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화〉
“아리엘 님! 와! 너무 오랜만에 뵈 어요!”
“아리엘 님께서는 그새 더 아름다 워지셨네요!”
“역시 봄의 여왕! 오월의 여왕! 앙 리에타 제노스 님의 마음을 홀랑 가 져가신 분 다우세요!”
소녀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 시에 엄지를 치켜들었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인사를 되돌려 주었다.
“하하, 안녕. 그 손동작은 연습한 거니?”
“네? 아뇨! 연습한 건 따로 있어 요!”
루나가 당차게 외쳤다. 소녀들이 자기들끼리 하나, 둘, 셋을 속삭였 다.
“메이 퀸 축하드려요!”
“축하드려요!”
“축하드려요!”
꾀꼬리 같은 합창이 가게를 울렸 다. 동시에 폭죽이 펑, 터졌다.
우와.”
알록달록한 색종이가 허공을 나풀 거렸다. 나는 멍하니 감탄사를 뱉었 다.
“고맙다, 얘들아. 직접 축하해주러 오다니.”
“당연히 축하드려야죠! 그렇게 엄 청난 업적을 남기셨는데요! 헤헤, 저희 디저트도 잔뜩 포장해 왔어 요!”
“카드게임도 해요!”
에일린이 신나게 재잘댔다.
나는 소녀들이 가져온 엄청난 크기 의 보따리들이 차례차례 풀리는 광 경을 지켜보았다. 방금 먹은 점심 식사가 강제로 소화되는 것만 같았 다.
우리는 디저트를 해치우고 카드게 임을 했다.
가볍게 판돈이 걸렸는데, 나는 내 리 지기만 했다.
‘……음. 나 혹시 당하고 있는 건 가?’
나는 천진난만하게 판돈을 쓸어가 는 에일린을 바라보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순식간에 삼만 비스를 털렸다.
카드게임이 끝나자, 소녀들의 지갑 이 올 때보다 두둑해졌다. 물론 모 두 내게서 따간 돈이었다.
소녀들이 신이 나선 외쳤다.
“와! 향수 많이 살 수 있겠다!”
“저 신상 전부 하나씩 살래요! 용 돈 많이 모아 왔어요!”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너희한텐 안 팔아.”
“어째서요?”
소녀들이 충격 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야, 아직 성인도 안 된 너희들의
코 묻은 돈을 털 수는 없으니까. 나 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두 병 정돈 선물로 줄게. 골라 봐.”
“선물 말고, 사고 싶은데요!”
“그건 안 돼.”
“저희도 돈 있는데요!”
소녀들이 억울해하면서도 제일 갖 고 싶은 향수를 하나씩 골랐다. 리 나가 그걸 예쁘게 포장하는 동안 나 는 소녀들에게 말했다.
“자, 얘들아. 오늘은 그냥 놀려고 온 거니?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니?”
“앗, 그게요.”
정곡을 찔렸는지 루나가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곧 루나가 용기를 낸 듯 홱 고개 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저희와 함께 건국 무도회에 가 주 세요!”
“미안. 그건 안 돼.”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소녀들이 이번에야말로 충격을 받 은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찌나 표정들이 애처로운지 내가 나쁜 사 람이 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미안, 얘들아. 그날은 바빠서 말이 야.”
그럼, 바쁘지. 귀족과 황족은 물론 이고 외국 명사들에게까지 향수를 영업해야 하니까 말이야.
그러자 사샤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다.
“가, 같이 갈 영식이 있으신 건가 요?”
“ 응?”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레이디들은 웬만하면 무도회 자리에 영식과 함께 참석하곤 했다. 특히 이번처럼 크고 격식 있는 무도 회일수록 더더욱 그런 경향이 강했 다.
소녀들이 고개를 떨궜다.
“아, 하긴.”
“아리엘 님께는 당연히 함께 가실 분이 계시겠죠.”
“저희가 그 생각을 못했네요.”
“저희가 어리석었어요.”
다들 한 마디씩을 음울히 뱉었다. 루나가 쐐기를 박았다.
“아리엘 님께는 세드릭 전하가 계 시니까요.”
“으응? 아니야, 그런 거!”
나는 나도 모르게 얼른 손을 내저
었다.
“세드릭 전하와 함께 가는 거 아 냐.”
“네에? 그럼요? 세드릭 님을 두고 어떤 영식과 가시는데요?”
“아무랑도 같이 안 가. 나 혼자 갈 거야.”
“혼자 가신다고요?”
소녀들이 눈을 반짝였다.
아, 잘못 말했다. 나는 얼른 조개 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아리엘 님! 그러면 저희랑 같이 가셔도 되지 않나요?”
“저희 진짜 얌전히 있을게요. 조용 히 아리엘 님 곁에서 시중만 들게 요!”
“아니, 시중 같은 건 필요 없는 데……?
그러자 소녀들이 약속한 것처럼 일 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 눈썹을 늘어뜨리곤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상자에 버려진 새끼 강아지 네 마리 같았
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 아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나를 따르는 거지?’
분명 첫 만남까지만 해도 다분히 비즈니스적인 관계였는데. 아리엘은 이 애들에게 선배로서 사교계 인맥 을 제공하고, 이 애들은 아리엘과 몰려다니며 나쁜 짓을 돕고.
그랬던 관계가 언제부터인지 색깔 이 바뀌었다. 아마 사샤에게 수면향 을 만들어줬던 날부터가 아닌가 싶
은데.
“그래, 그래. 알았어. 함께 가자.”
결국 나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 다.
“와아!”
“즐겁게 해 드릴게요, 아리엘 님!”
