합 니다.”

내 혼잣말에 세드릭과 에른이 차례 대로 답했다.

내내 그런 식이었다. 방랑 음악가 들을 발견했을 때도, 길거리 도박을 구경할 때도. 내 양 옆에서 즉시 답 이 튀어나왔다.

‘좀 기묘한 기분인걸.’

공작과 기사를 가이드로 데리고 다 니는 기분이랄까.

솔직히 편하긴 했다. 축제 관람은 더없이 순조로웠다.

“어, 저건!”

나는 어딘가를 가리켰다.

세드릭과 에른이 내가 가리킨 방향 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번엔

둘 다 대답하지 못했다.

세드릭이 물었다.

“저게 뭡니까, 레이디?”

“무지개 롤빵이요!”

내가 가리킨 것은 빵과 아이스크림 을 파는 노점이었다.

무지개 롤빵은 요즘 선풍적인 인기 로 제도의 디저트계를 강타한 제품 이었다. 인기가 하도 엄청나 어느 제과점을 가도 다 팔려 있기가 일쑤 였다. 나도 지난번 릴리가 사’ 온 걸 맛본 게 전부였다.

‘여기서 발견하다니. 운이 좋네!’

나는 성큼성큼 노점으로 다가갔다.

노점 아저씨가 사람 좋은 미소로 나를 맞았다.

“어이쿠, 예쁜 아가씨가 오셨네. 뭘 드릴까요?”

“무지개 롤빵 하나 주……/

말꼬리를 흐린 나는 뒤를 돌아보았 다. 두 가이드를 쳐다본 나는 노점

아저씨에게 다시 말했다.

“세 개 주세요.”

“예이!”

잠시 후, 하얀색 종이컵 세 개에 무지개 롤빵이 담겨 나왔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만큼 아기자기 한 색감이었다.

나는 그걸 세드릭과 에른에게 각각 건넸다. 둘이 엉거주춤 롤빵을 받아 들었다.

노점상이 함께 준 투명한 포크로 롤빵을 퍼먹으려던 찰나.

“잠깐.”

웬 손이 튀어나와 포크를 가로막았 다.

나는 눈을 끔뻑이며 세드릭을 올려 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세드릭이 대답 대신 롤빵을 노려보 았다.

나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불량식품일까봐 그러세요? 걱정 마세요. 이 무지개색은 천연 염료로 낸대요. 염료값도 싸서 싸구려로 바 꿔치기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세드릭은 계 속해서 롤빵을 노려보았다. 작은 롤 빵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무시 무시한 시선을 보낸담.

세드릭이 에른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더니 다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레이디, 잠시 제가 들어 봐도 괜 찮겠습니까?”

“네? 롤빵을요? ……뭐, 네에.”

나는 순순히 롤빵이 든 종이컵을 건넸다.

종이컵을 꾹 쥔 세드릭은 잠시 말 이 없었다. 몇 초 뒤 그가 다시 내 게 종이컵을 돌려주었다.

“확실히 천연염료로 만든 것 같군 요.”

그걸 쥐어 보고 안단 말이야?

나는 이상한 눈초리로 세드릭을 쳐 다보았다. 세드릭이 빙긋 웃어 보였 다.

“맛있게 드십시오. 레이디.”

“흠, 네에. 두 분도 어서 드세요.”

그제야 세드릭과 에른이 자기들 손 에 들린 롤빵을 바라보았다. 나는 둘에게 포크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잠시 제 롤빵을 쳐다보던 세드릭이 포크로 그것을 떠먹었다. 에른도 투 구 속으로 롤빵이 든 포크를 집어넣 었다.

우리는 사이좋게 롤빵을 먹으며 거 리를 구경했다. 새콤달콤한 크림이 폭신한 빵과 어우러져 무척 맛이 좋 았다.

한쪽 거리에선 길거리 연극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쪽 분수대에서 는 길거리 악단이 즉흥 연주를 벌이 고 있었다. 눈이 돌아갈 만큼 볼거 리가 많았다.

“오늘은 휴일이신가 봅니다.”

단 세 입만에 롤빵을 끝장낸 세드 릭이 말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가끔은 한가 하게 노는 날도 필요하죠.”

“동의해요. 하지만 전 오늘은 놀러 온 게 아니랍니다.”

“ 예?”

나는 시계탑을 돌아보았다.

마침 곧 기다리던 행사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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