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70화 (70/153)

〈70 화〉

아제키안은 고개를 돌려 자신이 투 자한 매그너스의 가게를 돌아보았 다. 아리엘의 가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매그너스의 가게는 규모는 물론이고, 위용 역시 어마어마했다. 다름아닌 아제키안 자신이 직접 돈 을 바른 가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정도로 차이가 나면 금방 굴복 할 줄 알았는데.’

아리엘은 생각보다 오래 버티고 있 었다.

역시…… 세드릭 에반스. 그자가 아리엘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것일까.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 제키안은 부득 이를 갈았다. 에반스 공작의 번드르르하고 재수없는 낯짝 은 생각만 해도 약이 올랐다.

금세 짜증이 난 아제키안이 쯧 혀 를 차며 앞으로 걸음을 내딛은 순간 이었다.

찌릿. 강렬한 정전기가 아제키안의 몸속에서 번쩍였다.

“으억!”

깜짝 놀란 나머지 아제키안은 그대 로 혀를 씹어 버렸다. 눈물이 날 정 도로 얼얼했다.

그렇게 한참 혀를 붙잡고 끙끙대던 아제키안은 뒤늦게 주위를 홱 둘러 보았다.

방금 누군가 전격마법으로 자신을 공격한 게 틀림없었다.

“어떤 놈이냐!”

그렇게 말하며 아제키안은 뒷걸음 질쳤다. 하지만 그는 다시금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까처럼 저도 모르게 아리엘의 가 게 잔디를 밟게 된 것이었다.

“으아악!”

이번엔 아까보다도 더욱 강한 충격 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아제키안은 바로 검을 빼들었다. 두 번이나 전격마법을 시전한 건 선 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제국의 황자를 공격하다니.

어떤 되바라진 자인지는 몰라도 목 숨으로 값을 치를 것이다!

“모습을 드러내라! 누구지? 첩자인 가! 이 아제키안이 손수 상대해줄 테니 당장 모습을/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아제키안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흐읍!”

아제키안은 있는 대로 비명을 질렀 지만 단단한 손바닥이 빈틈없이 소

리를 가로막았다.

아제키안을 습격한 괴한은 그를 어 디론가 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으으읍!

아제키안은 발버둥치며 제 호위기 사를 급히 찾았지만, 이미 당한 듯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당하고 마는 건가

괴한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힘이 셌고, 아제키안은 속수무책으로 한

참을 끌려가야만 했다.

마침내 괴한이 아제키안을 어느 지 저분한 골목에 내던졌다.

“이 무도한 놈!”

드디어 입이 자유로워진 아제키안 이 소리쳤다.

“어디서 보낸 자객이지! 나를 암살 하라고 사주하더냐? 어림도 없지. 일국의 황자인 내가 네놈 같은 자객 따위에게 당할 것 같으냐!”

괴한은 대답 대신 저벅저벅 아제키 안에게로 다가왔다.

아무런 말도 없이 가까워지는 그림 자. 모골이 송연해진 아제키안이 다 급히 손을 들었다.

“자, 잠깐! 무엇을 원하느냐? 돈이 필요한 건가? 얼마를 받았든 정확히 그 두 배를 얹어서 주겠노라!”

파격적인 제안이었으나 괴한은 멈 추지 않았다.

괴한이 주저앉은 아제키안 앞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아제키안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림 자를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이야, 외조카.”

아제키안이 우뚝 굳었다.

이 목소리는……?

아제키안의 고개가 천천히 위를 향 했다.

“세, 세드릭 에반스?”

“숙부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되지.”

괴한, 아니. 세드릭이 구두굽으로 아제키안의 망토를 지그시 밟았다.

아제키안이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 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외숙!”

“나는 내 외조카께서 요새 무슨 짓 을 하고 다니고 계신 건지부터 알고 싶은데.”

여유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로등 빛을 등진 탓에 여전히 세 드릭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제

키안은 그림자로 가려진 얼굴을 올 려다보며 침을 삼켰다. 입안이 자꾸 만 바짝바짝 말랐다.

“내, 내가 뭘 했다는 거요? 그리고 뭘 했든 외숙에게 이런 취급을 당할 이유는……/

“남의 사유지에는 침입하지 않는 다. 손수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상식 이 아닌가?”

“침입이라니! 내가 언제……,”

“늦은 밤에는 연락 없이 방문하지 않는다. 이것 역시 상식이고.”

“무슨 소리오! 방금 아리엘 양에게

찾아가려던 걸 말하는 거라면……,”

“마지막으로, 레이디 윈스턴 반경 50미터 안에는 함부로 접근하지 않 는다. 전부 상식일 텐데, 이 숙부가 대체 조카님께 어디까지 가르쳐줘야 하는 거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아제키안은 황당함에 입을 쩍 벌렸 다.