뭐, 이 아이들과 다녀서 장점이 아 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일단 쓸데없이 들어오는 추파는 확
실히 차단해줄 거다. 그 점은 확실 히 혹했다.
파트너 없이 무도회에 입장한다는 건 곧 여러 이성들의 표적이 된다는 얘기 였으니까.
‘음, 파트너라.’
그 단어에 문득, 마지막으로 나를 에스코트해주었던 파트너가 떠올랐 다.
세드릭은 이번 무도회에 참석할까?
그럴 것 같았다. 일 년 중 가장 규 모가 큰 무도회니까. 세드릭 쯤 되
는 명사가 빠질 리 없었다.
‘마주치려나.’
그거야 모르지.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얼른 털어냈다.
사람이 굉장히 많이 참석할 테니 한 공간에 있어도 마주치지 못할 가 능성이 높았다. 운이 좋다면 인사 정돈 할 수 있겠지. 뭐.
‘잠깐, 아니지. 세드릭을 만나는 게 운이 좋은 일까지는 아니잖아?’
에이. 전부 쓸데없는 생각이다.
중요한 건 무도회에서 영업할 상품 이었다. 마침 소녀들이 와 있으니 후보 정하는 걸 도와달라고 하자.
괜한 생각을 벅벅 지우고 나는 얼 른 새로운 화제에 몰두했다.
# # #
“아가씨이
리나가 눈시울을 울망거렸다.
“정말 너무, 완벽하게 아름다우세 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치신 모든 게 아리엘 님만을 위해 태어난 것 같아요!”
리나의 지나친 칭찬에 나는 풋 웃 었다.
시향하면서 소감을 너무 자주 부탁 한 탓일까, 리나는 갈수록 미사여구 늘어놓는 솜씨가 일취월장했다.
“내가 전속 디자이너 하나는 잘 만 났지.”
평소 같으면 리나의 폭풍 같은 미 사여구에 손사래를 쳤을 테지만, 이 번에는 그냥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로잘린이 보내준 연회용 드레스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보랏빛 밤하늘처럼 아름답게 펼쳐 지는 원단과, 그 위로 별처럼 박힌 작은 큐빅들. 내 치수에 완벽히 맞 춘 옷은 허리 라인을 빈틈없이 감쌌 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거짓말 처럼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동시에 갖춘 드레스였다.
“이런 걸 덥석 선물로 받다니, 나 도 너무 염치가 없었어. 아무래도
역시 답례를 해야겠다.”
“어머나, 아니에요, 아리엘 님. 로 잘린 님께서 아리엘 님께 이 드레스 를 선물한다고 작업 내내 얼마나 즐 거워하셨는데요.”
치장을 돕기 위해 로잘린이 보내준 사용인이 내 혼잣말에 대답했다.
사용인들의 숙달된 손놀림 덕에 나 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치장을 마칠 수 있었다.
드레스를 완벽히 차려입은 나는 아 이리스 꽃잎 모양 향수병을 들어올 렸다. 입가에 씩 미소가 떠올랐다.
“많이 팔아야지.”
오늘의 첫 번째 목표이자, 거의 유 일한 목표. 나는 다짐을 되새기며 비장하게 허공에 향수를 뿌렸다.
아이리스 향을 담은〈보랏빛 밤의 끝자락〉의 입자가 공기 중에 분사 되었다. 나는 그 안으로 세례를 받 듯 걸어들어갔다.
“정말 향이 좋네요
로잘린의 사용인이 몽롱한 눈으로
말했다. 그렇죠? 하고 리나가 뿌듯 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애들이 올 때가 됐는데.”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시계를 바 라보았다.
그 순간 현관 종이 울렸다.
“아리엘 님!”
“저희 왔어요!”
누구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소녀들이 반원으로 나를 둘러쌌다.
“세상에, 아리엘 님!”
“오늘 최고로 아름다우세요! 오늘 무도회의 주인공은 안 봐도 아리엘 님이세요!”
루나와 에일린, 릴리 그리고 사샤 가 두 손을 꼭 모으고 외쳤다. 아무 래도 이 애들은 올 때마다 동작을 미리 맞추고 오는 게 틀림없었다.
“그럼 당장 마차를 부를게요, 아가
씨.”
리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절도 있는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소리 나 는 쪽을 바라보았다.
“와아…… 저게 뭐죠?”
“저렇게 사랑스러운 마차는 처음 봐요.”
“진짜요. 어느 집안 레이디인지는 몰라도 센스가 엄청나네요!”
“재력도요.”
소녀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엄청난 위용의 마차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대한 순백색 마차를 온갖 알록달 록한 봄꽃이 장식하고 있었다. 조화 가 아닌 생화라는 것을 강조하듯, 마차가 가까워지면서 향긋한 꽃내음 역시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누군진 몰라도 주인이 엄청 꽃을 좋아하는 사람인가보네.’
훌륭한 취미였다. 나는 나도 모르
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단히 호화롭고 생화 향기로 향긋 한 그 마차는, 내 가게 근처에 다다 르자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그러더니 내 가게 앞에 멈춰섰다.
‘ 으응?’
“아리엘 윈스턴 님 되십니까?”
마차에서 잘 차려입은 마부가 내려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얼결에 고개 를 끄덕였다.
“안녕하십니까, 아리엘 님. 저는 길 베르트 백작님께서 보내신 전령입니 다. 백작님께서 보내신 이 선물을 부디 받아주십시오.”
선물?
설마 이거?
나는 멍한 눈으로 마차를 가리켜 보였다. 마부가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베르트 백작님께서 건국제 기념 무도회에 맞춰 아리엘 님께 헌정하 신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