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화〉
붉은 시선이 아까처럼 나를 훑었 다. 점성을 가진 것처럼 진득한 시 선. 내가 어떤 꿍꿍이를 갖고 있든 샅샅이 파헤치겠다는 듯한 눈빛이었 다.
세드릭은 가끔 나를 이런 눈으로 쳐다보고는 했다. 내가 자신에게 뭔 가를 숨기고 있다는 듯이.
물론 그에게 말 못 할 비밀이 몇 가지 있긴 했다. 하지만 세드릭에게
해가 되지는 않았기에 나는 떳떳하 게 그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그의 끈질긴 시선을 계속 마주하기는 힘들었다.
침묵이 계속되자 괜히 피부가 간질 거렸다. 똑딱똑딱 울리는 시계 소리 도 괜스레 의식되었다.
나는 흠, 헛기침을 하곤 입을 열었 다.
“드릴 말씀이 또 있어요.”
세드릭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 덕였다.
“에른 경을 다시 데려가는 건 어떠 세요?”
분명 세드릭은 에른이 실력 있는 기사라고 했다.
직접 그의 검술 실력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세드릭이 나를 호위 하라 명하기 전까지 에른은 세드릭 의 하나뿐인 호위 기사였다. 그것만 봐도 에른의 실력은 보장된 거나 마
찬가지 였다.
‘칸이 돌아온 이유는 정확히 몰라. 하지만……/
그놈들이 또 세드릭에게 해를 가하 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럴 확률이 높았다. 길드의 명운을 걸고 진행했던 실험. 그 실험체가 건강히 살아 있는데, 과연 그들이 다시 눈독을 들이지 않 을 수 있을까?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세드릭은 더 이상 일곱 살
의 어린 소년이 아니었으니까. 그들 이 탐내기엔 너무도 거대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입맛을 다실지 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에른이 다시 세드릭을 호위하기를 바랐다. 세드릭이 검술 로 경지에 올랐다는 건 알지만, 실 력 있는 호위 무사의 존재는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러나 세드릭은 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 네?”
“에른은 계속 레이디를 호위할 겁 니다.”
“왜요? 저번 사건 이후로 제게 접 근하는 파파라치도 없는데요? 전 이 제 위험하지 않아요.”
“그건 에른이 항상 레이디 곁에 붙 어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요즘 안전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매그너스가 치사한 수법을 쓰긴 하지만, 내 안전까지 위협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보기엔 에른은 나보다 세드릭 에게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신인 조향사와 제국 곳곳에 이해관 계가 얽혀 있는 공작. 누구의 신변 이 더 위험할지는 뻔했다.
“혹시 에른이 레이디를 불편하게 했습니까?”
“예? 아, 아뇨. 그래서 드린 말씀 이 아니에요. 불편하기는커녕, 에른 경은 많은 도움을 주고 계세요. 가 끔 향수 만드는 일도 도와주시고 요.”
“그렇습니까?”
“네에. 대화도 전보다 많이 나누고 있고요. 아무래도 오랜 시간 함께하 다보니 저와 리나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신 것 같아요. 항상 쓰고 있 던 투구를 벗을 정도니까, 마음의 벽이 허물어졌다고 볼 수도 있지 않 을까요?”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른이 불편하지 않으시다니 다행 이군요.”
“전혀 안 불편해요. 아, 투구 속에 서 생각지도 못한 미남이 튀어나와
서 놀라긴 했지만요.”
“……그러셨습니까?”
세드릭의 낯빛이 약간 어둡게 변했 다. 나는 에른의 맨얼굴을 회상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에른 경, 의외로 금 발이시더라고요. 그것도 그렇게 예 쁜 금발일 줄은 몰랐어요.”
“……금발이 취향이십니까?”
“네?”
의외의 질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가? 나는 가볍게 내 취향을 되짚어 보았다. 따지고 보면 금발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금발이 예쁘긴 하죠. 특히 에른 경처럼 밝은 금발은 보석 같아서 참 예쁜 것 같아요.”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는 까만 머리가 더 좋았다. 짙으면 짙을수록 좋았다. 그래, 세드릭의 것처럼.
