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화〉
흥. 나는 코웃음을 쳤다.
말이야 고마운 말이었다. 하지만 세드릭이 정말 무도회가 있을 때마 다 내 파트너가 되어 주러 달려올 리는 없었다. 세드릭처럼 바쁜 사람 이 퍽이나.
“말씀은 감사해요.”
세드릭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상냥한 말이기는 했다. 물론 신사로서 발휘한 매너에 불과 하겠지만.
세드릭이 빤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빈말이 아닙니다만.”
“예, 정말 감사드려요. 전하 덕분에 앞으로 파트너가 없으면 어쩌나 하 는 걱정은 싹 덜 수 있겠네요.”
장난스레 대답하자 세드릭의 표정 이 미묘해졌다. 그가 입을 연 찰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엘 님, 여기 계셨군요!”
“저희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시…… 헉.”
“히익.”
루나, 사샤. 그리고 에일린과 릴리 가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그러나 사총사는 세드릭을 발견하 자마자 눈이 동그래졌다.
“아, 얘들아. 미안. 많이 찾았어?”
“에, 에반스 전하와 함께 계셨군
요?”
“죄송해요. 저희가 눈치가 없었어 요!”
소녀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저러다 뒷사람한테 부딪히겠다. 나 는 얼른 손을 뻗어 가장 가까운 릴 리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그래, 얘들아.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찾아온 거 아니야?”
“아, 참. 그렇지. 아리엘 님, 황후 폐하께서 아리엘 님을 찾고 계세 요!”
“뭐?”
누가 날 찾는다고? 나는 숨을 집 어삼켰다.
“황후 폐하께서? ……나를?”
“네.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았지만, 아무튼 아리엘 님을 본 사람이 있냐 고 여쭈셨어요.”
나는 얼른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황후 폐하께서 왜 저를 찾으시죠?
심각한 일일까요?”
“그럴 리가요.”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소시민인 나의 심장은 더욱 세차게 펄떡였다. 그런 나를 눈치 챈 듯 세드릭이 덧붙였다.
“별 일 아닐 겁니다. 함께 가시죠.”
고마운 말이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아. 여기들 계셨군.”
중후하고 우아한 목소리.
나는 얼른 최상급 접객용 미소를 만면에 걸쳤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올리며 예 를 차렸다.
황후의 뒤에는 델레이나 황녀도 있 었다. 마찬가지로 인사를 건네자, 황
녀는 조금 뾰족한 표정으로 인사에 답했다.
황후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의 시선이 나와 세드릭을 번갈아 훑었 다.
“아리엘 양. 다시 만나게 되어 반 갑소. 오늘도 세드릭과 함께로군?”
그러고 보니 황후와 처음 만났을 때도 세드릭이 옆에 있었지.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 님과는 방금 우연히 만났
답니다, 황후 폐하.”
“우연이라, 참 좋은 단어지.”
황후가 어딘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 며 부채를 살랑거렸다. 그리곤 세드 릭을 바라보았다.
“무엇 하느냐? 세드릭. 무도회장의 공기가 아리엘 양에게 너무 답답하 지 않겠느냐? 바람이라도 함께 쐬고 오거라.”
“그럴까요.”
황후가 세드릭에게 뜻밖의 말을 하
자, 세드릭은 또 그 말을 덥석 받았 다.
나만 가운데서 놀라 손사래를 쳤 다.
나가다니? 안 돼! 아직 제대로 향 수 영업을 하지 못했는데!
“하하,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하지만 저는 괜찮답니다. 전혀 답답하지 않아요.”
“그러시오? 황궁 정원은 어디든 아 름다우니 나중에라도 꼭 구경하시 오. 세드릭이 안내해줄 테니.”
하하…… 나는 어색함을 감추며 밝 게 웃었다.
무도회가 한창 진행 중인데, 정원 을 구경하라니. 저번 황궁 무도회 때야 파하는 분위기라 괜찮았다지 만, 오늘은 조심하는 게 좋았다.
‘그런 일을 했다간 황후 폐하의 남 동생께선 곧장 뜨거운 스캔들에 휩 싸이실 거예요.’
흐뭇한 표정의 황후와 달리 델레이 나 황녀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황녀의 눈초리가 나와 가까이 붙은
세드릭을 못마땅히 훑었다.
“어머니, 그만 하세요. 세드릭 오라 버니께서 알아서 하시겠죠.”
“으음? 허허, 물론 그야 그렇겠지-아, 아리엘 양. 그대를 찾은 건 다 른 이유가 있어서라오.”
드디어 본론을 이야기하시는 구나.
나도 모르게 바짝 긴장이 됐다.
제국의 황후가 내게 볼일이 있다 니. 도대체 무슨 볼일일까. 궁금증이 들면서도 긴장도 되었다.
나는 황후의 입술이 열리는 것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이리스에 대해서 영애에게 조언 을 좀 구하고 싶다오.”
응?
아이리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눈을 깜 빡거 렸다.
“아이리스, 말씀이신가요?”
“그렇소. 황궁의 정원은 예로부터 황후의 소관 아래 있지. 곧 계절이 바뀔 텐데, 슬슬 새로 심을 꽃을 준
비해야 하지 않겠소. 아이리스는 어 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세상에.
나는 꾹 주먹을 쥐었다.
황후가 내게 직접 꽃에 대해 묻다 니. 이건 엄청난 사건이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나는 애써 설렘을 감추며 교양 있 게 웃었다.
“아이리스는 기르기도 그다지 어렵 지 않고, 벨레르의 국화와도 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지지요. 만약 황궁
정원에 아이리스를 심으신다면 틀림 없이 보기 좋을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
“흐음, 그렇소?”
