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화〉
“그자가 아직도 레이디를 귀찮게 합니까?”
“네. 밤마다 귀찮아서 아주 죽을 지경……/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순간 입을 꾹 닫았다.
나도 모르게 고자질할 뻔했다. 이 건 세드릭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닌 데.
이게 다 아제키안이 나를 너무 귀 찮게 군 탓이다. 나는 속으로 그 느 끼한 면상을 가격하며 다시 말했다.
“아니, 이게 아니라. 전하, 제 질문 에 대답해 주세요. 그 소식, 들으셨 죠?”
“지금 밤마다, 라고 하셨습니까?”
세드릭이 내 물음엔 대답도 하지 않고 재차 물었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닌데. 나는 급한 마음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영업시간이 끝난 뒤에 찾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영업에 방 해는 안 되니까. 그나저나……?
“영업 시간이 끝난 뒤에?”
세드릭이 중얼거렸다. 이번엔 내게 하는 말이 아닌 듯했다.
“정신이 단단히 나갔군.”
그런 혼잣말이 들린 것 같았다. 너 무 작아서 확실히 들리지는 않았지 만.
고개를 든 세드릭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 마법사를 한 명 보내겠습니 다, 레이디. 접근 차단 마법을 설치 해 줄 거예요.”
“네? 접근 차단 마법이요?”
“예. 또 레이디의 가게 근처에 집 적거리면 아제키안은 벼락 맞은 파 리 신세가 될 겁니다.”
벼락 맞은 파리?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안 돼요! 그랬다가 제가 황족 시
해죄 같은 걸로 잡혀가면 어떡해요?
감옥에 가고 싶진 않은데요!”
그냥 귀찮은 것 좀 감수하고 말지, 황자를 퇴치당한 파리 신세로 만들 순 없었다.
그러나 세드릭은 별 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쪽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레이디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 놓으시죠. 그나저나, 갑자기 그 길드 는 왜 여쭈신 겁니까?”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괜찮으신 건가요, 전하?”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세드릭이 살짝 웃었다.
“제가 괜찮지 않을 일은 뭐가 있습 니까?”
이상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세드릭을 가만히 살폈다.
세드릭은 지나치게 침착했다. 마치 ‘내일은 비가 온대요’ 정도의 말을 들은 사람 같았다. 그는 정말로 아 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칸이 이십 년 전 저지른 잔악무도한 악행들을, 늘어놓자면 끝이 없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대범하고 잔인했
던 일을 꼽자면
‘에반스 소공작 납치 사건.’
원작에서 그 사건을 꽤 자세히 서 술했으므로 나는 역사책을 읽은 것 처럼 내막을 자세히 떠올릴 수 있었 다.
그건 세드릭이 일곱 살 무렵일 때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이야 세드릭 에반스의 검술 실 력이 뛰어나고, 그의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가문의 세가 제국을 아우 르고 있다곤 하지만, 어릴 때는 그
저 또래의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 었다.
칸은 철저한 준비 끝에 호위를 따 돌리고 일곱 살 세드릭을 납치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 뒤 그들이 세드릭에게 무슨 짓 을 했는지는원작에서도 아주 자세히 서술하지는 않았다.
‘어떤 실험을 했다는 것만 밝혀졌 을 뿐.’
간단히 말하자면 그건 마물과 인간 을 합성하는 실험이었다.
당시 뒷세계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칸은 그 실험에 길드의 명운을 걸고 매진했다. 마물과 인간을 합성해서 사상 최강의 병기를 만들겠다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준비물은 재능이 뛰어나고, 신체가 튼튼한 어린아이.
일곱 살 세드릭은 이 모든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게다가 에반스 공작가의 먼 조상이 마족이었다는 소문도 있었으니, 세드릭은 그야말 로 완벽한 실험체였다. 그래서 칸은 겁도 없이 에반스 공작가의 유일한 적자를 납치할 계획을 세웠고, 심지 어 성공했다.
‘그 뒤는
어린 세드릭이 겪었던 일에 대해선 원작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았 다.
하지만 분명, 끔찍하게 고통스러웠 을 것이다. 그것만은 짐작할 수 있 었다.
‘에반스 공작가와 황가가 합세해 세드릭을 구줄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실험은 이미 진행되었고, 세드릭의 몸에는 평생 안고 가야 할 후유증이 남았으니까. 주기적으로 마계의 물 질과 접촉하지 않으면 그의 몸은 끔 찍한 금단증상을 호소했다.
하지만 마계는 이미 봉인된 지 오 래였고, 인간 세상에서 구할 수 있 는 마계의 잔재는 마계 식물인 아닉 시아 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점점 멸종하고 있어 전대 에반스 공작 부 부는 세드릭 걱정에 잠도 제대로 자 지 못했다고 한다.
분노한 전대 에반스 공작과 황제가 칸의 길드원들을 붙잡아 숙청했지만
그런다고 세드릭의 고통스런 과거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짧게 원작을 회상하자, 마음이 마 치 돌을 매단 듯 묵직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세드릭을 바라보 았다.
활자로 이야기를 읽을 때와, 눈앞 에서 당사자를 마주하는 건 차원이 달랐다.