나는 나도 모르게 세드릭을 바라보 았다가 순간 깜짝 놀랐다.
세드릭의 표정이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세드릭은 자기가 혼란스럽다는 사 실이 되려 더 혼란스러운 것 같았 다. 그에게선 보기 힘든, 정돈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전하? 왜 그러세요?”
“ 아.”
세드릭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나를 마주보았다.
그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착잡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호위 기사 와…… 잘 지내고 계시다니 다행이 군요. 에른 만한 실력자를 구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구하기 힘든 실력자라면, 역시 나보다는 세드릭을 지키는 게 좋지 않을까.
어느덧 시계가 열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늦었네요. 실
례했어요.”
“아닙니다. 이른 시간이었더라면 더 오래 대화했을 텐데요.”
아쉽다는 듯 세드릭이 말했다.
매너가 넘치는 에반스 전하께선 친 히 저택 앞까지 나를 배웅해 주셨 다. 나는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 다.
“배웅해주셔서 감사해요. 다음에 또 뵈어요.”
“예, 곧 찾아뵙겠습니다.”
곧 찾아온다고?
으레 하는 인사치레인가. 나는 어 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곧 나를 태운 마차가 매끄럽게 공 작저를 빠져나갔다.
# # 보
다음 날 저녁, 가게 문을 닫은 뒤.
“아리엘 님!”
“로잘린 양.”
나의 전속 디자이너, 로잘린 레놀 라가 가게에 찾아왔다.
나는 활짝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 다.
“세상에, 오늘도 손님이 어마어마 하게 오셨나 봐요! 매대에 남은 물 건이 없네요!”
“감사하게도 최근 찾아주시는 분들 이 많이 늘었어요.”
“당연한 일이죠! 요즘 제도를 휩쓴 아이리스 열풍, 아리엘 님께서도 알 고 계시죠?”
나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매년 봄의 제전이 열리고 나면 유 행이 한바탕 뒤바뀌고는 했다. 하지 만 올해는 그 여파가 여느 때보다 대단했다. 샤를로트가 감탄할 정도 로.
“귀부인들은 다 화단을 아이리스로 장식하고 있고요, 드레스는 뭐 말할 필요도 없이 청자색 일색이죠. 보석 쪽도 난리래요. 자수정처럼 보라색 계열인 보석들이 싹 품귀 현상이라 던데요?”
“ 정말요?”
나는 또 수줍은 웃음을 입가에 걸 쳤다. 로잘린이 반짝이는 눈으로 물 었다.
“어떠세요? 유행을 선도하시는 기 분이!”
“에이, 로잘린 양. 너무 띄우시면 부끄러워요.”
겉으론 겸양을 떨었지만, 사실 나 는 속으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기분이 어떠냐고?
날아갈 것 같았다.
사실 유행을 선도하느니 어쩌니 하 는 말들은 잘 와닿지 않았다. 봄의 제전 이후 갑자기 바빠져서 한가로 이 거리를 구경할 시간조차 나지 않 았으니까.
중요한 건 내 아이리스 향수,〈보 랏빛 밤의 끝자락〉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단 점이었다. 금고에 쌓인 돈을 생각하자 미소가 절로 우 러나왔다.
“아, 참. 이럴 게 아니지. 바쁘신 아리엘 님을 너무 오래 붙잡으면 안 되겠죠. 주문하신 드레스가 완성됐
답니다, 아리엘 님.”
로잘린의 말이 끝나자 마자 그녀가 데려온 사용인이 거대한 가방을 끌 고 왔다.
사용인이 가방을 열었다. 순간 강 렬한 색채가 눈앞을 환히 밝혔다.
“와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로잘린이 첫 번째 드레스를 꺼냈 다.
