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66화 (66/153)

〈66 화〉

혼자 남은 나는 몇 시간 만에 처 음으로 평온히 차를 입에 댔다. 밖 은 손님들의 발소리로 북적거렸다. 딱 오 분만 쉬고 다시 일하러 나가 야지.

‘슬슬, 제대로 된 체계를 갖춰야 할 것 같네.’

매그너스는 앞으로도 어젯밤처럼

비슷한 협잡을 계속해서 부려댈 거 다. 그때마다 재료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선 안 되었다.

확실하고 믿을만한 거래처를 여럿 터 두어야겠군.

그뿐만 아니었다. 주문 물량을 모 두 소화하려면 직원도 더 고용해야 했고, 향수를 만들어낼 마도기계도 몇 대 더 들여야 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문제는 지금 지나치게 많은 물이 들어오고 있다는 거였다.

봄의 제전이 여파가 클 거라곤 생 각했지만, 이렇게나 대단할 줄이야.

나는 근육통으로 삐걱거리는 어깨 를 툭툭 두드렸다. 아침부터 정신없 이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온몸이 흐 느적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 씩씩하게 몸을 일으켰다.

‘돈 버는 고생은 고생도 아니랬어.’

옛 어른들 말씀에 틀린 게 하나도 없다니까.

나는 금세 활기차진 발걸음으로 응 접실을 나서다가, 달려들어오던 리

나와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

“으앗, 죄송해요, 아가씨!”

“괜찮아?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하 게 뛰어와?”

“그, 그게요, 아가씨.”

리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 렸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리나가 저 얼굴을 하는 경우는 드 물었으니까.

“ 설마?”

“네, 네. 아제키안 전하께서 방문하 셨어요.”

“하아. 바빠 죽겠는데.”

절로 곱지 않은 소리가 나갔다.

조만간 들르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가게 문 닫은 저녁에나 방문할 줄 알았지, 영업 시간에 올 줄은 몰랐 다.

‘이놈의 신분제 사회. 황자만 아니 었어도 소금 뿌려서 내쫓는 건데.’

아제키안은 떡하니 가게 한가운데 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복까지 번쩍번쩍하게 차려입은 채였다. 가게 안을 채우고 있던 손 님들이 황자의 등장에 놀란 듯 주춤 주춤 옆으로 물러섰다. 나는 이 민 폐 가득한 손님에게 다소 피곤한 얼 굴로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황자 전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레이 디.”

아제키안이 그렇게 말하며 짙게 웃 었다. 그 미소에 주변에서 어머, 어 머 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렇게 감탄하실 것 없답니다, 손 님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겉으로 보기엔 좀 잘생기긴 했지 만, 오 분만 대화를 나눠도 시큼한 오이 피클을 찾게 되거든요.

“응접실로 모실게요.”

나는 아제키안과 다시 한 번 응접 실로 돌아왔다. 리나가 긴장한 얼굴 로 차를 내왔다.

“제게 하실 말씀이란 건?”

차를 홀짝이기도 전 내가 말했다. 얼른 본론이나 말하고 돌아가란 이 야기 였다.

“급하시군, 레이디.”

아제키안이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또 느끼한 말로 한바탕 시간을 축 이려나 한숨이 나왔는데, 의외로 그 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메이 퀸, 축하하오.”

“감사합니다.”

“나는 그런 행사에 대해선 잘 모르 지만, 신인이 우승하기는 힘든 행사 라고 하던데 대단하더군. 특별한 색 으로 승부했다지?”

“승부수를 던졌었는데, 통해서 다 행이었지요.”

“흐음. 바로 그 승부수 말인데, 레 이 디.”

아제키안이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 쩍 몸을 가까이 붙였다.

“길베르트 상단이 아이리스를 그렇 게 대량으로 수입하리라는 정보는 어디서 얻으신 거요?”

직설적인 물음이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사실대로 말했다.

“실은 아이리스를 수입하시도록 추 천드린 게 저예요.”

“허? 레이디가?”

“네. 제이나 님을 뵙고 직접 말씀 드렸었죠.”

“허어.”

아제키안이 비웃음 같은 소리를 냈 다.

그가 깊게 한숨을 내쉬곤 나를 바 라보았다.

“레이디. 내가 그런 말에 속을 것 같소? 제이나 길베르트 백작이 고작 당신 같은 어린 영애 말 몇 마디에 넘어갔다고?”

“몇 마디는 아니고, 길게 말씀드렸 답니다.”

말장난이라고 느꼈는지 아제키안이

미간을 구겼다.

“그런 얄팍한 속임수로 나를 속이 려 하지 마시오, 레이디. 똑똑히 털 어 놓아주면 좋겠소. 길베르트 백작 이 아이리스를 수입할 거라는 정보 는 대체 어디서 얻은 거요?”

기껏 대답해 주었더니, 믿지 않다 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조용히 침묵을 지키자 아제키 안이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칸’에서 정보를 산 거요?”

……뭐?

내 몸이 우뚝 굳었다.

방금 이상한 단어를 들은 것 같은 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정보 길드 ‘칸’에서 구매한 정보 냐고 물었소, 레이디.”

“반응을 보아하니 내가 정곡을 찌 른 것 같군.”

아제키안이 픽 웃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반응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정보 길드 칸.’

그 이름이 왜 벌써 나오지?

아직은 나와서는 안 되는 이름인 데. 나는 나도 모르게 손톱 밑을 세 게 눌렀다. 머릿속에선 경보음이 요 란하게 울렸다.

원작의 시간선이 처음으로 비틀린 것이었다.

나는 애써 침착히 물었다.

