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화〉
청자색을 내려면 아이리스 염료가 필요했다.
청자색이 비싼 이유는 아이리스의 생산지가 여기서는 먼 세일라 항구 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굳이 그 먼 곳에서 아이리스를 들여오려는 상인 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세일라 항구에 가면 들판마다 아이 리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고 하 니, 청자색을 내는 염료가 비싼 건
희귀해서라기보다는 공급이 원활하 지 않아서, 라고 봐야 했다.
‘문제는 수요였지.’
상인들이 잘 들여오지 않는 청자색 염료를 굳이 사용하려는 영애는 적 었고, 때문에 상인들은 더더욱 아이 리스 수입량을 줄였다. 그게 아주 오랜 기간 악순환되었던 것이다.
“……대량으로? 갑자기?”
황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활
짝 웃으며 내 청자색 파우치를 내밀 었다.
“예, 황녀 전하. 마침 청자색은 제 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색깔이거든 요. 제이나 님께서 잔뜩 들여와 주 신다기에, 신이 나서 이렇게 머리부 터 발끝까지 청자색으로 도배를 해 버리고 말았지 뭐예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 회장이 수군 거림으로 가득 찼다.
‘길베르트 백작이 직접 그렇게 말
했다고?’
‘그 백작님 손이 큰 건 유명하잖 아. 대량이라고 직접 말씀하셨다면 분명 엄청난 양을 들여오실 텐 데……:
‘그럼 아이리스 염료도 자연스레 값이 싸지는 거 아냐?!’
수군거림을 들은 건 나뿐만이 아닌 듯 황녀가 미묘하게 입술을 일그러 뜨렸다.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 황녀 전하께서도 이 색
을 마음에 든다 말씀해 주셨지요?
좋은 정보가 될 듯해서요.”
물론 그건 나를 지적하기 위해 미 리 깔아 놓은, 이를테면 쿠션 같은 말에 불과했을 테지만 어쨌든 황녀 가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맞으니 까.
황녀의 미간이 한결 더 구겨졌다.
“……흠. 아이리스를 수입하다니. 길베르트 백작이 괜한 일을 하였 군.”
황녀의 말에 측근들이 당황한 듯 눈을 끔뻑이더니, 얼른 말을 보탰다.
“맞아요. 괜한 일을 하셨네요.”
“정말 그건 괜한 일이었어요.”
측근들이 앵무새처럼 맞장구쳤다.
황녀가 비뚤어지게 고개를 기울곤 말했다.
“청자색은 대대로 죽음을 뜻하는 색이니 말이오. 불길하지. 다들 좋아 하지 않을 테니 장사가 힘들 거요.”
“불길한 색……? 아, 마, 맞아요.”
“불길한 색이죠! 네. 죽음을 상징 해요.”
측근들은 얼른 맞장구를 치면서도 혼란스러운 눈이었다. 그런 말은 어 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어머나, 그랬던가요?”
나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이리스의 꽃말은 행운인데 죽음을 상징한다고요?”
황녀의 미간에 살짝 금이 갔다.
“재미있네요, 행운이 꽃말인 꽃에 또 그렇게 정반대의 상징이 있다니. 역시 꽃의 세계는 흥미로운 것 같아 요.”
황녀가 대답 대신 나를 가만히 쳐 다보았다.
“아리엘 윈스턴 양이라고 했던가?”
“예, 전하.”
“내 오라버니께서 요즘 부쩍 그대 를 자주 찾는다지?”
으응?
황녀의 오라버니라면 아제키안을 말하는 거겠지. 뜬금없는 이야기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황녀가 흘린 이야기에 주변이 또 한 번 쑥덕거렸다.
“아제키안 전하께서요? 윈스턴 영 애를요?”
“하지만 윈스턴 영애에겐……『
아제키안, 아리엘, 그리고 세드릭.
세 가지 이름이 여기저기서 튀어나 왔다. 맨 마지막 이름은 너무 뜬금 없이 튀어나와 순간 귀가 의심스러 웠다.
