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72화 (72/153)

〈73 화〉

“어머나.”

“세상에!”

사샤, 에일린, 릴리, 루나. 그리고 리나와 로잘린이 보낸 고용인.

모두가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내 반응 역시 그들과 다르진 않았다. 나는 간신히 중격을 거두곤 더듬거 렸다.

“이렇게 커다란…… 마차를요? 선 물로 주셨다고요?”

척 봐도 너무 비싸 보이는데, 이렇 게 값나가는 걸 받으면 양도세 가…… 아니, 여긴 그런 게 없나.

당황한 나머지 머릿속이 혼란스러 워졌다.

마부가 오른손을 가슴 위에 올리곤 꾸벅 고개를 숙였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황궁까지 모 시겠습니다.”

“아리엘 님! 덥석 받으세요!”

“그래요! 와아, 역시 길베르트 백 작님은 배포가 크시다니까!”

사샤와 에일린이 속닥거렸다.

나는 짧은 고민 끝에 결국 마차 위로 발을 올렸다.

소녀들이 우르르 내 뒤를 따랐다. 다섯이나 되는 레이디들의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담기에 마차 내부는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마차가 거리를 나아가는 내내, 지 나가던 모든 행인이 우리에게로 고 개를 돌렸다.

그건 황궁 마차장에 도착해서도 마 찬가지 였다.

마차장을 가득 메운 호화 마차들. 그 가운데에서도 생화로 장식한 순 백색 마차는 단연 눈에 띄는 모양이 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귀족들이 멍 하니 이쪽으로 시선을 뺏겼다.

마침내 마차가 움직임을 멈췄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마차장의 모두가 마차 문을 향해 시 선을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좀 긴장되네.’

가슴이 콩콩거렸다. 어느 정도 이 제 시선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 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모두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 도 발을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괜찮아. 침착하자. 이 정도 시선은 아무것도 아냐. 심호흡을 하는 거 야.’

관심은 더 많은 고객님을 부른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말도 있잖아?

그렇게 되뇌자 조금 긴장이 가라앉 았다. 심호흡을 한 나는 마차 밖으

로 한 발을 내딛었다.

“오오.”

“저 레이디는……-”

수군거림이 들렸다. 내 뺨이 희미 하게 달아올랐다.

“그 아가씨 아닌가? 봄의 제전에서 우승했다는……/

“메이 퀸을 거머쥐었다는 그 레이 디 말이지?”

“과연…… 범상치 않은 등장이로 군.”

내 뛰어난 청력이 수군거림을 속속 들이 수집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 도 들리지 않는 척 고개를 당당히 들었다.

‘……아.’

순간 내 눈빛이 살짝 힘을 잃었다.

말 그대로, 이 자리의 모든 시선이 내게로 꽂혀 있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다.

이 사람들에게 나는 올해의 메이 퀸이다.

봄의 제전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 은 지금, 메이 퀸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브랜드나 마찬가지였다.

힘겹게 지은 미소는, 의외로 가볍 게 입꼬리에 스며들었다.

나는 아무 수군거림도 들리지 않는 척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마차장을 나섰다.

건국일 기념 무도회가 일 년 중 가장 거대한 무도회라는 건 헛소문 이 아니었다.

제국의 귀족이란 귀족은 모두 이곳 에 온 것 같았다.

영롱한 샹들리에 불빛, 아름다운 음악.

꽃망울이 터지듯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꿈결같이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모 두들 이 안에서만큼은 근심과 걱정 따위 전부 내던진 듯했다.

나는 제국 귀족들에게 향수를 영업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잠시 접어 두었다. 일단은 이 공간에 익숙해지 는 게 먼저였다.

“아리엘 님! 카나페 드실래요?”

“여기 무화과 술이 엄청 맛있어 요!”

다행히 소녀들은 이 호화로운 공간 에 전혀 주눅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루나가 쥐어준 무화과 술을 홀짝였다. 달콤하면서 씁쓸한 맛이 혀끝에 맺혔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유명인이 보 였다. 과연 대단한 연회이기는 했다. 감탄을 담아 작게 휘파람을 불 때였 다.

“아리엘 양, 여기 있었군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샤를 로트가 웃으며 우아하게 손을 흔들 었다.

“샤를로트 양! 휴양지에서 돌아왔 군요.”

백옥 같던 샤를로트의 피부가 건강 히 그을어 있었다. 농염한 아름다움 이 뚝뚝 흘러넘쳤다. 주변 영식들이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에, 즐거웠답니다. 아리엘 양도 즐겁게 보냈죠? 이번 봄.”

샤를로트가 한쪽 눈을 찡긋이며 말 했다.

우리는 과일 음료를 홀짝이며 잠시 회포를 풀었다. 오랜만에 만났더니 할 말이 너무 많았다.

샤를로트는 나를 위해 남부의 아름 다운 섬, 제시아 군도에서 열리는 유명한 꽃 박람회에 다녀왔다고 했 다. 나는 두 손을 꼭 모은 채 샤를 로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요? 꽃이 호수만하다고요?”

“네에. 과장이 아니더라니까요. 게 다가 향기는 어찌나 강렬한지……/,

한참 열띤 대화가 오가는데, 웬 목 소리가 우리를 불렀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아리엘. 그 리고 레이디 샤를로트.”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동시 에, 주변에서 머물던 사람들이 아까 부터 나와 샤를로트를 구경 중이었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말을 건 주인공은 두 명 의 젊은 남성이었다. 제법 훤칠한 얼굴들에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쌍둥이처럼 매달려 있었다.

왼쪽 남자가 우아하게 인사를 했 다.

“실례합니다, 레이디. 케시온 어던 트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절친한 친우인……『

“루시안 요제프입니다, 레이디. 뵙 게 되어 영광입니다.”

