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화〉
노기 어린 목소리. 나는 불쾌한 기 시감에 고개를 들었다. 이 목소리가 누구 것이었더라?
시선을 돌리자마자 나는 익숙한 얼 굴과 마주칠 수 있었다.
‘ 아.’
윈스턴 백작.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머리 끝까 지 화가 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 다.
‘……하아. 귀족들이 잔뜩 모이는 자리이니 마주칠 수 있겠다고는 생 각했지만.’
정말 이렇게 정통으로 맞닥뜨리다 니. 저 노기 어린 얼굴을 보자 벌써 부터 성가신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가면 을 썼다. 윈스턴 백작의 성난 걸음 걸이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영애들
이 놀란 얼굴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백작이 내 앞까지 다다랐다.
백작과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이 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보는 건, 그 래. 화가 머리끝까지 난 백작이 나 를 백작저에서 내쫓았을 때인가.
나는 일단 생물학적 아버지에게 예 의를 차려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안녕할 것 같으냐, 아리엘.”
백작이 으르렁거리듯 대답했다.
이런뿔이 많이 나셨구나. 하 긴 백작은 나를 내쫓을 때 내가 곧 꼬리 내리고 잘못을 빌며 돌아올 줄 알았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 길로 아예 독립을 해 버렸지. 백작의 입장에서는 확실 히 복장이 터질 만한 일이었다.
“아리엘 윈스턴. 장사꾼 놀이에 푹 빠져 있는 건 여전하구나!”
백작의 목소리는 주위를 의식한 듯 지독하게 낮았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영애
들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한 두 발짝 물러나기 시작했다. 집안싸 움엔 끼어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 다.
‘안 돼. 어떻게 잡은 고객님들인 데!’
멀어지는 영애들을 보자 억장이 무 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마음 을 다잡고 일단은 백작에게 집중했 다.
“아버지? 일단은 인적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 말씀하시죠.”
일단 대뜸 소리부터 쳤던 윈스턴 백작도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긴 하는 모양이었다. 백작이 쯧 혀를 차곤 앞장섰다.
나는 샤를로트와 루나, 소녀들을 향해 살짝 눈짓했다. 루나와 소녀들 도 이번에는 끼어들지 못하고 걱정 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 다.
곧 나와 윈스턴 백작은 인적 없는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백작의 보좌관이 테라스의 유리문 을 닫자마자, 백작이 나를 돌아보았
다.
“늦은 사춘기도 이제 끝낼 때가 되 었다, 아리엘.”
“아버지.”
“네가 유서 깊은 윈스턴 백작가의 후손으로서 소임을 다할 때가 왔다 는 거다.”
백작의 보좌관이 품 속에서 무언가 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물건의 정체는, 작은 초상화였다.
“네 혈통에 걸맞는 신랑감이다. 지
금, 아니. 향후 십 년간 나올 결혼 매물로는 최상이라고 할 수 있지.”
맙소사.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꺼내 는 얘기가 또 결혼 이야기라니. 윈 스턴 백작도 참 한결같은 사람이었 다.
초상화는 한 남자의 얼굴을 담고 있었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그럭저 럭 그 나잇대에 걸맞은 인상의 남 자.
초상화 밑에는 친절히도 이름 역시 적혀 있었다. 카이도 델런트 소후작. 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델런트 후작은 노환이 깊다. 곧 소후작이 그 자리를 이어받겠지. 그 게 무슨 뜻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 너는 윈스턴 백작이 자 델런트 후작 부인이 되는 것이 다, 아리엘.”
“네 허영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자리 아니냐? 델런트 후작가는 황실 과 가계도가 닿아 있다. 즉, 너 역 시 멀게나마 황족과 연을 맺게 되는 것이지.”
백작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를 내 려다보았다. 내가 차마 거절하지 못 할 패를 제시했다는 듯.
영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벨레르 제국은 황권이 그렇게까지 강한 나 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족은 황 족이었다. 황족과 연이 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권력과 명예 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만약 다른 영애들이었다면 열이면 열 혼사를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겐 지금 결혼 준비에 낭비할 시간 이 없었다. 내 가게가 요즘 얼마나
바쁜지 알면 누구든지 동의할 이야 기였다.
‘내 생물학적 아버지께선 역시 여 전하시네.’
윈스턴 백작에게 자식이란, 여전히 결혼 장사로 팔아치울 수 있는 재산 에 불과했다.
백작이 과연 내 향수 가게에 관심 을 가져본 적이 있을까? 아니, 아마 이름조차 모를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자신만만한 얼 굴을 할 수 있는 거겠지. ‘이 정도
혼사를 물어왔는데 네가 감히 내 말 을 거역할 수 있겠느냐’, 하고 쓰여 있는 듯한 얼굴을.
나는 짧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백작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어렵게 주선하신 혼사이실 텐데,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결혼 계획이 없어요.”
“아리엘 윈스턴!”
“그 말씀을 하기 위해 부르신 거라
면,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후작 부인이 될 수 있는 기회라고 했지 않느냐! 자식을 둘만 낳으면, 하나는 델런트 후작, 그리고 하나는 윈스턴 백작이 되는 것이다. 귀족 가문 아가씨로서 이보다 더한 영예 가 어디 있겠느냐? 이런 기회가 두 번 다시 올 것 같으냐?”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의 잔소리는 아무래도 꽤 오래 이어질 것 같았다. 나는 슬쩍 귀를 닫으며 무료히 시선을 돌렸다.