“이건 너무 흥미롭네요.”
“정말요. 심장이 마구 뛰는데요.”
주변 영애들이 흥분했는지 속삭임 들이 점점 커졌다.
으음, 예상치 못한 황녀의 말에 당 황하긴 했지만, 나는 좋게좋게 생각
하기로 했다.
‘구설수가 붙으면 홍보에도 도움이 되겠지.’
오늘 내 목표는 단 하나였다. 아이 리스 향수를 영업하는 것! 난 목표 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제키안 전하께서 한두 번 가게 를 찾으신 건 사실이지만, 자주는 아니랍니다.”
“조심하게, 윈스턴 영애.”
황녀가 나를 스쳐 지나가며 속삭였 다.
“황족은 탐내기에는 너무 큰 먹이 일 테니. 삼키려다 입이 다칠지도 모르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마치 내가 아제키안을 꼬시고 있기 라도 하다는 어투였다. 나는 순간 예의범절도 잊고 황당함을 가득 담 아 황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 는 이미 측근들과 함께 바람처럼 발 걸음을 옮긴 뒤였다.
‘저기요, 황녀님. 그쪽 오라버니 억 지로 들이밀어도 안 가집니다.’
나는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안 그 래도 매일 슬쩍 찔러보는 아제키안 때문에 신경 사납구만.
뭐,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 니까.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황녀 와의 대화가 꽤 길었던 탓에 회장 안의 모두가 내 쪽을 주목하고 있었 다.
나는 아까 내 향수를 시향하고 있
었던 영애들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향 수, 다시 시향하시겠어요?”
황녀와 거리를 유지하느라 물러나 있던 영애들이 얼른 다시 내게 달라 붙었다. 그녀들이 열렬히 고개를 끄 덕였다.
“네!”
“제 차례였어요!”
영애들이 내 신상을 흠뻑 들이마시
는 동안, 멀찍이 늘어선 다른 사람 들이 나를 흘긋거렸다. 몇몇은 쭈뼛 쭈뼛 내게 다가오기도 했다.
“드레스가 너무 예뻐요. 이렇게 선 명한 색감은 어떤 장인이 낸 건가 요?”
“그 목걸이는 레이너 백화점에서 일 년 내내 전시만 하던 그 목걸이 아닌가요? 억금을 준대도 안 팔던 그거요!”
영애들은 제각각 다양한 관심사를 갖고 내게 접근했다. 나는 기꺼이 웃으며 상냥한 미소와 함께 그 모든
관심에 대답했다. 정신이 없기는커 녕 말을 하면 할수록 신이 났다.
아무래도 나는 장사 체질이 맞는 것 같다.
앙리에타 제노스의 시선은 아까부 터 죽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베르타 백작 부인이 슬그머니 곁으 로 다가와 앙리에타의 시선을 좇았 다. 그녀가 주시하고 있는 대상을 찾기는 쉬웠다.
“샤를로트 양께서 새로 사귄 친구 라죠? 저 영애가.”
“음, 그렇다는군요.”
앙리에타가 느긋이 대답하며 와인 을 홀짝였다.
샤를로트는 인맥이 넓기는 해도 한 명과 진득이 교제하는 타입은 아니 었다. 그런 딸아이와 자주 어울리는 또래 영애가 생겼다기에, 못내 궁금 하던 참이었다.
앙리에타는 천천히 아리엘을 지켜 보며 마음껏 호기심을 채웠다.
“친화력이 좋은 영애로군요.”
베르타 백작 부인이 말했다.
앙리에타는 수 명의 영애들에게 둘 러싸인 아리엘을 흥미롭게 쳐다보았 다. 봄에 걸맞게 노랑, 분홍 등 봄 꽃색으로 물든 드레스들 사이에서 강렬한 청자색 드레스는 단연 눈에 띄었다.
봄의 제전에 처음 참석하는 영애들 은 보통 자신을 돋보여줄 화사한 색 을 우선으로 찾는다. 대개 밝고 아 기자기한 색깔의 드레스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은 비슷하기에, 오히려 비슷비슷한 드레스들 사이에 서 묻히곤 했다.
