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화〉
로잘린, 내 드레스를 만들어준 디 자이 너-
이것도 인연이라 할 수 있는데, 매 정하게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는 없 었다.
결국 나는 마차 문을 열었다. 사람 들이 기다렸다는 듯 악수를 청했다.
다들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었다. 옷감이 고급스러울 뿐 아니라, 저마 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옷차림에 순
간 눈이 즐거워질 정도였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아리엘! 저 는 로버트 한셀이라고 합니다. 듣던 대로 아름다우시군요!”
“아름다우실 뿐만 아니라 눈빛에서 총기가 가득 느껴집니다. 고상함과 기품은 또 어떻고요! 아차차, 제 이 름은 레이나 졸렛입니다. 반갑습니 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온갖 칭찬이 총탄처럼 내게 쏟아졌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멍하니 고개
를 끄덕거렸다.
“아, 감사합니다……?”
“저리 가요, 저리 가. 레이디를 귀 찮게 하지 말아요! 바쁘신 분인데. 하하, 안녕하세요. 도미니크 허만이 라고 합니다. 오호라, 굉장히 아름다 운 목걸이를 하고 계시는군요?”
도미니크라는 사람이 갑자기 내 목 걸이를 칭찬했다.
그가 목걸이 디자인이며 보석의 아 름다움을 한껏 칭찬하자, 나도 모르 게 기분이 좋아졌다.
한참 내 목걸이를 칭찬한 도미니크 가 은근슬쩍 본론에 들어갔다.
“제가 이렇게 찾아뵌 건 다름이 아 니고요, 레이디. 혹시 전속 드레스 디자이너가 있으신가요?”
“전속 디자이너요?”
“예. 혹시 기성품 드레스를 입어 보셨습니까? 아무리 잘 만들어진 옷 이어도 레이디의 몸에 완벽히 맞을 순 없으니 불편하셨을 겁니다. 그렇 죠, 드레스는 역시 맞춤 드레스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행사 가 있을 때마다 디자이너를 찾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예, 어렵기는 하죠
명가의 무도회처럼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면, 제도의 모든 디자이너 숍이 사람으로 붐빈다. 열정적인 도 미니크의 연설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니크가 씩 웃 으며 기세를 몰았다.
“그러니 바로 전속 디자이너가 필 요하신 겁니다! 레이디를 위해 언제 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디자이 너요! 여기 바로 그런 인재가 준비 되어 있습니다. 자, 레이디, 제 명함 은여기……/
“이 여우 같은 사람! 혼자만 레이 디를 독점하려고!”
도미니크가 은근슬쩍 명함을 건네 자, 다른 사람이 벼락같이 화를 냈 다.
깜짝 놀라 끼어든 사람을 바라보 자, 그녀가 녹을 듯이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어휴, 레이디. 도미 니크 저 친구는 진짜 멋을 모른답니 다. 그저 유행만 좇을 줄 알지 드레 스에 기품을 불어넣지 못하죠. 하지
만, 저라면! 레이디의 아름다움에 걸맞은 드레스를 저라면 만들어낼 수 있어요.”
“레이디, 아름다운 드레스에 아름 다운 구두가 빠지면 안 되겠죠? 저 로 말할 것 같으면 제도에서 십 년 째 영업 중인 장인으로……?
세상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앞다투어 스 스로를 소개했다. 다들 내 손에 명
함을 쥐여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드레스 디자이너, 보석 디자이너,
전문 미용사……,
제도의 패션을 책임지는 온갖 장인 들이 내게 명함을 흔들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눈앞에서 펼쳐 진 소란을 바라보았다.
“에른 경!”
나는 에른에게 속삭거렸다.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죠?”
“레이디를 포섭하기 위해 몰려든 이들 같습니다.”
포섭?
내가 멍한 눈으로 에른을 올려다보 자 그가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봄의 제전에서 우승하셨으니까요. 다들 우승자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 고 싶은 겁니다. 마치 검술 대회 우 승자에게 도검 명인들이 몰려들듯이 말입니다.”
에른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다.
