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74화 (74/153)

〈75 화〉

“전하. 잠시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하고 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세드릭이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면서도 순순히 끄덕였다.

나는 윈스턴 백작을 데리고 옆으로 몇 걸음 걸었다. 그리곤 백작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버지. 제 혼사는 부디 걱정 마 세요. 윈스턴 백작위는 제가 책임지 고 이을 테니까요.”

물론 지금 나는 온 신경을 향수 가게에 쏟고 있지만, 그렇다고 백작 위를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아버지 눈에 저는 어리고 멍청한 딸이겠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 버지께선 저 외에 다른 후사를 보지 못하셨으니, 윈스턴 소백작이 될 사 람은 결국 저 아리엘 윈스턴 뿐이잖

아요?”

백작의 눈썹이 지진난 듯 꿈틀거렸 다. 나는 백작이 입을 열 틈을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윈스턴이라는 이름에 먹칠할 생각 은 없어요. 곧 제가 물려받을 이름 이기도 하니까요.”

나는 고객님들께 보여주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부디 걱정 마세요, 아버

지.”

윈스턴 백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 락 격동했다.

하지만 백작은 입술만 더듬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말 은 무척 많아 보였지만, 너무 많은 나머지 입이 꼬인 것 같았다.

나는 그 틈을 타 잽싸게 백작 앞 을 벗어났다.

세드릭을 바라본 내가 방긋 웃었 다.

“작별 인사는 잘 드렸어요. 그럼

이제 가 볼까요?”

세드릭과 함께 테라스를 벗어나며 나는 작게 혼잣말을 했다.

“진짜 데릴사위라도 얻어야 하나.”

그럼 백작도 날 들들 볶길 포기하 겠지.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세드릭이 멈칫했다.

“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나는 다시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세요? 제게 볼 일이 있다고 하셨죠?”

“아, 네. 있습니다. 볼일.”

그러나 세드릭은 볼일을 이야기하 는 대신 지나가던 시종을 불렀다. 그가 시종에게서 받은 무화과 술잔 을 하나는 자신이 들고, 하나는 내 게 건넸다. 그 손짓은 몹시 여유롭 기 그지없었다.

‘뭔지는 몰라도, 바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세드릭이 술잔을 입에 머금었다. 호박색 액체가 조금 메말라 있던 입 술을 살짝 축였다. 세드릭의 목울대 가 천천히 위아래로 꿀꺽였다.

솔직히 말해서 보기 좋은 광경이긴 했다. 정상적인 미의식을 지닌 사람 으로서 나는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 했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세드 릭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훔쳐

보다 들킨 사람처럼 놀란 속을 숨기 고 무해하게 웃었다.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

“일단은 춤부터 출까요?”

응?

예상치 못한 그의 제안에 나는 몸 을 굳혔다.

“춤이요?”

놀란 나머지 목소리 끝이 꺾였다.

그러고 보니 주변 사람들은 모두 짝을 지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왈츠 준비 자세를 취하고서. 다들 전문 무용인처럼 능숙하고, 자연스 러웠다.

나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실토했다.

“전하. 아시겠지만 저는 춤을 잘 못 추고, 마지막으로 전하와 춘 뒤 로 연습도 전혀 하지 못했는데요.”

“괜찮습니다. 제가 리드하면 되니 까.”

세드릭이 낮게 웃었다.

“저번처럼만 하십시오.”

그렇게 말해도 자신 없는데. 이번 에야말로 세드릭의 발을 밟으면 어 떡하지. 저 완벽하게 단정한 구두코 에 내 발자국이 나면……,

우물쭈물하는 나를 세드릭이 부드 럽게 잡아당겼다.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서 세드릭과 눈이 마 주쳤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 어쩐지 괜스 러운 불안들이 눈처럼 녹았다.

‘그래. 발 좀 밟았다고 설마 세드 릭이 역정을 내겠어.’

지금까지 내가 봐온 세드릭은 그렇 게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현악기의 선율이 샹들리에 불빛처럼 홀을 휘감았다.