‘세드릭에게 남은 후유증은 비단 몸의 금단증상만은 아니겠지.’
일곱 살 때 납치되어 겪은 고통과
두려움은, 어쩌면 아직 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을지 몰랐다.
아니, 그럴 게 분명했다. 원작에서 칸이 돌아왔을 때 세드릭은 분노에 제정신을 잃고 곁에 있던 모두를, 심지어는 여주까지 해칠 뻔했었으니 까.
“ 전하.”
“네, 레이디.”
세드릭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십니까?”
“에반스 공작 전하.”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 다.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더 무거 운 목소리로.
지금은 본격적인 원작 스토리가 시 작하기 이년 전 시점이다. 세드릭의 광증을 치료해 줄 여주인공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칸이 예정보다 빨리 등장한 이상, 가만히 앉아 두고 볼 수는 없 었다. 누군가는 손을 써야 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전하의 전담 조 향사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전하의 주치의 같은 거죠. 전하께서도 저번 에 동의하셨었죠?”
세드릭이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물론입니다.”
“전하, 아시다시피 주치의에게는 건강과 관련된 모든 걸 세세히 보고 하셔야 해요. 최근에 심장 박동이
가쁘다거나, 기분이 지나치게 가라 앉는다든가, 두통이 오는 일은 없었 나요?”
“정말 제 주치의처럼 물어보시는군 요.”
세드릭이 또 농담으로 넘기려는 듯 가볍게 웃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전하.”
“알겠습니다. 무섭게 노려보지 마 십시오. 글쎄요, 제 건강은 평소와 같습니다만. 힘들다고 하면 레이디 께서 조치해주실 겁니까?”
“물론이죠.”
“정말입니까?”
세드릭이 눈을 반짝이며 상체를 가 까이 당겼다.
“그럼, 저번에 말씀드린 아젠드릭 출장 건 말입니다만.”
“……네?”
“또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요즘 두통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동 행해 주시는 겁니까?”
“네?”
나는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왜 이야기가 그리로 튀지?
“전하의 두통과 제가 아젠드릭까지 동행하는 것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 가 있죠?”
“그건 비밀입니다.”
“비밀이라됴?”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서.”
세드릭이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 한 미소를 지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이 사람.
나는 이마를 찡그리곤 말했다.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진 모르 겠지만, 제가 동행한다고 전하의 건 강이 나아질 리가 없잖아요.”
“한창 바쁘실 때이니 당장 요구하 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알로나 화 원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알로나 화원?
세드릭의 외할머님께서 가꾸셨다는
그 화원?
솔직히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은 곳이기는 했다. 나는 이 세계에서만 맡을 수 있는 알로나의 향기를 무척 사랑했다.
내 눈빛을 느꼈는지 세드릭이 빙긋 웃었다.
“솔깃하십니까?”
“으, 음. 그게.”
“워프 마법을 사용할 거라, 다녀오 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그런가요?”
“그럼 동행해 주시는 걸로 알고 있 겠습니다.”
이렇게 얼렁뚱땅 결정이 난다고?
몹시 당황스러웠다. 나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당장은 안 돼요. 당분간은 정말 바쁘거든요.”
“물론 레이디의 일정에 맞춰야죠.”
세드릭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내 대답이 정말 흡족한 듯 눈꼬리까 지 접어가면서.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나를 데려가 고 싶어 하는 거지?’
이유는 비밀이라고 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이기에?
무척 궁금하기는 했지만, 내게 해 가 되는 일은 아닐 듯했다. 세드릭 이 문득 물었다.
“그나저나 칸 이야기는 왜 꺼내신 겁니까?”
아.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세드릭이 납치당했었다는 사실은 극비였다. 기껏해야 황제와 전대 에 반스 공작 부부, 그들의 최측근이나 알고 있을 거다.
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무척 극악무도한 놈들이잖아요? 전하께서는 제국의 치안을 수호하고 있고요. 그러니까, 음. 일거리가 늘 어나 전하의 건강에 악영향이 있지 는 않을까 싶어서요.”
음, 횡설수설이군.
나는 크게 반성했다. ‘칸’이라는 이 름을 들은 순간 너무 동요한 나머지 냉철히 대처하지 못했다. 좀 더 넌 지시 물어봤어야 했는데.
하지만 다행히 세드릭의 얼굴에는 딱히 나를 의심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상한 질문을 했다.
“그런데, 레이디.”
세드릭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긴장해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레이디야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응? 나?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요?”
나는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세드릭이 끄덕였다.
“네, 레이디 아리엘. 평안하십니 까?”
그건 아주 이상하고 모호한 질문이 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천천히 대답 했다.
“평안…… 하지요? 아픈 곳도 없 고, 크게 골칫거리도 없고…… 무엇 보다 봄의 제전에서 우승하겠다는 목표를 이뤘으니 기분도 좋고요. 매 그너스 남작이 귀찮게 굴고는 있지
만 대처할 수 있는 범위예요. 그러 니까…… 음, 네. 저는 평안한데요.”
“그러십니까.”
세드릭이 희미하게 웃었다.
“다행이군요.”
수긍하는 듯했지만, 그의 눈길은 여전히 내게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