설마 자신을 다짜고짜 납치해 지저 분한 골목길에 내동댕이친 이유가, 고작 늦은 밤에 아리엘 윈스턴을 찾 아가려고 했기 때문이란 말인가?

분노한 아제키안이 벌떡 일어났다.

정확히는,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세드릭이 밝고 있는 망토 때문에 그 는 휘청이며 도로 넘어질 수밖에 없 었다.

“악!”

쓰러진 아제키안이 이를 갈았다.

더 이상의 치욕은 참을 수 없었다. 그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감히 내게 이런 짓을 하다니!”

아제키안이 검끝으로 세드릭을 겨 눴다. 섬뜩한 칼날이 달빛 아래 번 득였다.

제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선 수를 빼앗긴 이상 불리할 수밖에 없 을 것이다.

아제키안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내가 조카라고는 하나 엄 연히 황실엔 위아래가 있거늘! 나는 이 나라의 황자요! 외숙은 오늘 밤 의 죗값을 톡톡히 치를 거요. 어머 니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스릉.

검 뽑는 소리에 순간 모골이 송연 해졌다.

아제키안이 미처 대처하기도 전이 었다. 눈 깜작할 새 검을 뽑은 세드 릭이 아제키안의 손목을 가격했다.

손목에서 피가 솟구치는 환상이 붉 게 시야를 메웠다.

“으으니”

아제키안이 제 손목을 쥔 채로 고 꾸라졌다. 그와 동시에 세드릭을 겨

냥하던 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 졌다.

아제키안은 허겁지겁 제 손목을 더 듬었다.

손은 그대로 손목에 붙어 있었다. 날이 아닌 칼등으로 친 것이다.

“……허억.”

아제키안이 헛숨을 들이켰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이, 이 개자식이!”

아제키안이 이를 갈며 주먹을 세드 릭에게 휘두른 순간이었다.

세드릭의 검이 번개처럼 움직여 망 토를 꿰뚫었다.

아제키안이 힉 숨을 들이삼켰다. 기다란 검이 망토를 뚫고 바닥에 박 혔다. 아제키안은 마치 볏짚처럼 간 단히 꿰뚫린 돌바닥을 믿을 수 없다 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사사건건 소리를 질러대니 골이 아프군. 닥치고 잘 들어. 위협하는 건 내 역할이고, 네놈 역할은 얌전

히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아제키안은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세드릭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이 와중에도 그의 몸짓은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그 모습에 더 속이 뒤 집혔다.

그는 언제나 세드릭 에반스가 싫었 다.

늘 여유로운 것도, 자신이 가졌어 야 할 것들을 손쉽게 채가는 것도, 고작 한 살 위인 주제에 사사건건 웃어른인 체하는 저 태도도.

죽이고 싶을만큼 증오스러웠다.

가까워진 세드릭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매그너스의 후원자 놀이를 하고 싶은 거라면 마음대로 해. 다만, 다 시는 레이디에게 접근하지 마라. 네 가 다시 레이디에게 접근하는 순간, 내가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나지막한 목소리에 아제키안은 숨 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제키안은 입도 열지 못한 채 눈 만 움직여 세드릭을 노려보았다. 세

드릭의 입술이 살짝 호를 그렸다.

“대답해야지.”

그그극.

돌바닥에 박힌 검이 소름끼치는 소 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제키안은 가슴 속에서 분노가 불 기둥처럼 솟아오르는 것 같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호위기사도 없고, 비겁한 수에 기습 당했으니까. 지금은 분하지만 일 보 물러날 때였다.

아제키안이 주먹을 꾹 쥔 채로, 천 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 다.

“좋아.”

세드릭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가 검을 뽑아 다시 검집에 집어 넣었다. 아제키안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조카님께선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 마차는 불러주 지;’

세드릭은 그 말을 끝으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제키안은 부득 이를 갈았다. 악문 잇새에서 비릿한 혈향이 느껴졌다.

‘세드릭 에반스.’

아제키안은 저주처럼 그 이름을 씹 어 뱉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세 드릭이 싫었다.

세드릭 에반스의 여유로운 낯짝을

흙바닥에 처박을 수 있다면 무슨 짓 이든 했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었다-말 그대로, 무슨 짓이든.

쓰 후보

나는 슬쩍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 다.

거리는 평온했다. 지나가는 사람조 차 없었다.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에른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 다.

“아니에요, 에른 경. 제가 잘못 들 었나봐요.”