나는 긴장을 풀고 세드릭의 손에 몸을 맡겼다.

멜리사 크라운은 촉각을 곤두세웠

다.

무도회는 그녀에게 또 다른 일터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 는 가십거리는 곧 일감이었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어느 때보다 도 활발히 일감이 쏟아지고 있었다.

“에반스 전하와 아리엘 양이 재결 합을 했다고요?”

“아니, 확실한 건 아닌데요. 그런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리더군요/

“하지만 두 분이 정식으로 교제할 때도, 딱히 전하께서 아리엘 양에게 관심을 보이시진 않았는데…… 오죽

했으면 전하가 약점 잡혀서 교제를 강요당하고 있는 거란 소문까지 돌 았겠어요? 그런데 이제 와 재결합 을?”

“뭐, 사람 마음은 변하는 거니까요. 그 얘기 못 들었어요? 요즘 저 둘 이 틈만 나면 붙어 다닌다는군요.”

“아, 들었어요. 저번 황궁 무도회에 서도 파트너로 참석했다고……

멜리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멜리사 역시 아리엘에게 넌지 시 물은 적이 있었다. 세드릭과 다 시 분위기가 좋아졌다는 소문이 사 실이냐고.

그때 아리엘이 뭐라고 했더라?

‘멜리사도 그런 헛소문을 믿어요? 전혀 아니에요.’

그렇게 코웃음치던 얼굴이 눈에 선 했다.

그렇다면 요즘 사교계에 자자한 이 재결합설은 아예 헛소문인 걸까?

‘글쎄. 마냥 그렇게 치부하기에 도……/

멜리사는 저 멀리로 시선을 던졌 다.

수많은 남녀가 빙그르르 춤을 추고 있었다. 거대한 오르골의 한 장면 같았다.

하지만 그 수없이 많은 쌍 중에서 도 세드릭과 아리엘은 단연 눈에 띄 었다.

둘의 왈츠는 현란하진 않았다.

사실 아리엘은 박자를 맞추는 것만 도 버거워 보였다. 하지만 아리엘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은 신기할 만큼 그녀를 잘 리드, 아니 조종하고 있 었다. 덕분에 멀리서 보면 둘은 그 저 아름다고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만 보였다.

멜리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세드 릭을 주시했다. 정확히는, 아리엘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을.

‘헛소문이라고?’

멜리사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 다.

“멜리사 양, 멜리사 양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누군가 멜리사 앞에서 장갑 낀 손

을 흔들었다.

강렬한 청자색의 레이스 장갑이었 다. 색깔만 봐도 장갑의 주인이 유 행에 민감한 레이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음, 글쎄요.”

“에이, 무조건 다시 만나고 있는 거라니까요.”

“하지만 아리엘 양께선 휴일도 없 이 항상 가게만 지키세요. 정말 둘 이 연애 중이라면 데이트를 거의 못 하고 있다는 건데, 그게 말이 돼 요?”

“좀 이상하긴 하죠.”

“아니, 여러분. 제 말 안 들으셨어 요? 둘이 황궁 무도회에 함께 참석 했다니까요?”

“세드릭 전하께서 파트너를 못 구 하셨나보죠.”

“농담하세요, 영애? 세드릭 전하가 요?”

이번에도 재결합설에 대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세드릭과 아리엘이 ‘재결합 했다’ 파와, ‘아직 어색한 전 애인 사이다’ 파. 둘로 팽팽히 나뉜 의견은 좀처

럼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뭐, 사실 여부야 본인들 밖에 모 르겠지만,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 어요. 레이디 아리엘이라면 저도 세 드릭 전하를 포기할 수 있다는 거 요.”

청자색 장갑을 낀 영애가 어딘지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즉시 지적이 날아왔다.

“포기는 무슨, 전하가 무슨 물건이 에요? 아니, 가져본 적은 있으시고

요?”

“아이, 참.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요, 말이. 저길 봐요. 두 분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요.”

청자색 장갑 레이디가 말하자, 다 른 레이디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 의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춤 추고 있는 둘에게 향했다.

