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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67화 (67/153)

〈67 화〉

정보 길드 칸은 원작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악당다운 악당이었다.

그들은 여주인공을 좀 못살게 굴었 을 뿐인 아리엘 윈스턴과는 달랐다. 최종 보스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잔 인하고 사악했다.

나는 동요를 감추며 물었다.

“황제 폐하와 전대 에반스 공작 전 하께서 철저히 숙청하시지 않으셨었

나요?”

[그랬죠. 하지만, 알 사람들은 알다 시피 길드 마스터는 살아남아 도망 쳤잖아요』

[그자들이 쫓겨난 지도 벌써 이십 년째예요. 그동안 이를 갈며 힘을 다시 모았던 모양이에요. 본부도 새 로 세웠다더군요. 어디 있는지는 모 르겠지만.]

멜리사가 이렇게까지 자세히 이야 기하는 걸 보면, 칸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다. 원작보다 이 년이나 빨리.

[벌써 뒷세계 유력가들을 상대로 정보를 사고팔고 있다고 들었어요. 무서운 일이죠.]

“……네. 그렇네요.”

[아리엘 양? 안색이 너무 안 좋은 데요. 괜찮아요?]

멜리사가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가 괜찮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비 록 칸이 사악한 악당 집단이기는 하 지만, 소시민인 나와 얽힐 일은 없 을 테니까.

하지 만-

나는 꾹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 랐다.

낮잠을 자다가 들킨 세드릭 에반스 의 당황한 얼굴.

공중정원에서 나와 함께 허브의 향 기를 맡던 얼굴.

내가 헛소리를 하자 곤혹스럽다는 듯 웃던 얼굴.

그리고, 다짜고짜 나를 껴안고는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고 말하던 얼 굴도.

그때 그의 숨소리는 분명 평소보다

거칠었다.

요 몇 달간 세드릭을 지켜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증상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인조 아닉시아 향 과 약 때문에 겉으로만 괜찮아 보일 뿐, 속은 상해가고 있는 것이 분명 했다.

‘지금은 안 되는데.’

칸이 지금 돌아와서는 안 되었다. 최악의 타이밍이었으니까.

만약 세드릭이 지금 상황에서 광증 의 원인인 그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면, 증세가 더욱 악화될 것이 분명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의 개입으로 자잘한 것들이 바뀌 긴 했지만 이렇게 원작의 큰 줄기가 변한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원작에 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악역 ‘칸’이 2년이나 일찍 돌아오다니.

향후 소설의 전개가 완전히 뒤바뀔 수 있는, 큰 사건이었다.

나는 초조함을 애써 내리누르며 멜 리사에게 말했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멜리사 양. 도 움이 됐어요.”

[아리엘 양, 방금 말씀드린 것들은 비밀이에요. 민심이 동요할 테니 당 분간은 비밀에 부치라고, 황실에서 명령이 내려왔거든요.]

“물론이에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멜리사를 안심시킨 나는 다음에 또 연락하겠다고 작별 인사를 건네곤 수정구의 연결을 끊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리나를

불렀다.

“리나, 오늘은 가게 일찍 닫자.”

“네? 정말요? 손님들이 이렇게 많 은데……

“오늘은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일 찍 닫아야 할 것 같아. 손님들께는 내가 사과할게.”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곧 손님들을 정중히 돌려보낸 나 는, 에른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에반스 공작저로 가주세요.”

내가 목적지를 말하자마자, 에른이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쏘 # 쑤

“레이디!”

리키온이 밝은 얼굴로 달려나왔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기별이라 도 주시죠! 요즘 저희 전하를 자주 찾아오시는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리키온 씨. 뭐, 전하 와는 가게도 그렇고, 아닉시아 향도 그렇고, 이래저래 엮여 있으니까요.”

“네에.”

적당히 대답하자 왠지 모르게 시무 룩해진 리키온이 눈썹을 늘어뜨렸 다.

나는 급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전하께선 안에 계시나요?”

“네, 조금 전 막 돌아오셨습니다.

타이밍이 좋으셨군요, 레이디!”

리키온이 금방 기세를 회복해서 조 잘댔다. 그가 나를 위층으로 안내했 다.

언제나처럼 응접실로 데려가려나 싶던 찰나, 계단을 오르자마자 나는 누군가와 맞닥뜨렸다.

“레이디?”

“아.”

당황한 목소리에 나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방금 막 돌아왔다는 말이 사실인

듯, 세드릭은 정복을 차려입은 채였 다. 그가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왔 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세드릭이 살짝 허리를 숙였다. 내 얼굴을 더 자세히 보려는 듯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가까워진 세 드릭의 얼굴을 마주 살폈다.

혈색도 괜찮고, 눈동자도 깨끗하 고…… 잘생긴 것도 변함없네.

다행히도 세드릭은 괜찮아 보였다. 광증이 심해지거나 감정의 동요가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설마, 아직 칸이 돌아왔다는 이야 기를 못 들었나?’

그럴 것 같진 않았다. 멜리사와 아 제키안이 아는 이야기라면 세드릭 역시 알고 있다고 봐야 했다.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들을 떠올리 던 나는, 문득 세드릭의 표정이 심 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듯 무척 놀 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덜컥 겁을 집어먹고 빠르게

물었다.

“전하? 왜 그러세요?”

“레이디, 잠을 주무시긴 한 겁니 까?”

“……네?”

