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65화 (65/153)

〈6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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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이쪽은 완성이에요!”

“응, 나도 끝!”

마지막 조화를 선반 위에 장식하며 내가 외쳤다.

나는 가게 내부를 돌아보았다. 깔 끔하게 무채색으로 정돈해 놓았던

가게가 온갖 봄꽃들로 알록달록 물 들어 있었다.

분홍빛 작약, 노란 튤립. 곳곳에 보랏빛 아이리스까지. 눈이 황홀해 지는 화려한 색색의 조화에 나는 빙 그레 미소를 지었다.

장장 두 시간의 노동 끝에 작은 리모델링이 끝났다. 쉴 시간은 없었 다. 어느덧 시계가 아침 열 시를 가 리키고 있었으니까.

리나가 한 번 심호흡을 하고는, 가 게 문을 당겨 열었다.

문 뒤로 늘어서 있던 사람들이 모 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한참 기다렸어요!”

손님들이 아우성치며 가게 안으로 물밀듯 밀려들어왔다.

나는 활짝 웃으며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아리엘의 향기 살롱 입니다!”

나는 2호점 계획을 위해 많은 것 들을 준비했었다.

계획표를 꼼꼼히 따지며 놓친 것이 없는지 재차 확인도 했다. 계획대로 만 된다면 모든 게 완벽하리라고 자 신했었다.

재고도 미리 충분히 채워 놓았다.

이야기 좀 하자며 계속 성가시게 굴던 윈스턴 백작과의 만남도 몇 주 뒤로 멀찍이 미뤄 놓았다.

재료 수급에 모자람이 없도록 라파 엘 등 단골 꽃집과의 계약도 미리 맺어 놓았다.

모든 준비가 완벽하다고 생각했었

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평 가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좀 더 완벽했어야 했던 거다.

“이쪽 선반은 동났어요!”

“포도씨 오일을 더 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아가씨.”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비보에 정신 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가게를 둘러보았다.

가게는 깨끗했다. 깨끗하다는 말로

도 부족했다. 향수 선반이라는 선반 은 모조리 먼지 한 톨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텅텅 비어 있었으니 까.

팔 게 없으니 손님들도 퇴장한 지 오래였다.

아니, 가게에서만 물러났을 뿐 그 들은 아직 문밖에 찰싹 달라붙어 대 기하고 있었다. 문 너머로 넘실대는 사람들의 그림자 덕에 먹구름이 낀 듯 가게가 어둑했다.

모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제이나에게서 넉넉히 받아 놓은 아 이리스도, 다른 향수들도 순식간에 텅텅 동이 나고 말았다.

향수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 쉬운 이야기였다. 하 지만……,

나는 방금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전한 에른에게 물었다.

“포도씨 오일이 없다니요? 그게 무 슨 이야기예요, 에른 경?”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근방 모 든 상인들이 포도씨 오일을 더 팔 수 없다고 하더군요. 강경히 얘기를 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마찬가지였 습니다.”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말도 안 돼요! 포도씨 오일이 동 나다니? 희귀한 물건도 아니잖아요! 이상해요, 아리엘 님!”

리나가 외쳤다.

나는 얕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 레절레 저었다. 포도씨 오일은 몇몇 향수를 만들 때 필수적인 재료다. 특히 아이리스 향을 만들 때 반드시 필요했다.

평소 상인들이 쌓아 놓고 팔 정도 로 물량이 넉넉한 물건인데.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상인들이 없 어서 못 팔겠다고 나서는 이유는 뻔 했다.

‘내 미래의 2호점에 아직 입주해 계시는 불청객께서 꾸미신 일이겠 지.’

뭐, 매그너스가 심심할 때마다 벌 이는 짓이니 놀랍지도 않았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매그너스가 꽉 잡고 있는 세논 지구 상점들을 포기하면 그만이니까. 나라고 믿을 만한 거래처가 없을까.

‘하지만 친한 기름 상인들의 가게 는 전부 멀어서…… 마차를 타도 이 십 분은 걸릴 텐데.’

어쩔 수 없지.