하지만 아리엘은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의 선택을 했 다.
그 결과, 지금 그녀는 이 회장에서 단연 돋보이고 있었다. 신인답지 않 은 과감함이었다.
‘샤를로트가 귀띔해주었을까.’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단지 드레스 색이 조금 독
특하다고 메이 퀸의 자리를 꿰찰 수 는 없었다. 처음 참석하는 영애라면 더더욱.
아리엘은 그 뒤로도 내내 영애들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젊은 영애들 사이에서 환성과 탄성이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앙리에타의 곁을 지키 는 측근들조차 호기심에 그쪽을 힐 끔 바라볼 정도였다.
“뭐가 저리 재미있을까요?”
“한창 뭐든지 즐거울 때죠. 보기 좋네요.”
부인들이 흐뭇하게 웃으며 부채질 을 했다.
“그나저나, 만에 하나 아리엘 윈스 턴이란 저 영애가 우승하게 된다면 꽤 곤란해지겠군요. 청자색이라니. 청자색을 내는 아이리스 염료는 꽤 나 비싸지 않나? 유행을 맞추겠다고 제도 영애들의 허리가 꽤나 휘겠는 데요?”
“아, 그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음? 무슨 이야기요?”
“아까 윈스턴 영애가 그랬다더군 요. 길베르트 상단에서 곧 대량으로
아이리스 염료를 들여올 거라고요.”
“어머나, 그게 정말인가요?”
금시초문이라는 듯, 한 부인이 눈 을 크게 떴다.
이야기를 꺼낸 부인이 부채를 팔랑 이며 답했다.
“길베르트 백작에게 직접 들은 이 야기라더군요. 그 백작님께서 자기 상단에 대해 허튼소리를 하진 않으 셨겠죠.”
“윈스턴 영애가 괜히 허세를 부린 건 아닐까요?”
가능성 없는 말은 아니었다.
사교계에서 영향력이 적은 자들이 자신의 능력이나 인맥을 과시하기 위해 확실하지 않은 정보들을 가지 고 허언을 하는 건 으레 있는 일이 었으니까.
“물론 그럴지도 모르죠. 허세라면 굉장한 도박을 한 셈이세요.”
“그렇죠. 사실이 아니었다고 판명 나면 신뢰도가 땅에 떨어질 테니까. 특히 이런 돈과 관련된 정보는 더더 욱 그렇잖아요.”
도란도란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으 며 앙리에타는 와인을 홀짝였다. 그 녀의 시선 끝엔 여전히 아리엘 윈스 턴이 있었다.
“앙리에타 부인께선 믿으시나요?”
한 부인이 은근슬쩍 말을 붙였다. 앙리에타가 흐음,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글쎄요. 믿을 이유도, 믿지 않을 이유도 없군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죠.”
그때 무언가 재미난 이야기라도 한 건지, 아리엘 주변의 영애들이 와르 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리엘은 그 가운데에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아 이였다. 다르게 말하면 사업가 체질 이랄까.
아리엘을 바라보며 앙리에타가 덧 붙였다.
“만약 저 아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교계에 한바탕 돌풍이 불겠군요.”
와인을 다 비운 앙리에타가 집사에 게 손짓했다.
“슬슬 투표를 시작하지.”
쏘 #
기묘한 긴장이 회장을 감돌았다.
방금까지 이 야기 꽃으로 시 끄 럽 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다들 손 에 투표지를 한 장씩 들고 고심에 빠져 있었다.
나는 긴장한 채 빈 투표지를 멍하 니 쳐다보았다.
솔직히 계획은 완벽하다 자부할 수 있었다. 델레이나 황녀가 알맞게 시 비를 걸어준 덕에 자연스럽게 아이 리스 대량 수입 소식을 퍼뜨리기도 했고. 그것만 봤을 때는 내 승률이 높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내 머릿속의 계산일 뿐이었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