“활동성을 중시한 실용적인 드레스 예요. 품도 넉넉하고 치맛단도 길어 서 움직이기 편하시겠지만, 허리 라 인을 살짝 잡아 맵시도 놓치지 않았 답니다. 일하실 때도 그렇고, 가벼운 나들이를 다녀오실 때도 입기 좋으 실 거예요.”
로잘린이 어느새 전문가의 향기를 내뿜으며 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나 는 그녀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 다.
로잘린이 가져온 드레스는 총 세 벌이었다. 나들이용 드레스와, 잠옷. 그리고 화려한 연회용 드레스.
그중 마지막 드레스를 바라보며 나 는 입을 딱 벌렸다.
“맙소사. 이건……,”
밤하늘을 잘라온 듯 아름다운 드레 스였다.
태양이 거의 저물어, 보랏빛과 남 빛 사이로 물든 순간의 하늘을 포착 한 듯한 빛깔. 그 오묘한 아름다움 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건…… 와아. 너무 아름다워요.”
아름다운 건 좋은데…… 이 정도 퀄리티면 가격이 장난이 아니겠는 걸?
나는 몰래 식은땀을 훔쳤다. 물론 요즈음 향수 장사가 잘 되고 있는 건 맞지만, 벌어들인 돈은 모두 2호 점 오픈에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내 고민을 읽은 듯 로잘린이 환히 웃었다.
“이건 저와 전속 계약을 맺어주신 아리엘 님을 위한 저의 선물이랍니 다. 부담 갖지 말아주세요.”
“네? 선물요?”
“받아주시면 무척 감사할 것 같아 요!”
받아야지. 당연히 받아야지!
이렇게 아름다운 드레스가 공짜라 니. 정말 받아도 되는 걸까?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싸웠 다. 나는 ‘욕망에 충실한 나’와 ‘염 치 있는 나’ 사이에서 갈팡질팡했 다.
그때 로잘린이 말했다.
“부디 부담갖지 말아주세요. 절 믿 어주신 아리엘 님께 보답하고 싶어
만든 거랍니다.”
로잘린이 재차 부탁하자, ‘염치 있 는 나’ 쪽이 항복했다.
나는 덥석 드레스를 받아들었다.
“너무 감사해요!”
“저야말로 감사하죠, 아리엘 님!”
우리는 십 년만에 재회한 친구처럼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로잘린 양과 전속 계약을 맺길 정 말 잘했어. 손수 발굴한 신인, 열 명장 부럽지 않다더니!
나와 로잘린이 한창 서로를 향한 우정을 다지고 있을 때였다.
“으억!”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꼭 벼락에 맞은 파리처럼 괴상한 신음소리 였다.
‘설마.’
나는 헉, 하고 숨을 들이삼켰다.
아까 낮에 방문한 마법사가 접근
차단 마법을 설치하고 간 일이 떠올 랐기 때문이었다.
벨레르 제국의 5황자, 아제키안 폰 벨레르는 제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음. 오늘도 완벽하군.’
사실 점검하고 말 것도 없었다. 보 지 않아도 눈부시도록 완벽할 것이 뻔했으니까.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 다.
황실 마부가 마차 문을 열었다. 아 제키안은 천천히 마차에서 내려왔 다.
아제키안은 근심가득한 얼굴로 자 신의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세논 지 구는 고급 상점가이니만큼 깨끗하게 관리되는 편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고귀한 자신의 발을 내딛기에는 부 족한 점이 많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불편한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고 번잡하고 평범한 세논 거리에 발을 내디딜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아리 엘 윈스턴.
아제키안은 저 앞에 보이는 소담스
러운 가게를 바라보았다. 늦은 시간 이었지만 아리엘의 가게는 언제나처 럼 불이 켜져 있었다. 그 성실함마 저 아제키안은 마음에 들었다.
‘부모의 재산에 기대지 않고 스스 로 재산을 일구려 하다니. 그야말로 현모양처의 재목이지.’
그러나 미래는 미래일 뿐, 지금 그 에게 아리엘은 굴복시켜야 할 대상 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