아무리 몸이 널어놓은 빨래처럼 축 축 처진다고 해도, 해야 할 일은 해 야 했다.

‘자, 오늘 번 금화를 생각해!’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오늘 내내 짤랑거리며 금고에 쌓인 주화들을

떠올렸다.

그 황홀한 금빛, 은빛의 물결에 금 방 기운이 솟아올랐다.

나는 씩씩하게 문을 박차고 열…… 려다가, 아직도 몰려 있는 사람들을 피해 뒷문으로 살짝 빠져나갔다.

고개를 들자 저 앞으로 내 미래의 2호점, 아니. 매그너스의 가게가 보 였다.

항상 사람으로 붐비던 가게였으나 오늘은 조금 썰렁해 보였다. 점원들 이 심심한지 저들끼리 노닥거리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내 미래의 점원들.’

나는 악덕 고용주가 아니었다.

비록 경쟁자가 경영하던 가게이긴 하지만, 2호점을 인수하면 기존 종 업원들도 계속 데리고 있을 생각이 었다. 죄 없는 사람들을 하루 아침 에 실직자로 만들고 싶진 않았으니 까.

“뭘 노닥거리고들 있나!”

곧 매그너스의 가게 안에서 불호령 이 들렸다. 잡담을 나누던 점원들이

화들짝 놀라 불붙은 토끼처럼 가게 안으로 바삐 돌아갔다.

매그너스의 가게는 복지가 무척 좋 지 않다고 들었다. 손님들한테만 퍼 줄 뿐, 정작 제 식구들에게는 급여 도, 여가 시간도 몹시 짜다는 악평 이 자자했다.

‘조금만 기다려요.’

나는 아련한 눈으로 사라지는 점원 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인간적인 경영자, 아리엘 윈스턴이 곧 찾아갑니다.

쑤 쏘 쏘

“세상에, 향이 너무 좋아요.”

“왜 여태까지 이런 향기를 모르고 살았지?”

아이리스 내음을 담은 신작,〈보랏 빛 밤의 끝자락〉를 손에 꼭 쥔 채 귀족 영애 둘이 연신 감탄을 흘렸 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드문 꽃이니까요. 길베르트 백작 님께서 대량으로 수입해 주셔서 다 행일 따름이지요.”

“정말 그래요. 백작님께서는 안목 도 좋으시지.”

“그 정도 안목은 되어야 그렇게 커 다란 상단을 이끌 수 있는 걸까요?”

제이나에게 바로 그 안목을 제공한 장본인인 나는 또 몰래 뿌듯한 웃음 을 걸쳤다.

그때 리나가 다가와 말을 전했다.

"아가씨, 아가씨를 뵙고자 하는 분

이 계세요!”

“으응? 손님이야?”

“아뇨, 손님은 아닌 것 같아요. 얼 굴이 눈에 익은데…… 누구였는지 생각이 잘……?

리나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구지? 나는 짧은 고민 끝에 일 단 만나보기로 결정했다.

손님을 모셔 놓은 응접실 문을 열 자, 앉아 있던 남자가 벌떡 몸을 일 으켰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아리엘!”

나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리나의 말이 맞았다. 남자의 얼굴은 분명 눈에 익었다.

‘누구더라?’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남자가 곧장 스스로를 소개했다.

“150번지에서 기름 가게를 운영하 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와 몇 번 거 래를 트셨죠?”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나와 가끔 거래한 적이 있 는 기름 상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논 지구의 기름 상 인들 전부 나와 거래를 끊은 상태일 텐데?

바로 어젯밤, 포도씨 오일이 없어 허덕였던 기억이 떠올라 나는 고개 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네, 기억나네요. 여긴 어쩐 일이신 가요?”

“그게, 흠, 흠. 다름이 아니오라.”

기름 상인이 붙임성 좋게 웃으며 손을 비볐다.

“어젯밤엔 마침 재고가 동나서 레 이디께 기름을 못 드렸지만, 밤새 발에 땀이 나게 돌아다닌 끝에 재고 를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밤새 내게 붙는 게 나을지, 매그너 스에게 붙는 게 나을지 계산기를 두 드렸다는 소리군.

