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화〉
건국일 기념 무도회는 내리 3일동 안 이어진다.
나는 당연히 둘째 날도 황궁으로 향했다.
제이나가 선물한 순백색 꽃마차는 어김없이 자석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며 거리를 달렸다.
둘째 날 역시 귀족들이 바글거렸 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세드 릭 에반스 역시 둘째 날까지 참석한 것은 의외였다.
나는 아까부터 주변을 어슬렁거리 는 세드릭에게 말했다.
“전하, 오늘은 한가하신가 보네 요?”
“아뇨. 바쁩니다.”
시종의 쟁반에서 와인을 꺼내들며 세드릭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데, 한
가해 보이는데.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용기 를 내어 세드릭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다. 다들 단 칼에 거절당한 뒤 상처 받은 얼굴로 떠나갈 뿐이었다.
‘대체 뭐가 바쁘다는 거지.’
영애들을 상처주느라 바쁘다는 건 가.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잠시 세드 릭을 바라보다가, 곧 다시 대화에
매진했다. 한창 요즘 유행하는 레이 스 모양에 대해 열띤 토론이 벌어지 는 와중이었다. 나야 레이스 모양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들어 둬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런데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리스 향수?”
뒤를 돌아보자, 어느 틈에 다가온 건지 웬 청년이 코앞에 서 있었다.
‘적갈색 머리카락이네.’
벨레르 제국에서는 드문 머리색이 었다. 외국인인가?
적갈색 머리 청년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이리스에 제라늄을 섞은 겁니 까?”
“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확한 레시피 였다.
“네, 맞아요.”
“제라늄의 호불호 갈리는 향은 렌 지우드로 중화했고…… 맞습니까?”
“네. 네. 맞아요!”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맡은 걸로 이만큼이나 짚어내 다니. 향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가? 내 눈이 순식간에 반짝거렸다.
“훌륭한 시도군요. 렌지우드는 재 밌는 마법초죠. 조금만 섞어도 많은 허브의 냄새를 거짓말처럼 지워버리 니까요.”
“그렇죠. 저도 처음 발견하곤 깜짝 놀랐어요.”
“레이디께서도 렌지우드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적갈색 머리 청년이 후후 웃었다.
“저도 몹시 좋아합니다. 그만큼 독 특한 원료가 또 없거든요. 만나는 즉시 다른 향기를 없애버린다니, 놀 랍지 않습니까? 활용도도 무궁무진 하고요.”
“활용도요? 어떤 게 있을까요?”
나는 아직 렌지우드를 많이 연구하 지는 못했다. 이 청년은 기발한 레 시피라도 알고 있는 걸까?
“네. 무궁무진하죠.”
“하나만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방금 말씀드린 특성 덕 분에 렌지우드는……
나는 얼른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 다. 메모할 조향 수첩을 가져오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런데 이어진 청년의 말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독향을 만드는 최고의 재료랍니 다.”
아하, 그랬군. 독향……,
‘잠깐. 어, 네? 뭐라고요?’
나는 눈을 끔뻑였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 들었나봐요.
뭐라고 하셨죠?”
청년이 눈웃음을 지었다. 날카롭게 생긴 외모와 달리 서글서글한 눈웃 음이 었다.
“독향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아.
제대로 들었구나.
나는 애써 미소를 걸쳤다. 독향이 라. 그래. 그런 것에 흥미가 있을 수도 있지.
조금 놀라긴 했으나 그 또한 충분 히 취향의 일종일 수 있었다. 나는 예의를 차려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런 용도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이제 아시게 됐군요.”
“하하…… 그렇네요.”
“어떻습니까. 흥미가 생기십니까?”
흥미? 내가…… 독향에?
솔직히 말하면, 전혀 없었다.
나는 향기가 주는 아름다움이 좋았 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사람들 의 얼굴이 풀어지는 그 순간이 좋았 다.
때문에 독향 같은 것은 조금도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솔직히 답 했다.
“사실 독향은 제 취향이 아니랍니 다.”
“그렇군요. 사실은 저도 그쪽에 별 취미는 없습니다.”
음…… 거짓말 같은데.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 자, 내 눈을 살피던 청년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저는 독 향보다는 아름다운 꽃향기 쪽을 백 번 더 선호합니다. 레이디의 향기를 맡으니, 세일라 항구의 아이리스 정 원을 거닐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정말요? 세일라 항구에 다녀오신 적이 있으신가 봐요?”
“물론입니다. 아름다운 곳이죠. 이 맘때면 봄꽃이 마지막으로 만발해 한창 황홀할 겁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봄꽃으로 만발한 항구를 떠올렸다. 언젠가 꼭 가 봐 야 할 곳이긴 했다.
청년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은 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관심이 있으십니까?”
어라, 좀 가까운데.
청년이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우리 둘의 시선이 지나치게 좁아졌다. 나 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 다.
그 순간, 뒤꿈치가 어딘가에 부딪 혔다.
“레이디. 여기 계셨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세드릭이 내 바로 뒤에 선 채 내게 미소를 건넸 다.
“아, 세드릭 님.”
“한참 찾았습니다. 이쪽은?”
그렇게 말하며 세드릭이 적갈색 머 리 청년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일까. 세드릭은 분명 웃고 있는데, 청년을 향한 시선은 어딘가 오싹했다.
“아, 에반스 공작 전하이십니까?”