뜻밖의 말에 자연스럽게 입이 벌어 졌다. 세드릭이 비딱하게 얼굴을 기 울인 채로 더 자세히 살피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눈에 실핏줄이 터져 있습니다.”

“어…… 정말요?”

“네. 눈 밑에 그림자도 심각하고.”

……그렇게 상태가 별론가?

나는 나도 모르게 양손으로 내 얼 굴을 감쌌다.

물론 봄의 제전 직후, 밀려들어 오 는 향수 주문을 감당하느라 며칠 동 안 제대로 잠을 못 잔 건 사실이었 다. 하지만 티가 날 정도일 줄은 몰 랐는데.

“티가 많이 나나요?”

“네. 많이 납니다.”

심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세드 릭이 타박하기 시작했다.

“숙면이 중요하다고 레이디께서 제 게 누차 강조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그랬죠.”

“그런데 정작 레이디께서 이렇게 티가 날 정도로 건강에 소홀하시면 어떡합니까?”

“죄송해요, 요 며칠 엄청 바빠서 그랬어요. 저는 멀쩡하니까 너무 걱 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피곤하긴 하지만, 금고에 쌓인 주

화들을 생각하면 기운이 펄펄 샘솟 았다.

하지만 세드릭은 내 해명을 들어주 지 않았다. 도리어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

“바쁘실 것 같아서 축하차 방문하 지도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잔소리라도 하러 들를 걸 그랬습니 다.”

“어…… 들르려고 하셨어요?”

“그랬죠.”

세드릭이 낮게 혀를 찼다. 그의 눈

길은 여전히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 다. 붉은 시선이 평소보다 더욱 가 가웠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민망한 나머지 머리를 긁적였 다.

‘언제부터 내 건강을 이렇게 챙겼 다고.’

생각해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야? 아닉시아 향 없이는 광증을 견디기 힘든 분이.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를 떠올리자

다시 기분이 심란해졌다.

“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 요.”

“낯빛이 이렇게나 좋지 않은데도 요?”

내 얼굴이 지금 그렇게나 심각한 가? 눈이 뻑뻑하고 머리가 조금 띵 하기는 하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고 세드릭을 똑바 로 올려다보았다.

“전하께서야 말로 괜찮으신 거예

요?”

“저 말입니까?”

의외인 말을 들었다는 듯 세드릭이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네. 전하요.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세요? 향수가 더 필요하진 않으 시고요?”

“불편한 곳은 없고 향수도 많이 남 았습니다만.”

“정말요? 건강에 아무 이상도 없으 신 거 맞아요?”

“저는 건강 빼면 시체인 사람입니

다.”

세드릭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거 짓말을 했다.

이대로는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가 없겠네.

나는 이마를 짚곤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저희 잠시 진지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진지한 이야기요.”

예상치 못한 말인 듯 세드릭이 눈

썹을 꿈틀댔다. 곧 그가 순순히 나 를 집무실로 안내했다.

눈치 없는 리키온이 집무실 안까지 졸래졸래 쫓아왔다. 나는 리키온을 한 번 돌아보곤 다시 세드릭을 바라 보았다.

“단둘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요?”

리키온 역시 내가 할 이야기들에 대해 알고 있을 것 같기는 했다. 그 는 세드릭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 는 보좌관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 그렇지 않을 가 능성도 있었기에, 미리 조심하는 편 이 좋을 것 같았다.

내 말에 세드릭이 잠깐 멈칫했다.

“상관은 없지만, 지금이 몇 시인지 는 알고 계십니까, 레이디?”

지금이 몇 시냐고?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 다. 시곗바늘이 밤 아홉 시를 넘어 서고 있었다.

‘내 평판을 걱정하는 건가.’

두 남녀가 늦은 밤 단둘이, 그것도 한 방에서 있었다는 소문이 사교계 에 퍼지기라도 하면 여기저기서 물 고 뜯으려고 할 것이었다.

공작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들 세드릭의 수하겠지만, 가끔 입이 싼 하인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런 소문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 니까.

“중요한 이야기여서요. 전하와 둘 이서만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네 요.”

세드릭이 리키온을 향해 눈짓했다. 리키온이 어딘가 기쁜 목소리로 말 했다.

“예, 그럼 전 이만 물러나 보겠습 니다!”

종종거리는 발소리가 빠르게 집무 실 밖으로 멀어져갔다.

조심스레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 다.

이제 방 안에는 온전히 나와 세드 릭, 둘뿐이었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레이디?”

세드릭이 내게 자리를 권하며 물었 다.

곧장 본론부터 묻는 걸로 보아, 내 표정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닌 모양이 었다.

나는 한 번 숨을 들이쉬고는 입을 열었다.

“세드릭 공작 전하.”

“예, 말씀하십시오.”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게 희한하 다는 듯 세드릭이 고개를 기울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주 먹을 한 번 꾹 쥐고는 단도직입적으 로 물었다.

“정보 길드 칸이 돌아왔다는 소식, 들으셨지요?”

세드릭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 었다.

내 말을 듣긴 한 건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는 그저 의아한 듯 고

개를 기울인 자세 그대로, 나를 빤 히 쳐다보았다.

‘정말 못 들은 건가?’

다시 한번 물으려던 찰나, 세드릭 이 먼저 입을 뗐다.

“어디서 들으신 정보입니까?”

“아제키안 전하와 이야기하다 보 니, 어쩌다가요.”

“아제 키 안?”

세드릭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불쾌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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