나는 계속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그래서 이제는 아리엘 님께 기름 을 판매할 수 있게 됐지요. 지금 남 은 물건이 없어 곤란을 겪고 계시지 않습니까?”

딱히 곤란하진 않았다.

조금 귀찮을 뿐. 이 넓은 제도에서 포도씨 오일을 파는 상점이 세논 지 구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

기름 상인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 다.

“다른 상인들은 매그너스 남작이

무서워서 아리엘 님과 거래하지 않 으려 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 죠. 저라면 아리엘 님께 필요한 재 료를 모두 조달해드릴 수 있습니다! 어떠십니까, 저와 전속 계약을 맺으 시는 건?”

‘전속’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나 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 간 저 단어를 가장 많이 듣는 것 같았다.

나는 가벼운 미소를 걸친 채 입을 열었다.

“걱정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포

도씨 오일은 이미 잔뜩 구해놓았답 니다.”

기름 상인의 눈이 커졌다.

“예, 예?”

“제도에는 매그너스 남작님과 아제 키안 5황자 전하를 무서워하지 않는 상인들도 여럿 있더군요. 그분들께 도움을 받았죠/’

“대체 어디서……!”

기름 상인이 배신이라도 당한 듯 몸을 떨었다.

“아리엘 님, 그런 어중이떠중이들 의 물건을 쓰셔선 안 됩니다! 진짜 기름 장인들은 세논 지구에만 모여 있다는 사실을 아실 텐데요? 세논 지구에 들어오지도 못한 저급 상인 들의 기름을 쓰시다니요!”

“글쎄요. 차이가 있는지는 딱히 모 르겠던데요.”

기름 상인의 눈이 개구리처럼 커졌 다.

“차이를 모르겠다니! 말도 안 됩니

다!”

“죄송해요. 제가 그런 면에 둔감해 서.”

물론 난 둔감하지 않다.

하지만 차이를 알아챌 수 없다고 한 말은 사실이었다. 세논 지구 밖 의 기름도 품질이 나쁘지 않았다.

이참에 매그너스와 아제키안 눈치 만 슬슬 보는 세논 지구의 재료 상 점들과의 거래를 끊어 볼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론, 세논 지구의 장인들이 좋은 품질의 재료를 판매하는 건 사실이

었다. 하지만 자릿세 때문인지 이름 값 때문인지 값이 지나치게 비쌌다.

여태까지는 그냥 관행대로 비싼 값 을 내고 구매했지만, 막상 다른 지 역 상점을 이용해보니 굳이 그럴 필 요가 없겠단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 이다.

“아리엘 님! 후회하실 겁니다! 향 수는 재료가 생명이거늘!”

“향수에 대해 잘 아시나 보네요. 하지만 저도 제법 잘 아는 편이니, 너무 걱정해주지 않으셔도 될 것 같 아요.”

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기 름 상인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무 리 품질 좋은 물건을 만든다고 해도 나를 배신한 거래처는 필요없었다.

황자를 뒷배로 둔 잘나가는 사업가 와, ‘봄의 제전’ 여파로 반짝 인기를 끌고 있는 초보 상인. 계산기를 두 드리자면 매그너스 쪽이 더 튼튼한 배로 보였겠지.

나는 그들의 선택을 이해했고, 존 중했다. 다만 나도 선택을 할 뿐이 었다.

“아리엘 님! 세논 지구 상점들과는 더 이상 거래하지 않으시겠다는 이 야기 입니까?”

나는 빙긋이 웃었다.

아무래도 기름 상인들은 예전에 매 그너스가 근방 꽃집들을 모조리 매 수했을 때, 내가 매수당했던 꽃집들 과 두 번 다시 거래하지 않고 있다 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런 말씀은 드린 적 없어요. 다 만 어젯밤, 기름을 구하러 돌아다니 다 새로운 거래처를 이미 찾고 말았

을 뿐이랍니다.”

“……후회하실 겁니다!”

기름 상인이 분한 얼굴로 응접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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