“칸이라니, 그자들은 잠적했잖아 요?”

“이제와서 모르는 척하는 거요? 안 타깝지만 방금 그 반응으로 이미 들 켰다오, 레이디. 칸이 돌아왔다는 건 극비 중의 극비인데, 어떻게 용케 그자들과 접선한 거요? 방법은 몰라 도 칭찬하고 싶군.”

돌아왔다고?

내 머리가 하얗게 굳었다.

“사업을 위해서라면 위험한 자들과 도 거침없이 교류하는 그 용기라니. 역시 레이디는 내 사람이 될 재목이 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자들과 거래를 트다니. 내가 이 일에 대해 한마디라도 뻥긋한다면, 황제 폐하 께서 레이디에게 엄벌을 내릴 거 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오? 레이디 는 지금 내게 잘 보여야 하는 입장 이란 이야기지.”

아제키안의 목소리가 조금도 귓가 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는 원작 소설의 페이 지가 정신없이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칸 이 벌써 등장해서는 안 됐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되었다. 그것도 단단히.

나는 초조히 입술을 씹었다. 어떻 게 된 일인지 한시라도 빨리 알아내 고 싶었다. 나는 아제키안에게 고개 를 숙여 보였다.

“죄송하지만, 황자 전하. 제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이런. 열이 있나? 내 주치의를 보 낼 테니……?

“아뇨. 그저 몸살입니다. 잠깐 쉬면 나을 거예요. 그러니, 죄송하지 만……/’

“흐음 ”

“ 느—! #

아제키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내가 황제 폐하께 정말 고 자질이라도 할까 봐 겁이 난 거요? 칸과 거래까지 해놓고, 생각보다 담

이 작군. 걱정하지 마시오. 그대가 순순히 내 사람만 된다면……/

“아제키안 전하.”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아제키안의 말을 끊었다.

아직 혼란스러웠지만, 이 오해만은 불쾌해서 넘길 수 없었다.

“어떤 오해를 하고 계신 건지 모르 겠지만, 전 그자들과 거래하지 않았 어요. 앞으로도 절대 그럴 일 없을 테고요.”

아무리 엄청난 정보로 유혹한다 해 도 칸과 거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자들과 연을 맺느니 차라리 봄의 제전에서 우승하지 못하는 편이 나 았다.

나는 힘이 들어간 눈으로 아제키안 을 마주보았다. 아제키안이 슬그머 니 고개를 돌리더니 헛기침을 했다.

“……오해였으면 미안하군. 그럼 정말 몸이 안 좋은 것이오? 그렇다 면 내 물러나기 전에 레이디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고 가지.”

선물 같은 걸 받을 시간도 아까운 데. 나는 초조한 눈으로 아제키안을 올려다보았다.

“레이디도 잘 알겠지만, 우리 벨레 르 황가는 짙은 신성력을 타고났지. 그래서 우리 황족은 마치 고위 신관 들처럼 신의 축복을 내릴 수 있소.”

이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아제키안을 올려 다보았다.

“지금 그 축복을 손수 레이디에게

내려주겠소. 아주 귀한, 황족만이 할 수 있는 선물이지.”

아제키안이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 다.

신의 축복이라니, 무슨 뜬구름 잡 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제키안은 돈 주고도 받지 못하는 축복이라며 잔뜩 무게를 잡았다.

“자, 레이디. 눈을 감아보게. 곧 황 금빛 신성력이 레이디의 온몸에 스 며들 거야. 사흘 밤낮은 신의 활력 이 넘쳐나서 자지 않아도 멀쩡할 것 이네. 장담하지.”

아제키안이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나는 한숨을 누르며 몸에서 힘을 뺐다. 가만히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게 가장 빠른 길일 것 같았다.

아제키안이 작게 기도문을 읊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 다.

황금빛 신성력은 커녕, 작은 변화 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이, 이상한데. 왜 아무런 반응이 없지?”

아제키안이 당황해선 혼잣말을 했 다.

그는 몇 번 더 기도문을 읊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몸에선 아무런 반 응도 없었다. 그저 정수리에 아제키 안의 손바닥이 얹혀 있는 게 신경 쓰일 뿐이었다.

“이럴 리가…… 왜 신성력이 안 통 하지? 레이디 아리엘, 혹시 세례를 안 받았다거나……

“아제키안 전하. 죄송하지만, 정말 몸살 기운이 심해서요. 전하께 혹여 나 옮을까 걱정되네요.”

나는 다시금 축객령을 내렸다. 아 제키안은 당황했는지 혼자 멍하니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내가 유도하는 대로 현관문으로 향했다.

“그럴 리가…… 내 힘이 통하지 않 을 리가.”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황자 전하.”

아제키안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웅 얼거리며 퇴장했다.

혼자 남은 나는 다급히 통신용 수 정구를 찾았다. 다행히 곧 멜리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멜리사 양!”

[어머나, 놀라라. 아리엘 양, 무슨 일이에요? 한창 바쁠 사람이. 급한 일이라도 있어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이런 일을 제일 잘 알 만한 사람 은 역시 기자인 멜리사뿐이었다. 나 는 긴장을 누르며 물었다.

“정보 길드 칸에 대해서, 알고 계 시죠? 정말 그자들이 돌아온 건가 요?”

[칸?]

멜리사의 미간이 구겨졌다. 불쾌한 이름을 들은 사람처럼.

곧 멜리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 다.

[그건…… 아직 극비사항인데, 어 디서 들은 소식인가요? 으음, 아리 엘 양이 물으시니 사실대로 대답할 게요. 네, 맞아요. 돌아왔다더군요.]

나는 꼭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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