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화〉
유력한 메이 퀸 후보는 셋이었다. 첫째, 다음 달에 결혼을 한다는 레 이디 콘티나. 예비 신부답게 순백색 으로 차려입어 청순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둘째는 델레이나 황녀의 측근인 베 르데타 알펜드. 황녀는 매년 후보에 오르지 않았다. 황족은 평가받는 위 치가 아니라나. 대신 그녀는 늘 자 기 측근을 대타로 세웠다. 올해는
베르데타가 델레이나 황녀의 분신이 나 다름없었다.
황녀는 오늘 베르데타를 포함한 측 근들 모두를 하늘빛으로 치장시켰 다. 솔직히 화사해서 눈이 즐겁긴 했다. 하늘색은 인기가 좋은 색상이 지만, 지난 몇 년간 대놓고 유행한 적은 없어서 올해의 색이 되기 적합 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후보는, 음. 내 입 으로 말하기는 조금 부끄럽지만 나 였다.
‘꽤 잘했는걸.’
이건 자만이 아니었다.
나는 오늘 내 모습을 돌아보았다.
많은 레이디들이 나와 내 향수에 관심을 가져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 도 꽤 잘 처신한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을 당당히 유력 후보에 올렸 다.
하지만 신이 아닌 이상 결과를 확 신할 수는 없기에, 자연스럽게 긴장 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이거 꽤 긴장되네.’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긴장해봤자 결과가 달라지 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난 내 할 일이나 마저 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당당히 투표 지에 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 삐져 나온 데가 없는지 꼼꼼히 신경 써서.
투표를 마치고 오는 데 누군가 내 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황녀의 측근인 베르데타였다. 그녀 가 나지막이 귓속말을 했다.
“아쉽겠어요, 윈스턴 영애?”
“ 예?”
“금남구역이라 세드릭 전하를 파트 너로 모시고 오지 못했으니까요.”
음. 헛소리군.
세드릭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귀를 반쯤 닫았다.
사교계에서 세드릭과 관련된 얼토 당토않은 이야기를 들은 게 한두 번 이 아니었다.
대놓고 등을 돌릴 수는 없기에 나 는 다른 생각을 하며 멍하니 베르데 타를 바라보았다.
“윈스턴 영애는 항상 그분의 휘광 을 업고서 사교 활동을 즐겼잖아요? 황실 무도회에도 세드릭 전하 덕에 참가할 수 있었다면서요? 이번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몹시 아쉽겠 어요.”
“음, 네.”
나는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데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쉽다고요?”
“네. 아쉽네요. 세드릭 전하만 있었
으면 투표지를 몽땅 조작해서 저를 우승시켜주셨을 테니까요. 아, 아쉬 워라. 전하께서는 왜 남자로 태어나 신 거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었다.
노골적으로 비꼬자, 주변 영애들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베르데타의 얼굴이 슬며시 붉어졌 다. 먼저 시비를 걸어온 것은 저쪽 이니 내게 무례하다며 화를 낼 수도 없을 터였다.
나는 그녀에게 오래 시선을 주지 않고 등을 돌렸다.
‘기분이 차분해지는걸.’
나는 베르데타를 지나치면서 생각 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저급한 시비를 거 는 이유는 간단하다. 조바심이 나는 거다. 때문에 빙빙 돌려 고상한 어 휘를 떠올릴 여유도 없이 뻔한 시비 를 걸어오는 것이다.
아마 황녀는 내가 분개한 나머지 베르데타에게 화를 내길 바랐겠지. 아직 투표하지 않은 영애들이 그 꼴 을 보고 다른 사람을 투표하도록 만
들기 위해서.
‘뻔하다, 뻔해.’
이런 되지도 않는 수를 쓰는 이유 는 보나마나였다.
나는 저 멀리 측근들과 서 있는 황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눈이 마주 친 황녀가 미간을 좁혔다. 나는 그 녀에게 생긋 미소를 보냈다.
조급해진 거겠지. 내가 정말 자기 를 이겨버릴까 봐.
“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때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회장이 겨울밤처럼 고요해 졌다. 나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
‘드디어.’
‘2호점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메이 퀸을 거머쥐어야 했다. 계획 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자,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신이시여.’
나는 찾지도 않던 신을 간절히 불 렀다.
‘1호점보다 으리으리한 2호점을 짓 고 싶습니다.’
내 이글거리는 눈빛이 따가웠는지 집사가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 주치자 집사가 흠, 흠 헛기침을 했 다.
“첫 번째 표는……
모두 집사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기울였다. 투표지를 연 집사가 말했 다.
“콘티나 아스텔로 님이십니다.”
“어머나.”
“축하드려요!”
콘티나 곁에 선 영애들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콘티나가 수 줍은 듯 웃었다.
“아리엘 양, 다음은 틀림없이 아리 엘 양일 거예요.”
내내 내 향수에 가장 크게 열광해 주었던 레이디, 율리아나가 속닥거 렸다. 동시에 집사가 두 번째 표를 개표했다.
“두 번째는 베르데타 알펜드 님이 십니다.”
베르데타가 환하게 웃었다.
다음 표, 그다음 표 역시 베르데타 였다. 황녀는 그럼 그렇지, 하는 듯 한 얼굴로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 다.
“종이가 잘못 섞였나 봐요. 아리엘 양 이름은 뒤편에 몰려 있을 거예 요!”
율리아나가 또 속닥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웃어 보이면서도 내 심 폭 한숨을 내쉬었다. 네 번이나 내 이름이 불리지 않으니 긴장이 되 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집사가 다섯 번째 용지를 꺼내든 순간.
