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유일한 조향사가 되었습니다-61화 (61/153)

〈61 화〉

한 레이디가 미끄러지듯 홀 안으로 입장했다. 영애들의 시선이 동시에 아리엘의 드레스로 향했다.

드레스는 짙은 청자색빛이었다. 보 는 순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강 렬한.

디자인마저 특이했다. 요즘 유행하 는 풍성한 크리놀린 스타일과 다르 게,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치맛단 은 다물린 꽃잎 같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아리엘 윈스턴이 라 불린 영애가 그녀들에게로 고개 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아리엘이 빙긋 웃어 보였다. 청녹빛 홍채와 대비되는 연 한 색채의 자수정 목걸이가 눈웃음 과 함께 반짝 빛을 발했다.

“반갑습니다, 윈스턴 영애.”

영애 하나가 아리엘에게 말을 걸었 다. 아리엘이 웃으며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아리엘 윈스턴입니다.

처음 뵙겠어요.”

아리엘이 부드럽게 화답했다.

한 송이 꽃잎 같은 드레스 때문일 까. 상냥한 목소리에서 마치 꽃향기 가 나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꽃향기가 나는 것 같은데?’

한 영애가 코를 움찔거린 순간이었 다.

아리엘이 쥐고 있던 부채로 우아하 게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매력적

인 눈웃음과 우아한 부채질에서 배 어 나오는 기품.

그리고 어쩐지 더 짙어진 꽃향기에 눈이 마주친 영애는 숨을 멈췄다.

부채질은 주효했다.

코를 움찔거렸던 영애가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용기를 내요. 할 수 있어!

“저, 윈스턴 영애.”

결국, 결심한 듯 영애가 입술을 열 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실례지만 지금 착용하신 코사 지…… 생화인가요? 향기가 무척 좋 아서요.”

“아.”

나는 내 가슴팍에 꽂힌 코사지를 내려다보았다.

코사지는 아이리스를 본딴 모양으 로, 백 퍼센트 조화였다.

“어머, 아니에요. 조화랍니다.”

“그럼 이 꽃향기는……『

영애가 계속해서 향기에 대해 묻자 다른 영애들도 함께 코를 킁킁거리 기 시작했다.

“앗, 정말요. 굉장히 은은하면서 달 콤한 향기가 나요!”

“윈스턴 영애에게서 나는 것 같은 데요?”

영애들이 내게 한 걸음씩 가까워졌 다. 나는 수줍은 듯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아, 향기라면 아마 제가 오늘 뿌 리고 온 향수를 말씀하시는 것 같아 요. 처음 사용해본 향수인데 알아봐 주시니 기쁘네요.”

활짝 눈웃음치며 말하자, 영애들이 한층 더 호기심을 보였다.

“어머나, 향수라면 인공적으로 조

합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생화보다 더 생생한 향이 나네요!”

“신기해라! 그 향수만 뿌리면 영애 같은 향이 날 수 있는 건가요?”

“세상에, 난 향을 내려고 오늘 새 벽부터 몇 시간이나 꽃잎 푼 물에서 목욕했는데! 글쎄 아직도 손끝이 불 어 있다니까요?”

반응은 내 생각보다도 폭발적이었 다.

이 향수를 만드느라 몇날 며칠을 조향실에 틀어박힌 보람이 있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결정적 인 미끼를 던졌다.

“뿌려 보시겠어요? 마침 한 병 챙 겨 왔거든요.”

그러자 영애들이 동시에 눈을 빛냈 다.

“네!”

“부탁드려요!”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파우치를 열 었다.

아이리스 모양 향수병을 꺼내려니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지금 나는 온몸을 아이리스로 휘감고 있었으니 까.

아이리스색 드레스, 아이리스색 보 석, 아이리스 코사지, 아이리스 모양 향수병까지.

‘음. 너무 노린 티가 나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이리스로 도 배를 했으니, 아이리스에 미친 인간 아니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사람으 로 보일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리 길지 않은 장사꾼 인생 중 배 운 것이 있다. 노골적으로 느껴지더 라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게 최고라 는 것.

그 지론에 따라 나는 당당히 향수 병을 내밀었다.

“이 향수랍니다.”

“어머! 어쩜. 향수병까지 앙증맞아 요!”

“정말요! 꽃 모양 병이라니, 너무 예쁜데요?”

“소장 욕구까지 들어요!”

영애들은 다행히 꺼려하기는 커녕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는 점점 더 눈앞의 새 잠재고객들이 사랑스 러워지기 시작했다.

영업은 순조로웠다. 영애들은 아이 리스을 뒤집어쓴 인간이 뿌린 아이 리스 향수에 크나큰 관심을 보였다. 흐뭇한 기분으로 내가 영애들의 호 들갑에 맞장구를 치고 있을 때였다.

“아하하.”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웃음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

았다. 웬 영애가 나를 바라보며 웃 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주변 영애들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가볍게 드레스 자락 을 들어올리며 예를 차렸다.

귀족이 예를 차리는 존재. 나는 금 방 눈앞의 레이디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델레이나 황녀.’

황녀는 아제키안과 똑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금발을 늘어 뜨린 그녀는 아름답고 기품이 넘쳤

다.

솜사탕 같은 연하늘색 드레스까지 더해지니 동화색 속 공주님 그 자체 처럼 보였다. 그 뒤로는 역시 같은 연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영애들이 시녀처럼 늘어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황녀가 천천히 부채 를 접으며 말했다.

“아, 미안하오. 나도 모르게 그만.”