적갈색 머리 청년이 붙임성 있는 미소를 걸쳤다. 특유의 서글서글한 웃음이었다.
청년이 세드릭에게 손을 내밀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 전하. 타국에서도 전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외국에서 온 손님이신가?”
세드릭이 미소를 지우지 않고 대답 했다.
그러나 청년이 내민 손을 맞잡진 않았다.
“예. 센도르 왕국에서 왔습니다.”
“그런가?”
세드릭이 느긋하게 말꼬리를 늘였 다.
“내가 본 센도르 왕국인들은 특유 의 억양이 강했는데.”
센도르 왕국은 공용어 사투리가 독 특하기로 유명한 지역이기는 했다. 반면 적갈색 머리 청년은 아주 깔끔 한 표준어를 구사했다.
“하하.”
적갈색 머리 청년이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어디나 예외는 있는 법이지요.”
세드릭은 청년의 눈웃음을 한 번, 그리고 아직 내밀고 있는 손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곤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시죠, 레이디.”
“네? 어디로요?”
“곧 왈츠곡이 연주될 겁니다. 어제 처럼 저와 춤을 추시거나, 일찍이 테라스로 피하셔야 하지 않겠습니 까?”
“ 엇.”
나는 몸을 굳혔다. 세드릭의 말이
맞았다. 피할 수 있는데 굳이 춤을 추고 싶진 않았다.
나는 센도르에서 왔다는, 취향 독 특한 청년에게 살짝 눈인사를 했다. 청년은 예의 그 서글서글한 눈웃음 으로 답했다.
“하암.”
나는 쩍 하품을 했다.
“잠이 모자라.”
“그러실만도 하죠. 아가씨. 이틀 연 속 무도회에 참석하셨잖아요? 버티 신 것만 해도 대단하신 거예요!”
“그런가? 기껏해야 대화하고 춤 몇 번 춘 게 다인데, 되게 피곤하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리나가 가 져다 준 오렌지를 씹었다. 상큼한 과육에 정신이 좀 들었다.
“오늘도 가시는 거죠, 무도회?”
“응? 아, 오늘은 아냐.”
“정말요?”
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쭉 기지개를 켰다. 삼일 모두 참석하면 좋겠지만, 오늘은 달리 하 고 싶은 일이 있었다.
“가게를 지키시려고요?”
“아니. 무도회 기간에는 손님도 거 의 없는데 뭐.”
고급 상점 거리인 세논 지구를 찾 는 손님들은 대부분 귀족들이었다. 귀족이란 귀족은 모두 황궁으로 몰 려간 지금은 세논 지구도 텅텅 비어 있었다.
“오늘은 레니아 지구로 갈 거야.”
“네? 레니아에는 왜…… 아, 혹시 건국제 때문이신가요?”
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건국제 행사는 황궁에서만 열리지 않았다. 황궁에 출입하지 못하는 사 람들을 위해 거리에서도 성대하게 건국제 행사가 펼쳐졌다.
“아가씨, 위험하지 않을까요?”
리나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아가씨도 아시겠지만, 건국제는 규모가 큰 만큼 엄청 번잡스럽잖아 요. 가장행렬에다가, 서커스에, 온갖 거리 대회에…… 아, 얘기하다 보니 까 재밌을 것 같긴 하네요.”
리나가 무심코 수긍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엄격한 표정을 지 었다.
“아무튼,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에른 경과
함께 가실 거죠?”
“으응, 그렇지.”
놔두고 가려고 해도 불가능할 걸?
처음엔 에른이 사사건건 따라붙어 불편하기도 했지만 이젠 적응이 됐 는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러다 어 느 날 세드릭이 에른을 다시 데리고 간다고 하면 아쉬운 마음마저 들 것 같았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가게는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응? 지키다니? 뭐야, 리나. 잊어
버렸어?”
“ 네?”
“오늘부터 삼일 간은 휴가라고 했 잖아. 유급 휴가.”
나는 협탁에서 동전 꾸러미를 꺼내 리나에게 건넸다.
괜찮다느니, 필요 없다느니 사양하 는 리나에게 억지로 돈주머니를 안 긴 뒤, 나는 가게를 나섰다.
가게 옆 소박한 마차장에서, 순백 색 꽃마차가 정신 나간 위용을 뽐내 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늘은 황궁으로 가는 게 아니니 까, 저건 좀 부담스럽고……/
나는 늘 이용하던, 평범하고 비교 적 소시민스러운 마차 위에 올라탔 다.
“세니아 지구로 가 주세요.”
목적지를 말한 나는 떨리는 마음으 로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황궁 무도회에 참석하던 첫째 날만 큼이나 마음이 설렜다.
벨레르 제국의 거리 건국제는, 보
통 거리 축제가 아니었다.
규모가 어마어마한 만큼 대륙 각지 에서 돈냄새를 맡고 몰려온 볼거리 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거리 축제에 선……/
오늘의 목표를 떠올린 나는 두근거 리는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이미 마차가 충분히 빠르게 달리고 있는데도 조급한 기분이 들었다.
세니아 지구에 가까워지면서, 서서 히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조금씩
느려지던 마차는 결국 제자리에 멈 춰서고 말았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인파가 길에 가득했다.
“여기부턴 내려서 가요, 에른 경!”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에른이 얼른 내 옆에 따라붙었다.
다행히 타이밍 좋게 내린 것 같았 다. 멀리서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