“아리엘 윈스턴 님이십니다.”
“역시!”
율리아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주변 영애들이 활짝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콘티나 1표, 베르데타 3표, 내가 1 표인가.’
아직 초반이니까, 유의미한 표 차 는 아니었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부터 역전하면 되는 거다.
집사가 마저 표를 개봉했다.
“아리엘 윈스턴 님이십니다.”
“오!”
“이제 시작이군요, 아리엘 양!”
어느새 친해진 영애들이 자기 일처 럼 좋아해 주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황녀가 이쪽을 돌아봤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위엄 어린 표정에 살짝 못마땅한 기 색이 어렸다.
“일곱 번째 역시 아리엘 윈스턴 님 이십니다.”
집사가 또 내 이름을 호명했다.
자중하려고 했지만, 세 번 연속이 나 불리니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어 렸다.
그리고 잠시 후.
“열 번째는 아리엘 윈스턴 님이십 니다.”
“열세 번째 역시……?
“스물세 번째는……『
나는 더 이상 올라가는 입꼬리를 제어하지 못했다.
“아리엘 양! 대단해요!”
“맞아요. 이미 우승한 거나 마찬가 지예요. 남은 투표지 수를 봐요! 저 게 몽땅 꽝이라 해도 아리엘 양이 이겨요!”
율리아나와 주변 영애들이 박수까 지 치며 즐거워했다.
그들의 말대로였다. 이미 대세는 기운 지 오래였다.
곧 얼마 남지 않은 투표지까지 모 두 개봉되었고, 최종 결과는 이랬다.
‘콘티나 14표, 베르데타 23표. 내
가 47표.’
굉장한 표 차였다. 빠르게 합산을 마친 집사가 말했다.
“총 47표로 아리엘 윈스턴 님께서 우승을 차지하셨습니다.”
“아리엘 양! 축하드려요!”
영애들이 한데 모여 내게 축하를 건넸다. 헹가래라도 쳐줄 기세였다.
곧 제노스 후작 부인이 나를 홀 중앙으로 불렀다. 그녀가 내게 꽃다 발을 건네며 말했다.
“내 파티를 빛내주어 고마워요. 아 리엘 양. 행복한 오월이 되기를.”
꽃다발을 받아드는 순간 짙은 꽃향 기가 코를 찔렀다.
작약, 유채꽃, 튤립. 온갖 봄꽃들이 한데 모인 꽃다발이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앙리에타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
시야 끝에 델레이나 황녀가 보였
다.
그녀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 측근들이 달려가 그녀를 위로하는 것이 보였 다. 황녀가 짜증스레 손사래를 쳤다.
황녀에게 시선이 머문 건 아주 잠 시였다. 나는 다시 메이 퀸의 증표, 꽃다발로 눈길을 돌렸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내 2호점 계 획이 성공적으로 첫 막을 올렸다는 것이.
“아리엘 양! 샴페인 따요, 저희.”
“앙리에타 부인께서도 허락하셨어
요!”
펑, 하고 축하 샴페인이 축포를 울 렸다.
그 승리의 축포 소리를 듣는 순간, 어쩐지 내 목덜미로 시선이 갔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수정 목걸이의 우아한 은빛 줄이, 연자수 정의 영롱한 빛깔이 시야를 물들였 다.
순간 목이 간지러웠다. 이상할 정 도로 간질거렸다. 금속 알러지도 없 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깃털로 쓰다듬는 것 같은 간지러움
이 목덜미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 갔다.
연회는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 다.
나는 고단한 몸을 이끌고 느릿느릿 홀을 나섰다. 거의 모든 레이디들이 떠나기 전 내게 한 번씩 인사를 건 넸기 때문에, 저택을 나가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드디어 제노스 후작저를 나선 나는 기다리고 있던 에른을 만났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에른은 금남이라는 규칙 때문에 연 회 홀에 들어오지 못했기에 마차에 서 기댄 채로 기다리고 있었던 듯 보였다. 에른이 마차에서 몸을 떼며 물었다.
“뜻은 이루셨습니까?”
나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손가락으로 메이 퀸의 증표인 꽃다 발을 가리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른이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 다. 나는 뿌듯한 기분에 잠겨 꽃다 발에 코를 묻었다. 봄꽃 향기를 맡 을 때마다 뿌듯함은 배가 되었다.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바로 돌아 가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하도 오래 서 있었더니 발이 지끈
지끈 아팠다.
내내 웃고 있느라 입꼬리도 부들부 들 떨렸고, 내내 영애들에게 시향해 주느라 손가락도 좀 아팠다.
돌아가자마자 욕조에 잠겨서 한 시 간은 꼼짝하지 않고 늘어져 있어야 지. 그런 다짐을 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에른을 태운 마차가 매끄럽게 후작저를 미끄러져 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레이디, 레이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레이
디!”
‘ 응?’
나를 부르는 건가?
설마 하는 마음에 나는 창을 향해 고개를 내밀어 보였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 누구지?’
누군진 모르겠지만 이대로 계속 가 다가 사람하나 칠 것 같아, 나는 황 급히 마부를 불러세웠다.
나는 황급히 마부를 불러세웠다. 마차가 천천히 제자리에 멈춰섰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저희와 잠시만 이야기를 나눠 주 세요!”
퍽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내게 애 원의 눈길을 보냈다.
이 사람들은 대체 뭐지? 나는 곤 혹스레 고민에 잠겼다. 잠깐 내려 볼까. 이상한 사람들인 건 아니겠 지?
고민하던 와중, 나는 사람들 틈 사
이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저 사람은…… 로잘린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