테라스의 유리문 너머는 빙그르르 춤추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백작의
잔소리보다는 확실히 흥미로운 광경 이었다. 잠시 그 광경에 시선을 주 던 와중, 나는 문득 몸을 굳혔다.
‘ 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남자가 사람 들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남자의 좌우로 물러났다. 세드릭은 그 한가 운데를 더없이 여상한 표정으로 천 천히 걸었다.
‘과연. 마차장에서 허둥지둥하던 나와는 다르시군.’
나도 모르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작 마차장 속 시선을 부담스러워 했던 나와 달리 세드릭은 제 집 안 방을 거닐듯 평온해 보였다.
“네가 나에 대한 반항심에 눈이 멀 었구나. 애처럼 굴어 봐야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리엘.”
“아리엘! 내가 이야기하는데 어딜
보고 있는 거냐!”
내 흐릿한 미소를 발견한 백작이 소리를 높였다.
아. 너무 오래 딴청 피웠군. 나는 살짝 혀를 찼다. 백작이 내가 바라 보고 있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백작의 시야에 세드릭 에반 스가 걸렸다.
“하!”
백작이 거하게 헛웃음을 쳤다.
“설마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게냐?”
나는 세드릭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련이라뇨, 아버지.”
“한사코 혼사를 거절하는 이유가 역시 그것이었구나. 아리엘, 내 한심 한 딸아. 네가 기다린다고 해서 공 작이 너를 거들떠나 볼 것 같으냐?”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 데…… 전 전하께 별 마음 없어요.”
“자존심 세우는 게냐.”
백작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요즘 에반스 공작과 몇 번 어울렸다는 것은 알고 있다. 황궁 무도회에도 함께 참석했다지?”
“네가 그래서 아직도 헛된 희망을 품고 있는 게로구나. 쯧, 내가 너를 이리도 순진하게 키웠다니!”
백작이 탄식했다. 보좌관마저도 한 심한 어린 양을 보듯 나를 바라보았 다.
“공작은 그저 너를 가까이함으로써 귀찮은 혼사들을 물리려는 것일 뿐 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제껏 그가 청혼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느 냐?”
백작의 오해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 다.
나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 다. 저 밖엔 아직 이야기 나누지 못 한 고객님들이 많았다. 이런 곳에서 백작의 말도 안 되는 의심이나 받으 며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 다. 딱 오십까지만 세고 나면, 예의 고 뭐고 그냥 자리를 떠야지.
“이리도 순진해서 무슨 가게를 운 영하겠다고. 보나마나 빚잔치 중일 테지? 이번만큼은 아비 된 도리로 갚아줄 테니 일탈은 이제 그만두거 라!”
지루해진 나는 무심코 또 시선을 돌렸다.
순간 숨이 멈췄다.
테라스 너머에서 세드릭이 나를 바
라보고 있었다.
놀란 것도 잠시, 나는 살짝 눈을 내리깔아 인사했다.
그러나 세드릭은 내 눈인사에 답하 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예의 상 미소 짓지도 않았다.
대신 내게로 곧장 걸어오기 시작했 다.
“그리고, 사교계에서도 좀 유용한 인맥과 어울려야지. 아직 성인도 되
지 않은 어린 것들과 어울린다고 들 었다. 도대체 그런 인맥이 네게 무 슨 도움이 되겠느냐?”
세드릭이 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이 갈라지며 길을 터 주었다.
세드릭은 아무 어려움 없이 성큼성 큼 테라스를 향해 걸었다. 나는 점 점 가까워지는 세드릭의 얼굴을 마 주하며 눈을 깜빡거 렸다.
“아리엘! 귀담아듣지 않고 또 어딜 보고 있는……/
백작의 시선이 나와 같은 곳을 향 했다.
백작이 말꼬리를 흐렸다. 세드릭은 어느새 훌쩍 가까워져 있었다.
곧 벌컥, 테라스의 유리문이 열렸 다.
“여기 계셨습니까?”
테라스의 밤바람이 세드릭의 머리 칼을 살짝 흩날렸다.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 네.”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장 다가오다 니.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윈스턴 백작은 나보다도 더 당황한 것 같았다. 백작이 굳은 목소리로 세드릭을 아는척했다.
“공작 전하.”
세드릭은 백작을 흘긋 바라보더니 짧은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윈스턴 백작, 잠시 실례해도 괜찮 겠소?”
“ 예?”
언제나 품위를 중요시하던 윈스턴 백작의 목소리가 당황으로 꺾였다.
“제 딸에게 볼일이 있으십니까, 전 하?”
“있지. 아주 급한 볼일이.”
세드릭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윈스턴 백작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
했다.
백작의 머릿속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나와 세드릭이 또 다시 황궁 무도 회에서 어울린다면 사람들이 수군거 릴 테니, 지끈지끈 거라겠지. 그건 곧 나라는 결혼 매물에 하자가 생긴 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만약 세드릭이 만만한 상대였더라 면 백작은 진즉 역정을 냈을 것이 다. 괜히 가족의 일에 참견하지 말 고 꺼지라면서.
그러나 윈스턴 백작은 세드릭 앞에 서 끄응, 이상한 소리를 낼 뿐이었 다.
“그러십시오. 아리엘, 늦지 않게 돌 아오거라.”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 같은 대사였다. 나는 속으로 픽 웃곤 세 드릭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