“세드릭 님께선 어쩜. 오늘도 완벽 하시네요.”

“턱선이 좀 날카로워지신 것 같기 도 하고…… 그렇지 않나요? 아아,

걱정돼. 과로하시는 걸까?”

“이 거리에서 턱선이 어떻게 보여 요? 호들갑 떨지 말아요, 영애.”

“아리엘 양은 또 어떻고요. 저 드 레스는 어느 숍의 작품일까요? 턴을 돌 때마다 하늘거리는 색감이 황홀 하네요.”

“과연 올해 유행을 선도하신 분 다 우세요. 저 어려운 청자색을 완벽하 게 소화하시네요.”

“정말 그래요. 구경만 해도 눈이 즐겁네요.”

멜리사는 유유히 술을 홀짝이며 레

이디들의 대화를 구경했다.

이 자리의 레이디들은 모두 청색과 보라색이 섞인 소품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장갑이나, 파우치. 코사지나 모자 장식. 아리엘처럼 과감하게 드레스 를 통째로 지어 입은 사람은 드물었 지만, 모두 조그맣게나마 청자색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레이디들의 대화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나저나〈보랏빛 밤의 끝자락〉 은 구하셨나요?”

“아뇨, 아직이요. 매일 아침마다 사 용인을 보내긴 하는데, 번번이 품절 이라고 빈 손으로 오지 뭐예요. 저 도 빨리 그 향을 뿌려보고 싶은데 요.”

“저도요. 샘플이라도 어떻게 구해 볼 순 없을까요?”

청자색 소품을 하나씩 낀 레이디들 이 조르르 서서, 아리엘이 춤추는 방향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멜리사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다음에 아리엘을 만나면 인터뷰를 한 번 부탁해봐야 할 것

같았다.

따내기만 한다면 적어도 여기 있는 레이디들은 번개처럼 신문을 구매해 갈 것 같으니.

쏘 소보

‘휴, 안 밟았다.’

연주가 끝나는 순간, 나는 스스로 에게 박수를 보냈다. 물론 속으로만.

다행히도 이번에도 세드릭의 발을 밟지 않을 수 있었다. 무용 교습 한 번 받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내게

댄스 재능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세드릭이 웃었다. 나는 살짝 어깨 를 피며 말했다.

“왈츠 실력이 저번보다 나아진 것 같아서요. 전하께선 어떻게 생각하 세요?”

“아, 네. 확실히 능숙해지셨습니 다.”

역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세드릭은 절대 빈말하는 성격이 아 니다. 그가 늘었다면 정말 는 거였 다.

“그렇죠, 전하? 다행이네요. 이제 무도회에 가서 어색해질 일은 없겠 어요. 여태까지는 다 같이 왈츠 추 는 분위기가 되면 슬그머니 빠져야 했거든요.”

방금까지 춤을 추느라 아드레날린 이라도 돈 걸까, 나는 평소보다 말 이 많았다. 세드릭은 유달리 수다스 러운 나를 내려다보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당당하게 다른 영식과 춤을 출 수 있을 테니까요. 잘 된 일이죠.”

정말 잘 된 일이었다. 다들 파트너 와 나가 춤을 추는 동안 혼자 벽에 서 와인이나 홀짝였으면 참 어색하 고 민망했을 테니까.

내내 웃고 있던 세드릭의 표정이 굳었다.

“앞으로는, 당당하게?”

“네. 친한 영식도 없어서 여태 곤

란했거든요. 모르는 영식 발을 밟았 다간 분위기가 싸해질 테니까요.”

“……글쎄요. 무도회라고 꼭 춤을 춰야 합니까?”

“네? 그야…… 이름부터 무도회잖 아요. 춤을 추는 연회요.”

“남들 하는 걸 다 따라하면 재미가 없죠.”

그게 방금 억지로 왈츠를 추게한 사람이 할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앞으로는 저를 부르십시오.”

“ 네?”

“파트너가 필요한 일엔 저를 부르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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