정곡을 찔렸는지 서로 견제하던 디 자이너들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 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한 듯 내게 배 시시 미소를 보냈다. 아무래도 에른 이 없는 말을 한 건 아닌 모양이었 다.
‘이래서 였나?’
오늘 친해진 레이디들이 뒤풀이 겸 살롱으로 자리를 옮긴다고 하기에, 나도 얼른 따라가겠다고 손을 들었 었다.
그러나 레이디들은 묘한 미소를 지 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리엘 양은 바쁠걸요.’
‘네? 안 바쁜데요?’
‘이제 바빠질 거예요.’
뒤풀이에 함께 갈 만큼 친해지지 못한 것 같아 조금 시무룩했었는 데……으
어쩌면 그게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저, 여러분.”
나는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서로를 팔꿈치로 찌르던 장인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예! 레이디, 왜 그러시죠?”
“제도의 20년 명가인 저희 로슈아 숍을 선택하기로 하신 건가요?”
“아니시죠? 제도 최고의 디자이너 가 있는 저희 숍을 선택하시려는 거 죠?”
아니, 그게 아니라.
해명하려 했으나 장인들은 다시 서 로를 노려보며 팔꿈치로 찔러대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래서 는 끝이 없을 것 같다.
큼, 헛기침을 한 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제겐 이미 전속 디자이너가 있어 서요!”
“ 예?”
“네에?”
금시초문이라는 듯 모두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 속에서 같이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로잘린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마담 로잘린, 당신이 제 전속 디 자이너잖아요. 거기서 뭐 하고 계세 요?”
“어, 네? 저, 네?”
로잘린이 입술을 더듬거리며 스스 로를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로잘린. 제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 주시겠다면서요. 그렇죠?”
장인들이 홱 로잘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쏟아지는 시선들이 어찌나 무시무 시한지, 가냘픈 로잘린을 반으로 갈 라버릴 것 같았다.
그 시선 속에서 잠시 멍하니 있던 로잘린이, 곧 정신을 차린 듯 외쳤 다.
“네, 네. 맞아요! 제가 레이디의 전 속 디자이너죠!”
물론 로잘린과 그런 계약을 맺은 적은 없다.
하지만 누구든 전속으로 정하지 않 으면 이 사람들은 나를 놓아주지 않 을 기세였다. 마침 로잘린이 만들어 준 이 청자색 드레스가 마음에 쏙 들기도 했고.
도미니크라는 디자이너의 말이 맞 았다. 드레스를 지어야 할 때마다 디자이너를 찾기란 골치 아픈 일이 다. 전속 디자이너를 두는 것도 괜 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았다.
앞으론 참석할 연회도 많아질 테니 까 말이지.
“로잘린 양, 당신이 아리엘 님의 전속이라고요?”
“말도 안 돼! 아직 개인 숍도 없는 당신이!”
맞는 말이었다. 로잘린은 신예 디 자이너인 탓에 아직 개인 가게가 없 었다. 자신의 드레스를 전시할 공간 도 없었으니, 열악한 환경이긴 했다.
‘하지만, 뭐. 그거야 신인이니까 어 쩔 수 없는 일이고.’
중요한 건 개인 가게 유무보다 실 력이니까. 나는 로잘린을 향해 손짓 했다. 그녀가 얼른 내 옆으로 다가
왔다.
“말도 안 됩니다, 레이디!”
“로잘린 레놀라라니요, 저런 풋내 기가 레이디의 품격을 뒷받칠 수 있 겠습니까?”
디자이너들의 항의를 빗발쳤지만 나는 귀를 닫았다. 대신 로잘린에게 로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내일 제 가게에 찾아와요. 전속 계약서 쓰러요.”
“네, 넵. 아리엘 님! 믿어주셔서 감
사합니다!”
로잘린이 감격한 듯 두 팔을 벌렸 다. 나를 꼭 껴안을 기세였다.
나는 매끄럽게 그녀의 두 팔 사이 를 벗어나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럼, 제겐 전속이 이미 있으니 더 볼 일은 없으시겠죠?”