케시온의 말을 자연스럽게 받으며 루시안이라는 남자가 악수를 청했 다.

나는 엉겁결에 루시안의 손을 맞잡 았다. 루나와 에일린이 상기된 얼굴 로 저들끼리 속닥이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사교계에서 유명한 남자들 인 것 같았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네, 안녕하세요. 뵙게 되어 반갑습 니다.”

나는 예의상 인사를 받았다.

사실 이 무도회에서 딱히 영식들과

친분을 나눌 생각은 없었다.〈보랏 빛 밤의 끝자락〉은 남성보다는 여 성들의 취향에 적합할 향이었다. 실 제로 구매해 간 손님들의 성비도 여 성이 압도적이었고.

“반가웠어요, 두 분.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샤를로트가 세련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이상의 접근은 차단하겠 다는 의도가 명백했다. 그러나 두 귀족 청년은 물러나지 않았다.

“어떠십니까, 레이디들. 저희에게 오늘 하루 레이디들을 에스코트할 영광을 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케시온이 말했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는 살짝 느끼할 법도 했지만, 준수한 얼굴 덕에 그럭저럭 그럴듯 해 보였다.

하지만 내겐 청년들의 미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창 샤를로트가 남부의 전설적인 꽃 라플레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 려주던 와중이었다. 라플레시아의 향이 그렇게 독특하다던데, 어서 그 얘기를 마저 듣고 싶었다.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저희끼리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요.”

나는 웃으며 정중히 사양했다.

그러나 청년들은 끈질겼다.

“레이디, 그러지 마시죠. 저쪽에 저 희 친우들이 있습니다. 함께 어울리 시면 분명 즐거우실……

“저기요. 케시온 경.”

그때, 톡 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

다.

옆에서 에일린과 루나가 팔짱을 낀 채 쏘아붙이는 게 보였다.

“지나친 권유는 레이디를 불편하게 만들죠. 신사분이시라면 그 정도는 알고 계실 텐데요?”

“저희 아리엘 님께선 지금 친우분 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세요. 신사로 이름높으신 두 분께서 설마 그걸 방 해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하하, 꼬마 아가씨들. 우리는 레이디들을 방해하려는 게 아니 라……/

“아리엘, 님께선, 샤를로트, 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세요.”

에일린이 음절마다 끊어 힘을 주며 말했다.

그 박력 넘치는 기세에 케시온과 루시안이 주춤거렸다. 에일린이 눈 을 더 힘주어 부릅떴다. 그러자 두 청년이 거짓말처럼 뒷걸음질을 쳤 다.

“시, 실례했습니다. 그럼 이만.”

두 청년을 퇴치한 에일린이 나를

올려다보곤 착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에일린의 머 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주변에서 쑥덕이는 소리가 들 렸다.

“역시, 콧대들이 대단하군.”

“사교계의 여왕과 메이 퀸의 조합 이잖아. 이름난 카사노바들이라 해 도 손쉽게 꼬실 수 있을 리가 없 지.”

사교계의 여왕과 메이 퀸……, 나 와 샤를로트를 지칭하는 거겠지. 으

음, 이렇게 대놓고 ‘메이 퀸’이라는 호칭을 들으니 손발이 곱아드는 것 같았다.

애써 태연히 못 들은 척 하는데, 누군가가 또 내 이름을 불렀다.

“아리엘 양! 오랜만에 뵙네요! 봄 의 제전 이후 처음이죠?”

율리아나였다. 나는 반갑게 그녀와 인사를 나눴다.

율리아나가 데려 온 친구들이 나와 샤를로트에게 관심을 보였다.

우리는 서로의 드레스와 장신구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머 지않아, 드디어 내가 고대하던 주제 가 나왔다.

“레이디 아리엘, 실례가 안 된다면 오늘 뿌리신 향수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정말요. 향이 너무 좋아서 황홀할 정도예요.”

영애 하나가 수줍게 운을 떼자, 그 뒤부터는 순조로웠다.

영애들이 참고 있었다는 듯 코를 킁킁대며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오늘의 첫 영업이군. 나는 콩콩 뛰 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수줍게 미소 를 지었다. 이미 내가 향수 영업 뛰 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본 샤를로트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 었다.

화기애애한 웃음꽃이 피었다. 그리 고 그 웃음꽃은 사람들을 하나둘 불 러 모았다.

나와 샤를로트를 둘러싼 레이디 무 리는 곧 부풀어진 파니에처럼 점차 크기를 늘려갔다.

“정말 아리엘 님께서 직접 향수를 만드신다고요?”

“아, 그 가게인가요? 세논 지구에 있는, 그 예쁜 향수 가게! 지나가다 가 본 적 있는 것 같아요.”

“어머나, 세논 지구라면 가끔 쇼핑 하러 들르는 곳인데. 왜 아직 아리 엘 님의 가게에 가 보지 않았을까?”

영업은 순풍을 단 듯 순조로웠다.

〈보랏빛 밤의 끝자락〉은 대호평이 었다. 이미 내 뒤에 메이 퀸이라는 후광이 떠올라 있기 때문일까? 모두 내게 이미 희미하게나마 호감을 갖 고 있었다. 그 작은 호감의 불씨를 키우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제가 딱 꿈꾸던 향이에요. 저희 어머니께서 세일라 항구 출신이시거 든요. 아이리스를 엄청 좋아하세요. 어머니께 한 병 사다 드리면 무척 기뻐하시 겠죠?”

한 영애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아낌 없는 칭찬에 나는 헤헤 웃었 다. 향수를 칭찬받는 일은 언제나 좋았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았 다.

그렇게 내 얼굴에 걸려 있던 수줍 은 미소가 함박웃음으로 변해갈 무

렵 이었다.

“아리엘 윈스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 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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