“아녜요, 아가씨. 저도 들었는걸 요? 방금 무슨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잖아요!”

“어, 그치. 리나도 들었지?”

나와 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한 번 창밖을 내다보았으나 역 시 거리는 고요하기만 했다.

이상한데. 잘못 들었나?

나는 에른에게 물었다.

“에른 경, 아무것도 못 들으셨어 요?”

“제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 습니다.”

에른이 담담히 대답했다.

우리 중 가장 신체능력이 뛰어난 에른이 못 들었다면 그런 거겠지-나와 리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 를 으쓱였다.

“우리가 잘못 들었나 봐.”

“그런가 봐요, 아가씨.”

나는 도로 창문을 닫았다.

가게 안은 아까 전과 다름없이 평 화롭고 고요했다.

“로잘린 양. 저희 하던 이야기 계 속 할까요?”

“네! 좋아요. 그래서요, 아리엘 님. 델레이나 황녀님이 뭐라고 하셨냐 면……

로잘린이 다시 조잘조잘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번 주제는 델레이나 황녀였다. 봄의 제전에서 패배한 게 마음이 쓰 렸는지 두문불출 중이라는 소식이었 다.

“에이. 심지가 굳건하신 분으로 보 였는데, 설마 그것 때문이겠어요?”

“그것 때문일걸요. 상대가 하필이 면 아리엘 님이었으니까요.”

“네? 제가 왜요?”

“어머나, 아리엘 님. 혹시 모르세 요?”

로잘린이 속닥거렸다.

“황녀님이 어릴 적에, 세드릭 전하 를 그렇게 졸졸 쫓아다니셨대요. 외 숙부, 외숙부 하면서요.”

“……엥? 정말요?”

그 근엄한 얼굴의 황녀가?

“네, 황실에선 유명한 얘기예요. 크 면 세드릭 전하랑 결혼할 거란 말도 밥 먹듯이 하셨대요.”

“풋!”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 뜨렸다.

델레이나 황녀에게 그런 과거가 있 었구나. 음, 어렸을 때 외삼촌을 그 렇게 좋아했다면 크고 나서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물론 결혼하겠다는 얘기야 크면서 흑역사로 묻어 두셨 겠지만.

“델레이나 황녀님은 아카데미에서 이 년이나 계셨잖아요. 그러니 아리 엘 님과 세드릭 전하의 관계가 최근 어떻게 발전했는지 전혀 모르고 계 실거예요.”

우리 관계가 어떻게 발전했는데?

물을 새도 없이 로잘린이 계속해서 말했다.

“황녀님은 아직도, 그…… 예전 소 문 있잖아요. 세드릭 각하께서 아리 엘 님을 꺼려하신다는…… 그 소문 을 아직도 믿고 계실 거예요.”

그래서 델레이나 황녀가 날 경계하 듯 쳐다본 거구나. 자기 외숙부가 싫어하는 사람인 줄 알고.

하긴 이 년 전이면 아리엘 윈스턴 이 계약 결혼을 핑계 삼아 세드릭을

한참 귀찮게 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날 싫어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기화〉

# # #

“전하. 크뤼거 후작께서 전언을 보 내셨습니다.”

“들어와.”

집무실로 들어온 리키온이 공손히 서신을 건넸다.

세드릭은 천천히 서신을 넘겼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세드릭의 표 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리키온이 눈치를 보다가 슬쩍 물었 다.

“심각한 사안입니까, 전하?”

“칸이 지하 수로에 둥지를 틀었다 는군.”

리키온이 숨을 집어삼켰다.

지하 수로라면, 제도에서부터 뻗어 나가는 거대한 강을 따라 죽 내려가 면 나오는 범죄 도시를 뜻했다.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워

프가 설치되어 있는 탓에 제도를 오 가기 어렵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는 건……/

“제도에서 활동을 재개하겠다는 거 겠지.”

세드릭의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마 치 신문 기사를 읊는 것처럼.

‘하지만……/

리키온은 꾹 주먹을 쥐었다.

자신의 주인은 정말 칸이라는 이 름을 듣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리키온은 이십년 전 그날의 세드릭 을 기억했다. 세 달만에 구출되어 공작저로 돌아온 세드릭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불러도 대답하 지 않았고, 아파도 울지 않았다. 전 대 공작 부부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 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리키온의 나이는 다섯 살. 어 린 시절의 기억이었지만 그는 지금 도 그 소름끼치도록 고요한 무표정 만큼은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꼭 지금처럼.

“ 전하.”

리키온이 조심스레 세드릭을 불렀 다. 세드릭이 흘긋 시선을 던졌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리키온이 말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싱겁다는 듯 세드릭이 도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홀러나왔다.