“안녕하세요, 황녀님. 아리엘 윈스 턴이라고 합니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올려 인사

했다. 황녀가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 다.

“아리엘 윈스턴이라. 들어본 적 없 는 이름인데. 봄의 제전은 처음인가 보오?”

황녀가 나를 천천히 둘러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카데미 때문에 최소 삼 년은 참 석하지 못했을 텐데도 늘 자신이 이 곳의 주인이었다는 것처럼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나는 착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황녀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다, 뭐 그런 사탕발림을 늘어놓으려던 때였 다.

“역시 신인의 패기는 다르군. 이렇 게까지 노골적이라니…… 흐음, 왕 관이 어지간히 탐이 나는 모양이 지.”

델레이나 황녀가 후후 웃으며 덧붙 였다.

“뭐,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보기는 좋군. 그런데 메이 퀸이 목표라면, 그 드레스 색깔은 좀 아니지 않을 까?”

황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부채 끝이 내 드레스 옷감을 스윽 훑었다.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메이 퀸이 입은 드레스 색깔이 어떤 의미 를 갖는지.”

물론 모르지 않았다. 메이 퀸의 드 레스 색은 곧 그해의 ‘대표색’이 되 니까.

델레이나 황녀가 느릿느릿 비꼬듯 말을 이었다.

“그 말은 즉, 바꿔 말하면 그 해 제도 레이디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색깔을 골라 온 사람만이 왕관을 쓸 수 있다는 것이지.”

“뭐, 그럭저럭 예쁜 색이긴 하군.

독특하고.”

델레이나 황녀가 내 드레스를 위아 래로 홅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사치스러운 색은 유행시킬 수가 없지. 왜일까, 레이 디? 간단하지. 너무 비싸거든.”

황녀가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늘어 뜨렸다.

“자, 한 번 생각해 보시오. 그 비 싼 청자색 염료를 들이부은 드레스 를 입고 다닐 수 있는 영애가 얼마 나 될지?”

황녀가 조곤조곤 말했다. 선배가 후배에게 가르침을 주듯 부드럽고 느린 말씨였다.

황녀 뒤에 늘어선 측근들이 한두 마디씩 거들었다.

“청자색 염료는 비싸죠.”

“윈스턴 백작의 외동딸이라 그런 지, 금전 감각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가봐요.”

“하지만 귀족이란 무릇 자신과 다 른 이들의 처지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하는 법 아니겠어요?”

델레이나 황녀가 제 측근들에게 손 을 들어 보였다.

“그만, 그만.”

꾀꼬리처럼 떠들던 측근들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너무 나무라지들 마시오. 처음이 니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윈스턴 영애라고 했던가? 이 제도엔 비싼 색깔의 맞춤 드레스는커녕 싸디싼 기성품도 사지 못해 허리띠를 졸라

매는 사람들 역시 있다네. 그걸 명 심해두도록 하시오.”

“아아, 어쩜.”

“사려 깊으시기도 하시지!”

황녀의 측근들이 감탄의 한숨을 뱉 었다. 어떤 영애는 제 뺨을 양손으 로 감싸 쥐었고, 어떤 영애는 사랑 에 빠진 눈으로 황녀를 바라보았다.

‘뭐지, 이 사람들.’

작은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 다.

나는 안 들릴 만큼 작게 폭 한숨 을 내쉬곤 말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 녀님.”

“감사할 것까진 없네. 부끄러워하 지도 마시게. 처음 참석하는 이들이 라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실수이니.”

“듣던 대로 황녀님께서는 마음이 넓으십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황녀 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황녀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는지 당황 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금방 자애로운 미소로 얼굴을 덮었다.

“그대도 앞으로는 아랫사람들을 배 려하는 마음가짐을 명심하고 사시 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와 황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황녀가 내게 한 말들을 가지고 속닥거리고 있었 다. 황녀 역시 그것을 인지하고 있 을 것이었다.

그녀는 꽤 흡족한 표정으로 부채를 폈다. 일침을 가한 게 만족스러운지,

이제 떠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기회를 이대로 홀 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엄청난 기회!’

회장의 거의 모두가 이쪽을 집중하 고 있다. 나와 황녀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듣기 위해서 다들 소리조 차 죽인 상태였다.

고요한 회장. 나를 향한 수많은 이 목들. 이보다 더 적합한 순간이 있 을까.

나는 입을 열어 아주 부드러운 목

소리로 말했다.

“염려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확실히 아이리스 염료는 비싸지요. 저 역시 이 드레스를 구 하기 위해 단단히 용돈을 축낼 각오 를 했었답니다.”

내가 길게 말을 붙이자 황녀는 좀 놀란 듯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피식 웃으며 부 채를 흔들었다.

“아까운 지출이 되었군. 중요한 건

옷이 아니라 그 옷을 입은 사람이거 늘/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었답니다, 황녀님.”

나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물론 실제로 속닥거리진 않았다. 이쪽을 집중하고 있는 모두에게 들 려야 했으니까.

“실은 길베르트 상단의 제이나 백 작님께서 놀라운 이야기를 귀띔해주 셨지 뭐예요.”

“……놀라운 이야기?”

“예. 다름이 아니라, 백작님의 상단 이 이번에는 세일라 항구에 들르신 다고 해요. 세일라 항구에는 유명한 특산품이 있잖아요, 황녀님.”

특산품? 그게 뭐지? 황녀 뒤의 측 근들이 수군거렸다.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이리스 염료요. 그걸 이번에 대 량으로 수입해오신다고 말씀하시지 않겠어요?”


0