황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펄떡거렸다. 황궁 정원에 아이리스가 핀다면, 엄청난 일이 될 터였다.
어쩌면 아이리스는 단순히 흘러가 는 유행에 그치지 않고, 스테디한 상품이 될지도 몰랐다.
“사실 여태까지는 존재도 모르던
꽃이었는데, 우리 델레이나가 요즘 그 꽃에 관심을 보이지 않겠소? 그 런 외국 꽃 따위에게 졌다는 걸 믿 을 수 없다나, 하는 소리를 하면서 말이오.”
“어머니!”
황후가 재밌다는 듯 껄껄 웃으며 말했다. 델레이나 황녀의 얼굴이 새 빨개졌다.
“아무튼, 향을 맡아 보니 제법 마 음에 들더군. 독특한 향기였어.”
“그러셨습니까, 폐하?”
나는 순간 눈을 반짝였다.
이 순간, 내 눈에 황후는 까마득이 높은 왕족이 아닌, 한 명의 소중한 고객님일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 이 열렸다.
“황후 폐하. 실례가 아니라면 폐하 께 작은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 무엇이오?”
“향기랍니다.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황후 폐하께 온 종 일 기억될 수 있는 향기를 선물해 드리고 싶어요.”
“향기라.”
황후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껏 많은 선물을 받아보았지 만, 향기를 선물로 받긴 처음이로군. 그래, 그 귀중한 선물은 어떻게 줄 요량이오?”
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디에 향수를 뿌려야 잘 뿌렸다고 소문이 날까?
황후의 옥체에 직접 뿌리고 싶진 않았다. 금세 익숙해져 향을 맡지 못하게 될 테니까.
그렇다면 어디에 뿌리는 게 좋을 까? 몸이 아닌 소품이면서도, 잊을 만하면 한 번쯤 향을 맡을 수 있을 만큼 자주 꺼내들 만한 것이……,
문득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나는 씩 미소를 지었다.
“황후 폐하, 이곳은 어떠십니까?”
황후가 고개를 숙여 내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황후의 한쪽 눈썹이 의외라는 듯 올라갔다.
“부채?”
“예, 폐하. 부채를 피실 때마다 폐 하 주변의 공기가 향긋하게 물든다 면 무척 기쁠 것 같습니다.”
황후는 부채를 자주 펼치는 버릇이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이건 완벽한 아이디 어였다. 나는 기대감을 담아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황후는 잠시 자신의 부채를 내려다
보았다. 곧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흐음. 이런 장소에서 선물을 받는 것은 또 처음이로군.”
승낙인 걸까?
나는 잠시 동안 숨도 못 쉬고 황 후의 입술만 쳐다보았다.
“좋소. 기꺼이 영애의 성의를 받아 보겠소.”
황후가 웃으며 부채를 내밀었다.
승낙이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감사합니다, 폐하!”
활짝 웃으며 나는 파우치 속에서 향수병을 꺼냈다.
내 자신작 중의 자신작〈보랏빛 밤의 끝자락〉이 영롱한 자태를 드 러 냈다.
‘황후 폐하께 뿌리게 될 줄 알았다 면 좀 더 열심히…… 음, 아냐. 아 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보다 더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조향실에 틀어박혀 연구를 거듭했던 시간들을 믿었다.
“그럼, 황후 폐하. 잠시 실례하겠습 니다.”
나는 조심스레 황후가 내민 부채를 받았다.
황후가 내 손에 들린 향수병을 홍 미로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나는 부채에 향수를 분사한 뒤, 가
볍게 부채질을 했다. 금방 공기 중 으로 달콤한 꽃내음이 퍼져나갔다.
“역시, 향이 좋군.”
황후가 은은히 웃었다.
“아무래도 이번 여름에는 황궁 정 원에 아이리스를 심어야겠어.”
“어머니. 하지만 어찌 외국의 꽃을 벨레르 황궁에……,”
“하하, 뭐 어떻느냐. 이런 게 또 교류의 일종인 게지.”
델레이나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 을 꾹 다물었다.
나는 애정을 듬뿍 담아 그런 황녀 를 바라보았다. 황후가 아이리스에 대해 알게 된 건 다 황녀 덕이었다. 내게 델레이나 황녀는 천사, 혹은 요정과 다름없었다.
“황녀님.”
나는 델레이나 황녀를 향해 공손히 입을 열었다.
황녀가 흠칫 놀라더니 나를 팩 노 려 보았다.
“뭐지?”
“오늘도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나의 진심 어린 찬탄에 황녀의 얼 굴이 쩍 굳었다. 황녀가 입술을 더 듬거 렸다.
“무, 무슨.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그냥,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 어요.”
황녀가 홱 부채로 제 얼굴을 가렸 다. 별 소리를 다 한다는 듯 콧방귀 도 뀌었다.
나는 문득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황후에게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는 데, 너무 오래 그를 방치했다는 생 각이 들었다.
세드릭은 바로 옆의 벽에 느긋이 기댄 채, 시종이 들려 준 와인을 머 금고 있었다.
‘완전 구경꾼 자센데.’
그는 여태 내가 황후에게 열성적으
로 아이리스를 칭찬하고, 향수를 뿌 려주던 모습을 고스란히 관전한 것 같았다.
나는 슬쩍 세드릭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황후에게 황궁 정원에 아이리스를 심겠다는 말을 들어냈으니, 오늘 영 업은 유례 없는 대성공이었다.
‘당신이 투자한 조향사가 오늘도 소처럼 일을 해냈답니다.’
세드릭이 물끄러미 내 엄지를 내려 다보더니, 곧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