“곧 건국기념일이지?”

“예, 그렇습니다. 전하.”

리키온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벨레르 제국의 건국기념일은 온 대 륙에 명성이 자자했다.

황궁에서는 삼일 밤낮으로 무도회 가 열렸고, 거리에서도 대대적인 축 제가 열렸다. 대륙 곳곳에서 이 축 제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올 정도였 다.

“어쩌면 칸이 그날을 노려 움직일

지도 모르겠군.”

세드릭이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리 키온이 숨을 들이켰다.

세드릭의 말이 맞았다. 건국제는 자국민들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찾 아온 관광객들로 무척이나 번잡스럽 다. 평소에 비해 치안 수준이 떨어 질 수밖에 없었다.

“호위를 강화할까요, 전하?”

리키온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드릭이 생각에 잠긴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지. 아무리 에른이라도 혼자서는 완벽히 대처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예?”

리키온이 눈을 끔뻑였다.

자신이 호위를 강화하자고 말한 대 상은 세드릭 에반스였다. 그러나 세 드릭은 다른 이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생각을 마친 듯 세드릭이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빛이 리키온을 똑바

로 바라보았다.

“곳곳에 레이디의 호위들을 배치 해. 단, 눈에 띄지 않도록. 그림자처 럼 녹아들 수 있는 이들로 뽑아. 무 슨 말인지 알겠지?”

“아, 넵……!”

리키온이 얼른 한 손을 가슴에 대 고 경례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혼란스러웠 다. 에른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대화의 주인공은 아리엘 윈스턴이다.

하지만 전하께서 왜 갑자기 아리엘 님을 호위하라고 명하시는 거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리키온은 빠 르게 대처했다.

“기사도 몇 명 더 배치할까요? 에 른 경의 실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가까이서 대응할 수 있는 병력이 더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 더 있어야지.”

세드릭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키온이 일급 기사들의 이름을 줄 줄 읊었다.

“그란셀 경으로 할까요? 조안나 경 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가 오후 까지 목록을 꾸려서……『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네?”

“내가 갈 테니까.”

리키온이 눈을 끔뻑였다.

“……네? 전하께서…… 호위를? 예?”

“리키온. 피곤한가?”

더듬대자 세드릭이 가볍게 타박했 다. 리키온이 펄쩍 자리에서 뛰어올 랐다.

“전하! 건국기념일이 어떤 행사인 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날 전하께서 소화하셔야 하는 일정이 수십 개인 데요! 어떻게!”

그걸 다 취소하시고 윈스턴 영애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겠다는 말씀을 어찌 그리 쉽게 하십니까!

미처 내뱉지 못한 문장이 목에 턱

턱 걸렸다. 리키온은 거의 울먹이며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세드릭이 어 깨를 으쓱였다.

“모든 일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 지.”

리키온은 가슴을 탁탁 치고 싶었 다. 건국기념일 내내 세드릭이 만나 야 할 왕족, 귀족들이 몇 명이고, 그가 주관해야 할 행사가 몇 개인 데! 책무보다 윈스턴 영애를 호위하 는 일이 더 중하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왜 대화의 주제가 갑 자기 아리엘로 튄 거지?

문득 리키온의 시선이 서신으로 향 했다.

세드릭의 손이 서신을 대부분 덮고 있어 내용을 알기 힘들었다. 하지만 리키온은 손 밖에 삐져나온 몇몇 글 자들을 통해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아리엘 윈스턴?’

크뤼거 후작이 보낸 보고서에, 왜 윈스턴 영애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거 지?

리키온은 눈동자를 굴려 보고서 내

용을 조금 더 읽어 보았다. 첫 문장 은 그럭저럭 읽을 수 있었다.

‘아리엘 윈스턴이 칸의 실험체였을 확률에 대해서.’

실험체라니.

제가 잘못 읽은 걸까?

리키온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고개를 조금 더 빼 보려 했지만, 그 순간 세드릭이 서신을 아예 덮어 버 렸다. 리키온은 깜짝 놀라 차렷 자 세를 했다.

‘훔쳐본 걸 눈치채셨나?’

“리키온. 더 할 말 있나?”

“아, 아닙니다, 전하!”

괜히 찔렸는지 리키온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럼 이만 나가 봐.”

단호히 뱉은 세드릭이 등을 돌렸 다. 리키온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차마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예.”

리키온은 얌전히 주인의 말을 받들 어 집무실을 나섰다.

# # #

내 ‘2호점 계획’은 총 네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단, 첫 번째. 봄의 제전에서 우 승하여 유행을 선도할 것.