“아쉽게 되었습니다, 아리엘 님. 다 음에도 기회가 있다면 꼭 이 도미니 크를 찾아 주십시오……
“레이나 졸렛입니다. 드린 명함은 버리지 말아 주세요……
장인들이 터덜터덜 걸음을 돌렸다.
휴우. 나는 손등으로 슬며시 이마 를 훔쳤다. 드디어 해방이었다.
“에른 경, 그럼 이제 슬슬 다시 출 발해 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응? 아직 남은 사람들이 있었나?’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남은 사람 들이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저는 구두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마크 폴란이 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드레스에는 역시 아름다운 구두가 있어야죠.”
“구두뿐입니까, 레이디? 제가 디자 인한 모자라면 레이디의 아름다움을 몇 배 돋보이게 만들 수 있을 겁니 다!”
맙소사.
아직 끝이 아니었던 거다.
쑤 쑤
0 0 0
욕조에 한껏 기대며 나는 늘어지라 기지개를 켰다.
온몸이 노곤하고 나른했다. 이대로 욕조 바닥에 영원히 눌어붙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직 남아 있던 장인들을 돌려보내 느라 또 진땀을 뺐다. 어찌나 다들 끈덕진지 에른이 그냥 마차로 치고 가자는 강경안을 내놓을 정도였다.
‘샤를로트는 항상 이렇게 시달리며 사는 건가?’
사교계의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항 상 따라붙는 샤를로트.
그녀의 손을 거친 것이라면 드레스 는 물론, 꽃 한 송이조차 주목받았 다. 그녀는 모든 패션계 장인들이 탐내는 손님일 거다.
‘샤를로트 양도 고생이 많았구나.’
나는 욕조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
가며 생각했다.
‘이대로 스무 시간만 자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내일은 중요한 날이었다. 어쩌면 오늘보다도 더.
그러니 절대 잠으로 날릴 수 없었 다.
곯아떨어지는 대신 나는 종아리를 열심히 주물렀다. 하루 종일 혹사당 한 다리가 신음을 내질렀다.
꽤 길었던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리나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아가씨, 잠드신 줄 알았어요. 바로 주무실 건가요? 아니면 간식이라도 만들어 드릴까요?”
“아냐, 아냐. 바로 잘래. 너무 졸 려.”
“네! 잠자리를 준비해 드릴게요. 아, 참! 방금 아가씨 앞으로 카드가 도착했어요.”
“응? 카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어요. 지 금 직접 보시겠어요?”
“응, 그럴래.”
카드 한 장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피곤한 건 아니었다.
욕조에서 나오자 리나가 가운을 걸 쳐주었다. 나는 물기를 닦으며 탁자 로 향했다.
그곳엔 리나가 옮긴 듯 카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곁에는 보랏빛 꽃 한 송이도 함께였다.
‘저건.’
눈에 익은 꽃에 무심코 손길이 끌 렸다.
아이리스 한 송이였다. 방금 딴 듯 싱그러운.
나는 나도 모르게 꽃을 코 아래로 가까이 가져갔다. 향긋한 생화 향기 에 온몸이 나른해졌다.
나는 여린 아이리스 꽃잎을 뺨에 가져다대며 카드를 열었다. 그제야 꽃에 정신이 팔려 잠깐 잊고 있었던 카드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손바닥만한 카드에는 한 문장이 쓰 여 있었다.
‘축하합니다. 오월의 여왕님.’
아주 간단한 문구.
그 문구에 나도 모르게 슬며시 입 꼬리가 올라갔다.
“……참, 나.”
나는 한숨처럼 헛웃음을 흘렸다.
‘잘도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써 놨네;
어떤 표정을 하고서 이런 글을 적 었을까. 평소의 무표정으로 썼다면 조금 웃길 것 같다.
발신인은 쓰여있지 않았지만, 범인 은 분명했다. 나는 괜스레 카드를 뒤적였다. 다른 말은 달리 쓰여 있 지 않았다.
카드를 만지작거리자 만년필에 패 인 자국이 그대로 손끝에 전해졌다.
어쩐지 얼굴이 조금 더워졌다. 나 는 손등으로 뺨을 식혀 보았다.
왜 이러지.
벌써 여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