이건 이미 완벽한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두 번째. 건국제 기념 무 도회에 참여할 것.

두 번째 단계 역시 첫 번째 못지 않게 중요했다.

건국제 무도회는 일 년 중 가장 화려한 행사였다. 당연히 참석하는 귀족들이 수두룩했다. 아마 제도에 거주하는 내로라하는 귀족들은 모조 리 참석할 거다.

‘제국 귀족뿐만이 아니지.’

건국제 무도회에는 외국의 명사들 도 여럿 초청된다. 그야말로 일 년

중 가장 커다란 판이 열리는 거였 다.

‘이런 무대는 절대 놓칠 수 없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꿈 속 에서 무도회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 들이 내 향수에 감탄하는 꿈을. 한 외국 갑부는 내 향수를 대량 수입하 고 싶다며 열정을 불살랐다.

자는 내내 내 입가에는 미소가 떠 나지 않았다. 그 덕분에 한동안 근 육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쑤 쏘 보

“아리엘 아가씨! 편지가 도착했어 요!”

리나가 팔랑팔랑 편지를 흔들며 내 게 날아왔다. 아무래도 발신인이 특 별한 듯했다.

“누가 보낸 건데?”

“길베르트 백작님이오!”

엇. 내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봄의 제전 이후 제이 나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봄의 제전에서 메이 퀸이 될 수 있었던 건 반쯤은 제이나 덕분인데.

머지않아 감사 인사를 하러 가야겠 다는 다짐을 되새기며 나는 서신을 열었다.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수입해온 아이리스는 완판했다, 영 애의 혜안이 놀랍다,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고 싶은데 괜찮겠느냐. 뭐 그 런 내용들.

가볍게 웃으며 편지를 읽어내려가

던 나는 마지막에서 시선을 멈췄다.

‘추신이 두 개나 있네?’

첫 번째 추신은, 곧 열릴 공개 경 매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향유고래 사체가 출품될 거라고?’

향유고래라면……소

내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나는 일단 심장을 진정시키고 다음

추신을 읽었다. 두 번째 추신도 놀 라웠다. 감사의 의미로 선물을 보내 겠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바로 이전에 제이나가 내게 주었던 선물을 떠올렸다.

‘서방왕국에서만 귀하게 난다는 허 브, 트레아였지.’

그 황홀했던 향기가 아직도 코끝에 맴돌았다.

설마 트레아를 하나 더 구해주신 걸까? 나는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편지를 이리저리 뒤집었다.

그러나 선물에 대한 힌트는 그 이상 없었다.

‘건국 무도회날 아침에 가게 앞으 로 도착할 거라고?’

그 말이 전부였다.

역시 제이나는 타고난 거상이었다. 이렇게 사람을 두근두근 설레게 하 는 법을 알다니.

“제이나 님도 참. 감사드려야 할 건 오히려 내 쪽인데.”

“제이나 님께서 선물을 주신다고

요? 오?가, 어떤 선물일지 너무 궁금 해요! ……아, 그런데 저번처럼 귀 한 허브를 연구하신다고 또 몇날며 칠 조향실에 틀어박혀 계시는 건 아 니시겠죠?”

리나가 불안한 눈으로 말하자, 나 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좋겠다.”

“아리엘 아가씨!”

“왜? 새로운 향수를 만든지도 오래 됐잖아. 그만큼 연구하고 싶은 향이 드물다는 얘기지.”

그러고 보면 요즘은 온전히 조향실 에 틀어박혀 향의 세계에만 몰두한 기억이 없었다. 봄의 제전을 준비하 면서부터 눈코뜰새없이 바빠진 탓이 었다. 트레아처럼 이목을 끄는 향도 없었고.

‘나는 조향사지, 상인이 아닌데.’

나는 짧게 반성했다. 내가 만든 향 수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것 역시 기쁜 일이었지만, 내 본분은 향수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내 직업

은 어디까지나 조향사였으니까.

문득 위층에 있을 내 조향실이 그 리워졌다.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오늘은 휴일인데.’

휴일인 걸 모르고 찾아온 손님들인 가.

창을 내다본 나는 그대로 몸을 굳 혔다.

“아리엘 님!”

“아리엘 님, 저희 왔어요!”

활기 넘치는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 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 다.

“아리엘 님, 안에 계시죠?”

“오늘 휴일이시라면서요!”

경쾌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 다.

“어떡하죠, 아리엘 님? 열어드릴까 요?”

나는 벌써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온할 줄 알았던 오후가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환상 이 보였다.

리나가 문을 열자마자 소녀들이 쏟 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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